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비유비무(非有非無), 그리고 묘유(妙有) | 불교와 과학의 세계

과학과 비유비무(非有非無),
그리고 묘유(妙有)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과학과 비유(非有)
18세기 말에 서양 근대 철학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임마누엘 칸트가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맡았었는데, 당시로서는 첨단의 학문이었던 뉴턴의 물리학을 연구하고 또 강의했다. 그의 명저 『순수이성비판』은 과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참된 지식을 제공하는가를 논의한 ‘과학철학’ 저서이다.

칸트는 과학 지식이 필연적으로 참인 이유를 밝히고자 자연 세계를 연구하는 우리 인식능력의 구조를 연구했다. 모든 감각 경험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데, 칸트에 의하면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 우리 바깥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만 감각 경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선글라스를 썼는데 세상이 온통 파랗게 보인다면 그 선글라스가 파랗다는 증거고, 모두 노랗게 보이면 그 선글라스는 노란색이다. 마찬가지로 감각 경험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일어나는 이유는 실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적 장치를 통해서만 감각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우리의 경험을 좀 더 구체적으로 구성하게 하는 12개의 범주(개념)도 선천적으로 타고났다고 보았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인식능력으로 구성하는 방식에 따라 현상으로 만들어진다. 칸트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으로서의 사물 그 자체, 즉 물자체(物自體)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이 물자체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단지 이 물자체가 보낸 정보를 우리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시간과 공간 그리고 12개의 범주로 걸러내고 구성한 내용에만 접근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견해가 서양 현대 형이상학과 과학철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반실재론(antirealism)의 시원이다. 사물은 우리 인식 구조와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능력이 구성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칸트는 뉴턴의 물리학이 절대불변의 필연적 진리를 보여준다고 믿었고, 그 이유를 우리 인식능력의 선천적 구조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뉴턴의 물리학은 여러 도전에 직면하다가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교체된다. 뉴턴이 생각하던 불변의 물리량, 예를 들어 질량과 시간 그리고 공간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각각 에너지와 상호 교환되는 질량으로, 관측자의 속도에 따라 빨라지고 느려지는 시간으로, 그리고 중력에 의해 휠 수도 있는 공간으로 달리 이해되었다. 지금 현재도 철학과 과학의 다양한 이론에 따라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고 있다. 이렇게 세계를 구성한다고 믿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물리량조차 어떤 고정불변의 본질, 즉 자성(自性)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볼 수 없다.

어느 이론도 사물에 고정불변한 자성이 실재한다고 보여주지 못한다. 그렇게 상주(常住)하는 자성도 또 그런 자성을 가진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대승의 제법개공(諸法皆空)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견해인데, 과학철학의 주류인 반실재론도 대승의 가르침인 비유(非有)를 보여주고 있어 반갑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우주에 독립된 실체가 존재하고 그것이 고정불변의 자성을 가진다는 독단적인 실재론 또는 상주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학과 비무(非無)
그렇다고 해서 과학철학의 반실재론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멸론(斷滅論)도 아니다. 실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도 모순이다(self-refuting). 왜냐하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 자체도 존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이렇게 논리적으로 모순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칸트라면 현상세계의 존재적 근원으로서의 물자체의 실재를 주장하면서 단멸론을 배척하겠지만, 현대 과학의 총아인 소립자물리학은 주로 입자와 물리량 사이의 인과적 및 수학적 관계에 주목할 뿐 물자체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는다. 소립자 세계의 입자와 속성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것들의 독립적 존재나 고정불변한 자성의 실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입자나 속성도 다른 입자 및 속성과의 인과적 내지 수학적 관계와 독립적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 입자나 속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들은 인과와 관계를 통해서만 이해되는 것들로서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비무(非無)].

일상의 경험으로 돌아와 대승의 비무(非無)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일상의 경험이 비록 우리 인식 기관을 통해 구성되더라도 그런 경험으로 드러나는 현상세계가 결코 무(無)는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현상으로 드러난 세계로서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지는 관찰과 실험으로 그 존재가 확인되는 것들도, 비록 여러 배경 이론과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관측 및 실험 기기를 통해서만 확인되더라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이론에 채색되어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비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과 묘유(妙有)
우리 일상의 경험과 과학의 역사는 어떤 사물도 고정불변의 본질 또는 자성을 가지고 상주하지 않는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실은 상주론도 단멸론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상식과 논리로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어떤 사물이 고정불변의 자성을 가진다면 그 자성이 불변하므로 그 사물은 변화하거나 파괴될 수 없다. 파괴될 수 없으면 영원히 존재(상주)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이 세계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안다. 그래서 상주론은 옳지 않다. 그리고 바로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반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멸론도 옳지 않다. 그러면 사물은 어떻게 존재할까?

대승의 전통과 현대 과학은 공히 만물이 자성을 가지고 상주하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과학에서 관찰하고 실험하는 모든 자연현상은 배경 이론에 의해 채색될 수밖에 없지만, 채색되었다고 해서 그런 자연현상이 존재하지 않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글라스를 끼고 해변을 걸으며 모래사장과 파도를 감상한다고 해서 모래사장과 파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님과 마찬가지다.

만물 가운데 우리 인식능력이나 배경 이론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없다[비유(非有)]. 그렇지만 그 반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비무(非無)]. 이 세계의 사물은 우리의 인식능력과 배경 이론에 의존해 성립되는 현상으로서 상주와 단멸을 모두 떠나 묘(妙)하게 존재한다. 이렇게 묘하게 존재하는 현상은 물론 자성이 없어 공하다. 이것이 내가 묘유(妙有)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 『불교는 생명과학과 어떻게 만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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