아모르파티 | 사유와 성찰

아모르파티

김태겸
수필가


한때 사주풀이에 빠진 적이 있었다. 태어난 연월일시로 사람의 운명을 예측하는 명리학이 고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통계학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미국 유학 시절 통계적 방법론을 활용해 미래 예측에 관한 논문을 써본 적이 있기에 사람의 미래도 확률적으로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인생의 중요한 선택 과정에서 오류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점을 뒤지고 다니며 명리학 책자를 10여 권은 샀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보아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혼자 끙끙대다가 유명 강사의 인터넷 강의를 듣기로 했다. 수강료가 비쌌지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것 같은 기대감에 아깝지 않았다.

퇴근 후 저녁 시간을 이용해 인터넷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강사는 어려운 사주의 원리를 쉽게 풀어 설명해주었다. 인생을 계절의 변화에 빗대어 설명한 ‘춘하추동 운명의 원리’에 관한 공부를 100일 만에 마칠 수 있었다. 그동안 구입한 명리학 서적도 완독했다.

무엇이든 배우고 나면 써먹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심이다. 과연 배운 것이 맞는지 검증도 할 겸 실습에 나섰다. 먼저 나와 가족의 사주를 풀어보았다.

‘아 나와 아내 사이에 삼합(三合)이 들어 있어 내가 옴짝달싹 못하는구나.’

‘나와 딸 사이에 충(冲)이 들어 그때 그렇게 속을 끓였던 것이구나.’

‘이때는 역마살이 들어 해외에 나갔던 것이구나.’

과거 벌어졌던 일들이 사주와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인생이 사주라는 손바닥 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내도 내 사주풀이에 푹 빠져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다.

사주 공부에 자신이 붙어 한 걸음 더 발을 내디뎠다. 주변 사람들 사주를 봐주기 시작한 것이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사무실에서 몇몇 직원들 사주를 풀어주었다. 대부분 눈빛을 반짝이며 맞장구를 쳤다.

“정말 족집게네요. 제 삶을 지켜본 것 같아 소름이 끼쳐요.”

마침 한 여직원이 출산 휴가를 마치고 신생아 사주를 들고 왔다. 보기 드물게 좋은 사주였다. 오행(五行)을 두루 갖추었고 해롭다는 형(刑), 충(冲), 파(破), 해(害)가 전혀 없었다.

장성(將星)과 문창성(文昌星)이 들어 있어 총명하고 출세할 팔자였다. 육신(六神)을 짚어보았더니 정관(正官), 정재(正財), 인수(印綬)가 적절한 기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처복, 재복, 자식복도 있어 한마디로 부귀영화를 누릴 사주였다. 아이 엄마 입이 쩍 벌어졌다. 내친김에 사주에 맞춰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그녀는 기쁨에 겨워 눈물까지 글썽였다.

나도 기분이 들떴다. 여직원에게 덕담을 하고 희망을 품게 해주어 흐뭇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사주풀이가 빗나간다면 나를 얼마나 원망할까?’

아무리 후하게 생각해도 사주풀이는 통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여론조사에서 보여주듯 일정한 오차 범위가 존재했다. 게다가 나는 사주풀이의 결정적 오류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고 있지 못했다. 쌍둥이 사주에 관한 문제였다. 명리학 이론에 따르면 생년월일이 똑같은 쌍둥이는 운명도 동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변에서 보듯이 쌍둥이라고 비슷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명리학을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전쟁에 나가기 전 거북 등껍질을 태워 갈라지는 모양을 보고 길흉을 판단했다고 하는데 사주풀이도 그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 아닐까?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보려고 고안한 하나의 방편이었으리라. 나아가서 심리 치료 효과도 있을 것 같았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닥쳤을 때 그것이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판단하면 체념하게 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요즘 생명과학이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다. 게놈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사람의 유전자 개수는 물론 각 유전자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하나하나 파악해나가고 있다. 벌써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유전자 치료까지 할 태세이다. 앞으로 유전자에 대한 분석이 마무리되면 적어도 인간의 수명은 예측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물리학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있다. 양자역학에서 입자를 관측할 때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운동량의 불확정도는 커지고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진다. 쉽게 말하면 한 입자가 정해진 위치에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는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소한 입자도 그럴진대 한 사람의 운명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예측하려는 노력은 부질없는 짓인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달래려고 재미 삼아 사주풀이를 해보는 것은 괜찮겠지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모르파티’라는 라틴어 격언이 떠오른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어차피 운명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것이라면 급류 속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래프팅하듯 거친 물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순간순간을 즐기는 것이 현명한 삶의 자세가 아닐까?

돌이켜보면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었다. ‘걸림돌이 디딤돌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뼈저린 고통도 그 순간을 넘기면 약이 되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내 선택 과정을 거쳐 그 결과로 남은 것이다. 내 운명의 주인은 나인데 어찌 운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김태겸
수필가, 전 강원도 행정 부지사, 『문학 秀』 편집인, 서초문인협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 PEN한국본부 회원, 수필집 『낭만가(街)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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