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의 깨달음 | 깨달음

초기 불교의 깨달음

임승택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깨달음에 대한 오해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는 사건을 가리킨다. 이전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진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경험이다. 어렴풋하고 찜찜하게 남아 있던 미해결의 문제가 이것을 계기로 확연하게 풀린다.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치면서 ‘아하 그렇구나!’라는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달리 말하자면 ‘인식의 전환’이 깨달음이다. 인식이 바뀐다는 것은 앎의 지평이 달라진다는 것이며, 새로운 시각으로 새롭게 도약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슴 한편에 남아 있던 체증을 날려버리고 환희로움으로 용약(踊躍)한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낱말은 왠지 무겁다. 마치 저 먼 세계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깨달음을 통해 부처가 된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인 ‘나’를 어찌 부처님에 비견할 수 있겠는가. 고로 깨달음이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깨달음이란 금기의 영역에 놓이게 된다. 심지어 “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라는 슬로건이 목격되기도 한다. 깨달음이라는 공허한 이상을 붙잡지 말고 현실의 행복을 증장시키는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깨달음의 종교’라는 ‘불교’의 간판을 내려놓아야 할 판이다.

깨달음에 대한 논의에서 신중한 자세는 기본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심성이 깨달음 자체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아서는 곤란하다. 목적지가 분명할 때 비로소 올바른 실천에 전념할 수 있다. 깨달음에 대한 불분명한 입장은 실천적 의지를 희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깨달음이란 현실과 유리된 고립무원의 경지가 아니다. 깨달음이란 고립된 낡은 생각이나 전도된 관념을 깨뜨리는 과정이다. 이 점을 망각할 때 깨달음은 신비의 베일에 가려지게 된다. ‘깨달음 신비주의’니 혹은 ‘깨달음 한탕주의’ 따위의 망령이 이렇게 해서 등장한다.

사성제의 반복적 깨달음
다음의 경전은 깨달음에 대한 초기 불교의 입장을 잘 나타낸다.

“비구들이여, 나는 완전한 지혜(aññā)의 성취가 단번에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와 반대로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실천하고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완전한 지혜의 성취가 있게 된다.” (MN. I. 479~480쪽)

이것으로 우리는 깨달음에 관한 분명한 입장을 내세울 수 있게 된다. 점차적인 닦음에 의한 점진적인 깨달음이 그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현실의 삶 속에서 점점 무르익어가는 깨달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렇다면 점차적으로 과연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인가. 『상적유경(象跡喩經)』에 기술되듯이 초기 불교의 깨달음은 사성제(四聖諦)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MN. I. 184쪽 이하) 부처님께서는 인간 존재가 본래부터 괴로움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셨다. 바로 그것이 고성제(苦聖諦)의 실제 내용을 이룬다. 나아가 그 원인을 자각하셨고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깨달음을 완성하셨다. 또한 이 과정은 집성제(集聖諦)와 멸성제(滅聖諦)에 해당한다. 『전법륜경(轉法輪經)』에는 이들 사성제 각 항목을 ‘12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깨닫는 양상’, 즉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이 묘사된다. 예컨대 고성제에 대해서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알아차리는 과정, “이 괴로움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라고 자각하는 과정, 그리고 “이 괴로움을 완전히 이해했다”라고 반조(反照)하는 과정이 묘사된다. 유사한 방식으로 집성제와 멸성제 그리고 도성제(道聖諦)에 대해서도 세 차례씩의 반복적인 깨달음이 묘사된다.

『전법륜경』에서는 삼전십이행상을 통해 사성제에 대한 지혜와 견해가 청정해진 연후에 비로소 ‘최상의 바른 깨달음(阿耨多羅三藐三菩提)’을 선언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SN. V. 422~423쪽 참조) 열두 차례에 걸친 반복적인 깨달음이란 점진적으로 무르익어가는 과정을 상징적 숫자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이러한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능가하는 또 다른 목적을 상정할 수는 없다. 삼전십이행상의 사성제야말로 천착해 들어가야 할 궁극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서 이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란 말인가. 혹여 이것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하지는 않았던가.

