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찾는 심신의 건강 | 숲이 사람을 살린다

숲에서 찾는 심신의 건강

신준환
동양대학교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


나무는 우리 마음을 상쾌하게 되살려줄 뿐 아니라 든든하게 지지해주기도 한다. 나무는 또한 우리의 음식이 되는 잎과 과일을 생산해주고 병이 낫게 하는 물질도 만들어준다. 더 재미난 사실은 나무는 우리 몸의 대사 과정에서 발생했으나 몸에 해로워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와 배설물을 먹고 살고 우리는 나무의 광합성 과정에서 발생했으나 나무에 해로워서 배출하는 산소를 호흡해 에너지를 만들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무와 우리는 완전히 딴판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과정의 자취를 제대로 더듬어보려면 지구에서 일어난 생물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꽤 많은 숲 해설가와 산림 치유 전문가는 인류가 숲에서 진화했기 때문에 숲을 그리워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어려운 논문이 아니라 학창 시절에 기본으로 공부한 인류 진화사를 떠올려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가 유인원의 한 무리에서 인류로 진화한 것은 숲에서 내려와서 사바나 환경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초원에 적응하기 위해 직립보행을 하게 되었고 손을 자유롭게 쓰며 두뇌가 발달했기 때문에 인류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영문일까?

제대로 보자면 인류의 진화와 인류 조상의 진화를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인류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나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조상인 포유류로부터 진화했다. 또한 포유류는 박테리아부터 파충류까지 이어지는 생물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인간이 특별난 것 같지만 지구 생물의 일원일 뿐이다. 우리는 짐승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지만 사실 우리는 짐승 포유류로부터 많은 고귀한 특성을 물려받았다. 모성애만 보아도 젖먹이 동물 포유류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오히려 사람은 자기 판단으로 자식을 버리기도 하지만 짐승은 그런 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지구의 생물은 모두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 즉 지구에 DNA가 한번 발생한 이후 모든 생물이 같은 물질 같은 구조의 DNA를 가지고 있고 진화 과정에서 돌연변이와 유전자 재조합이 일어나며 구성과 배열이 다양해진 것뿐이다. 그래서 박테리아 시대를 거쳐 다세포 생물 시대로 진화하면서 동식물이 나타나 다양한 대사 과정이 발현되었지만 모두 생명의 기본 대사 과정은 공유하고 있고 같은 물질을 만들어주므로 우리는 다른 생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지구의 생물은 모두 한통속이기 때문에 박테리아에서 우리 몸에 필요한 치료제를 만들어낼 수 있고 나뭇잎이나 과일이 우리의 에너지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변이 덕분에 나무를 비롯한 생물에서 식품뿐 아니라 건강 기능 물질까지 얻을 수 있다.

특히 인류의 가까운 조상 생물인 포유류는 공룡의 폭력을 피해 나무로 도망가 안식을 취했고, 유인원 시대에도 숲 지붕에 살며 여러 위험을 피했다. 많은 동물이 몸이 아플 때 색다른 나뭇잎을 뜯어 먹는다고 알려져 있듯이 숲은 치료제의 보고이기도 했다. 그러니 숲의 공기가 어떻게 상쾌하지 않을 수 있으며 나무가 든든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런 숲은 품이 넓고 깊어 우리를 사색의 세계로 이끌기도 하고 숭고한 사상을 꿈꾸게 북돋워주기도 한다.

숲은 이렇게 심원한 세계를 보여주나 우리가 심오한 사고를 추구하면 미로에 빠져 헤매게 된다는 것도 알려준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저 먼 숲은 깊지만 거기 사는 생물은 서로 긴밀하게 접촉하며 살아간다. 나무가 진화해온 길은 대기의 성분을 받아들이고 땅속의 수분과 영양분을 흡수하는 표면적을 넓히는 과정이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나무가 가지를 넓게 펼치고 뿌리를 깊게 내리는 것도 표면적을 넓히는 과정이다. 나무줄기를 파고들어가 사는 벌레도 자신의 접촉면을 넓히는 것일 뿐 심오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생태계의 이러한 속성을 모르고 인간이 심오한 환영을 만들면 술에 취한 것처럼 마음은 흠뻑 빠져들겠으나 숲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고 미로를 헤매게 될 것이다.

인간의 앎도 만남으로 연결된다. 정보 사회에서 중요한 과정인 인터페이스(interface)도 두 사물 사이에 공통되는 경계면을 형성하는 표면(surface)을 의미한다. 이렇듯 우리가 모를 때는 접혀 있지만 알고 나면 모든 것이 표면으로 풀려나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심오한 사상에 휘둘리지 말자. 불교의 초기 경전을 보면 석가모니의 설법이 심오하지 않다. 오히려 알기 쉽고 확실해 우리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다.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꾸밀 때 심오하다는 표현을 쓰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 생태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에게 “선생님 이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질문했는데 “아 오묘하고 심오해서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역시 선생님은 대가이십니다”라고 감탄했다. 그때는 정말 모르는 것이 많아서 솔직한 대답에 대가의 품격을 느꼈다. 이제 우리는 기본적인 것을 많이 알고 있고 아는 방법도 알고 있다. 모르면 심오함에 도취하지 말고 끝까지 파고들어 표면으로 드러내야 한다. 숲이 알려주는 건강한 사색의 길이다.

신준환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수목원 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동양대학교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다시, 나무를 보다』, 『나무의 일생, 사람의 마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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