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에서의 깨달음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어떤 앎이 깨달음인가?
깨달음은 뭔가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만, 일반적인 앎과는 구분된다. 지금 창밖에 비가 온다는 것, 지구는 둥글다는 것,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 등은 내가 모르다가 알게 되는 것이지만, 그런 앎을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물리적 또는 관념적 세계로부터의 정보의 획득일 뿐이다. 정보의 획득은 개별 정보들을 종합·정리하는 인식 틀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 틀 내지 인식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앎이 깨달음일까? 천동설이 상식인 시대에 새롭게 알려진 지구 공전에 대한 앎, 표층의식(제6의식)이 마음의 전부라고 여기던 시대에 새롭게 제시된 심층마음(아뢰야식)에 대한 앎, 나의 실체성을 당연시하던 시대에 설해진 무아(無我)의 앎, 이런 것들은 세계를 보는 눈을 바꾼다는 의미에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일반적인 앎과 깨달음의 차이는 앎의 내용이나 크기나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앎을 얻는 방식과 태도의 차이라고 본다. 지동설을 처음 생각해내거나 무의식을 발견하거나 무아를 처음 통찰한 사람은 직접 내적인 자증(自證)의 방식으로 그 앎에 이르면서 그 앎을 통해 인격과 삶의 변화가 일어났을 테니, 그런 앎은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앎의 내용이 일단 개념화를 거쳐 명제화되고 객관화되고 나면, 그 후 보통 사람들은 개념적 차원에서 객관적 정보 습득의 방식으로 그 앎을 받아들일 테니, 그런 앎은 비록 같은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깨달음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증적 통찰과 그로 인한 인격과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그런 앎은 그냥 정보의 수용이지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붓다가 설한 깨달음: 번뇌의 자각과 소멸
붓다가 설법한 가르침의 내용은 경전에 고스란히 쓰여 있다. 색이 무상·고·공·비아이고, 수상행식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교학적 앎에 속한다. 교학을 넘어선 수행 차원의 앎인 깨달음이 되자면 무상·고·공·비아를 단지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직접 통찰(직관)해야 한다.
색인 내 몸이 무상·고·공·비아이고 느낌·생각·의도와 인식이 모두 그렇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을 관(觀, 위빠사나)이라고 한다. 여기서 관은 단지 교학 차원의 개념적 앎이 아니고 수행 차원의 자증적 통찰인 깨달음을 뜻하며, 따라서 바른 관으로부터는 인격의 변화가 일어난다. 즉 무아를 바르게 관하면 5온에 매이지 않고 떠나려는 염리심(厭離心)이 생기고, 5온을 즐겨 탐하려는 희탐심(喜貪心)이 사라진다. 이렇게 탐욕을 덜어 마음을 비우는 것을 지(止, 사마타)라고 하고, 이렇게 얻은 마음의 평정, 탐욕의 소멸을 ‘심해탈’이라고 한다. 나아가 심해탈한 사람이 ‘나의 생이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서고 할 일을 이미 마쳐 후생을 받지 않음’을 스스로 아는 자증적 통찰(해탈지견)을 가지게 되면, 이렇게 얻은 지혜의 증득, 무명의 소멸을 ‘혜해탈’이라고 한다. 1)
탐욕을 덜어가는 사마타(지)로 심해탈에 이르러 열반을 성취하고, 존재의 실상을 여실하게 통찰하는 위빠사나(관)로 혜해탈에 이르러 지혜를 성취하면, 행해야 할 수행은 모두 행하고 얻어야 할 깨달음은 모두 얻은 셈이다. 탐진치 3독심 중 탐심과 진심을 멸해 열반을 증득하고, 무명의 치심까지 멸해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불교의 간화선 수행은 과연 어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일까?
간화선에서의 깨달음: 번뇌 너머 본래 마음의 자각
탐욕과 분노와 무명, 탐진치는 인간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괴롭게 만드는 3독심의 번뇌이며, 불교의 수행은 깨달음을 통해 번뇌를 멸함으로써 해탈해 열반에 이르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깨달음은 탐욕의 소멸 그리고 무명의 소멸을 지향한다.
초기 불교의 깨달음이 탐욕과 무명의 소멸, 번뇌의 소멸에 초점을 맞춘다면, 대승불교의 깨달음은 번뇌의 소멸 이후 회복될 부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춘다. 그 부처의 마음이 번뇌의 소멸을 통해 비로소 생겨나거나 인연 따라 만들어지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 번뇌의 생성 이전부터 번뇌의 생성·소멸과 무관하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불생불멸의 마음이라는 것, 그 부처의 마음이 사실은 일체중생의 본래 마음이며, 바로 그 마음이 중생으로 하여금 번뇌를 고통으로 자각해 번뇌를 소멸하고자 발심하게 하는 마음이고 정진해 수행을 완성하게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이 마음의 깨달음을 지향한다. 대승불교는 이 마음을 번뇌 너머 중생의 본래 마음인 ‘본심’ 부처의 성품인 ‘불성’, 여래의 내장(內藏)인 ‘여래장’이라고 부르며, 이 본성의 자각 내지 자증적 통찰인 직관, 즉 견(見)을 강조한다. 이것이 견성(見性)이다.