삼전십이행상의 첫 번째 관문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문해보아야 한다. 과연 괴로움을 괴로움 자체로 인정한 사실이 있었던가. 물론 괴로움이란 극복해야 할 대상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조바심이 되어 괴로움이라는 진리 자체를 놓쳤던 것은 아닌가. “왜 하필 나인가”, “과연 언제까지인가”, “당장 이것을 없앨 순 없는가” 따위의 물음은 유보해둘 필요가 있다. 삶의 진리로서 괴로움을 직시하는 태도의 전환이 필요하다. 괴로움에 대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라는 자각과 함께 “완전히 이해했다”라고 하는 반조는 그러한 연후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괴로움에 대한 바른 이해는 첫 번째 단추에 해당한다. 이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지면 나머지 과정 또한 어긋나게 된다. 다음의 경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네 층의 계단이 있는 전당(殿堂)으로 오르는 것과 같이, 만일 어떤 사람이 ‘첫 계단을 오르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단을 올라 전당에 올랐다’고 말한다면 그럴 이치가 없느니라. 왜냐하면 반드시 첫 계단을 지난 뒤에야 차례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단을 따라 전당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니라.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고성제에 대해 아직 밝게 알지 못하면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밝게 알고자 하면 그리될 수 없느니라.” (『잡아함경』, 권16, 436경)

고성제에 대한 바른 인식은 괴로움의 원인, 즉 집성제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집성제의 실제 내용이 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欲愛)’, ‘있음에 대한 갈애(有愛)’, ‘있지 않음에 대한 갈애(非有愛)’ 따위는 괴로움의 양상이 다양한 만큼 그 원인들 또한 차별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예컨대 감각적 쾌락을 원인으로 하는 괴로움에 빠져 있을 경우 다른 둘은 덜 중요한 것으로 밀려난다. 나머지 둘 또한 마찬가지이다. 특히 ‘있지 않음에 대한 갈애’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도피적 심리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도피적 심리가 강해질수록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대상은 괴로움만을 부추길 뿐이다.

괴로움의 현실과 그것의 증폭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는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인 멸성제에 대한 바른 안목과 체득으로 연결될 수 있다. 한편 멸성제를 체득하고 난 연후의 과정인 도성제는 괴로움을 떨쳐낸 상태에서 펼쳐가는 완성된 삶을 가리킨다. 멸성제와 도성제는 괴로움이라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직면했을 때 비로소 열리게 되는 순차적 과정들이다. 한편 이 둘의 순서는 닦고 난 이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난 이후라야 참된 닦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멸성제를 “체득했다”라는 자각이 있은 연후에 비로소 도성제의 온전한 닦음이 뒤따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연후 마지막으로 도성제에 대해 “닦았다”라는 반조와 함께 ‘최상의 바른 깨달음’이 완성 단계에 이른다.

사성제의 가르침은 이미 친숙하다. 그러나 그 깊이를 미처 헤아리지 못한 채 다른 엉뚱한 무언가를 찾는 경향이 없지 않다. 특히 한국 불교에는 “일시에 깨닫고 한꺼번에 완성한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의 풍조가 만연해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간화선(看話禪)이라는 독특한 실천 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초기 불교와는 거리감이 있다. 어떤 것이 옳으냐의 질문은 서로를 배태시킨 문화적·시공간적 차이를 도외시한 것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지금 이 순간 펼쳐지는 ‘나’의 실존에 비추어 더욱 절실한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임승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북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불교학연구회 회장으로 있다. 미얀마의 위빠사나센터에서 수차례 안거 수행을 마쳤다. 『고전요가의 이해와 실천』, 『위빠사나 수행관 연구』 등 다수의 역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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