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명당, 수원 화성 성곽길|길에서 길을 만나다

울지 마라, 하늘아!
저기 동쪽 하늘을 보아라!

수원 화성 성곽길


누구나 가슴에 아픔 하나 품지 않은 사람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불과 11세의 나이에 비극적인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다면 그 슬픔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뒤주 속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던 아버지의 절규. 정조는 2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렇게 생을 마감한 아버지를 잊지 못했다.

흐린 날이다. 오전에 이미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갔다. 팔달문에서 팔달산 방향 골목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오르막이 시작이다. 좌측 수원 화성은 어른들의 어깨높이다. 오른쪽의 우거진 숲에는 몇 개의 오솔길이 언덕 허리를 따라 숲 속으로 사라진다. 계단은 쉬이 끝나지 않고 습한 공기는 이내 윗옷을 축축하게 적신다. 수원 화성 성곽길에서 가장 가파른 이 구간은 서남암문에서 끝이 난다.

수원 화성은 아버지(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그리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다. 할아버지(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눈물로 간청했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을 돌이키지는 못했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는 아버지의 묘를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옮기고 싶어 했다. 그리움과 못 다한 효도를 그렇게라도 풀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선택된 곳이 바로 수원 화산이다. 하지만 명당으로 알려진 화산에는 수원부(지금의 시청)와 함께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정조는 화산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이 이주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획 도시를 건설했고 그 도시를 둘러싼 성곽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화성이다.

서남암문에서 우측으로 접어든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약간의 오르막 위에 서장대가 보인다.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팔달산의 정상이다. 서장대에 이르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서장대 마루에 걸터앉아 땀을 닦는다. 시작도 알 수 없는 바람이 고마울 뿐이다.

서장대는 수원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산자락 바로 아래의 행궁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화산으로 옮긴 후 무례 13차례나 참배했다. 그럴 때마다 묵었던 곳이 바로 행궁이다. 정조는 생모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도 이곳에서 거행했다. 그리고 행사를 거행한 건물에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었다. 정조의 효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극진했다.

이제부터 내리막이다. 다시 계단이 이어지고 길은 한결 수월하다. 성곽길은 그리 오래지 않아 화서문에 다다른다. 화서문과 붙어 있는 서북공심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방어하는 시설이기도 하다. 성벽에서 외부로 돌출된 채 일부만 성곽과 연결된 형태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성곽 건축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구조물이다.

이곳부터 화성의 외곽길을 걷는다. 성곽길의 안쪽은 흙으로 쌓아 올려 성곽과 엇비슷한 높이지만 외곽은 화강암과 벽돌을 이용해 축조된 화성의 웅장함을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는 코스이다. 성곽 옆 느티나무 아래서는 10여 명의 어르신들이 모여 있다. 장기판은 2개인데, 사람은 10여 명. 훈수가 더 많은 셈이다.

500여 미터 전방의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며 서울 남대문과 비교될 정도의 규모다. 정면의 왕복 5차 대로는 정조가 수원에 행차할 때마다 이용한 길이다. 규모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장안문 다음은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다.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화홍문은 7개의 홍예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아래로는 맑은 수원천이 흐른다. 마침 오전에 내린 비로 수량이 부쩍 늘었다. 천에서는 백로와 왜가리 몇 마리가 연신 물고기를 잡고 있다. 5할의 성공률. 어디 가도 굶지는 않을 철새다. 방화수류정은 군사적인 목적에 의해 세워졌지만 조선 후기 최고의 정자로 손꼽힐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방화수류정에 올라 처음으로 다리를 뻗는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간 날은 1762년 윤 5월 13일이다. 양력으로는 7월 4일. 물론 사도세자의 기행과 아버지 영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하지만 정조에게는 사랑하는 아버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휙 바람이 불어온다. 그저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다. 비를 몰고 오는 바람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던 빗방울이 순식간에 폭우로 변한다. 죽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짐승처럼 울었던 정조의 울음이 행여 이랬을까. 창룡문까지는 아직도 1km나 남았는데, 정자 아래에 벗어놓은 신발이 흠뻑 젖었다. 울지 마라, 하늘아! 구름 걷힌 동쪽 하늘처럼 곧 이 비도 그칠 것이다.

글과 사진│박나루(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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