초기 불교가 주목하는 번뇌는 하늘의 해를 가리는 어두운 구름과 같고, 대승불교가 주목하는 부처의 마음인 본심은 그 구름 뒤에 여전히 빛나고 있는 밝은 해와 같다. 초기 불교의 깨달음이 번뇌를 모두 제거해 부처가 되는 것, 구름을 모두 제거해 해를 보는 것과 같다면, 대승불교의 깨달음은 번뇌 너머의 본심을 내면에서 나의 마음으로 직접 자각하는 것, 구름 너머의 해를 꿰뚫어보는 것과 같다. 구름에 싸인 번뇌의 마음을 지닌 중생이 그 구름 너머의 해, 번뇌 너머의 본심을 어떻게 꿰뚫어볼 수 있을까?
대승불교의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은 초기 불교의 지관쌍수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번뇌적 망념을 좇지 않고 마음을 비우는 적적(寂寂)은 산란심을 없애는 지(止)에 해당하고, 그럼에도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성성(惺惺)은 혼침을 없애고 각성을 유지하는 관(觀)에 해당한다. 이것은 마음에 떠오르는 번뇌 망상, 눈앞을 가리는 구름을 하나씩 없애가면서 한 걸음씩 해로 나아가는 점진적 수행법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간화선(看話禪)은 떠 있는 구름을 통과해 단박에 해로 직접 나아가는 방법으로 고안된 수행법이다. 간화선은 화두(話頭)를 드는 것인데, 화두는 개에게 불성이 있냐는 질문의 답인 ‘무’, 부처는 무엇인가의 질문의 답인 ‘똥막대기’, ‘부모가 낳기 전 나는 무엇이었나’, ‘시체를 끌고 다니는 이것은 무엇인가’ 등과 같이 우리의 일상적 사유 논리로는 쉽게 해명되지 않는 구절을 말한다. 수행자가 선지식이 던져준 화두에 걸려 불현듯 의심이 일어나면, 그때부터 공부가 시작된다. 곁길로 새지 않고 오로지 그 의심 하나에 몰두하다 보면 의심이 의정(疑情)이 되고 스스로 의심덩어리인 의단(疑團)이 되면서, 어느 순간 나를 숨 막히도록 옥죄는 은산철벽이 등장한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그 의심의 답답함을 놓치지 않고 밀어붙이면 어느 순간 기적처럼 은산철벽이 무너져 내리고 나는 그로부터 풀려나서 새의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천하의 모든 중생을 향한 동체대비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
수행자가 의심 하나를 붙잡고서 은산철벽을 통과해 도달한 그 자리가 바로 모든 중생의 본래 마음자리, 모든 수행자가 번뇌를 멸해 도달하고자 한 부처의 마음자리일 것이다. 화두에 의해 일어난 의심은 해를 가리는 구름, 번뇌의 장벽을 뚫어내는 드릴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번뇌, 구름은 그 자리에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겠지만, 어느 한 지점 작은 구멍을 뚫어내어 본래 마음의 자리, 해의 자리로 한순간 진입해보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간화선을 본성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의미에서 ‘경절문(徑截門)’이라고 하고, 본래 마음, 본래 부처의 마음, 불성(佛性)을 일견하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이기에 돈오(頓悟)라고도 한다. 돈오 이후 그 번뇌 너머의 본래 마음자리, 구름 너머 해의 자리에 항상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부처일 것이다. 그런데 범부는 곧 다시 자기 마음을 가리는 번뇌, 해를 가리는 구름에 휩싸이고 만다. 그래서 그 번뇌를 제거하는 점수(漸修)가 요구되는 것이다. 간화선의 깨달음은 그렇게 번뇌를 멸해가는 점수에 앞서 자신의 본래 마음자리를 한순간이나마 확연하게 내적으로 직관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1) 지와 관, 심해탈과 혜해탈의 내용은 『잡아함경』(T2, 1a5-1a13)의 다음 구절에 근거한다. “색은 무상이라고 관하라. 이렇게 관하면, 그것이 정관이다. 정관하면 곧 싫어 떠남(염리)이 생기고, 염리가 생기면 즐겨 탐함(희탐)이 없어지며, 희탐이 없어지는 것을 심해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수상행식도 또한 무상하다고 관하라. (…) 이와 같이 비구로서 심해탈한 사람이 만약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스스로 증득할 수 있다. 즉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스스로 후생의 몸을 받지 않을 줄을 안다. 무상을 관하듯이 그것들이 고이고 공이고 무아라는 것을 관하는 것도 이와 같다.(當觀色無常, 如是觀者則爲正觀. 正觀者則生厭離. 厭離者喜貪盡. 喜貪盡者說心解脫. 如是觀受想行識無常. … 如是比丘心解脫者, 若欲自證, 則能自證,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如觀無常, 苦空非我亦復如是.)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 『심층마음의 연구』,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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