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운주사
‘와불’이 일어날 때
현실 상처 치유
그림 | 한생곤 |
구름이 머무는 절, 운주사(雲住寺). 천불천탑이 구름 속에 있는 광경은 가히 상상만 해도 비경이다. 운주사의 돌부처는 하나하나 뜯어보면 한결같이 못생겨서 부처의 위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코, 입은 물론 신체 비례도 제대로 맞지 않으며, 정통 불상이 지닌 도상에서 크게 어긋난 파격적인 형식미를 띤다. 석탑도 마찬가지이다. 정형을 깬 파격미, 힘이 실린 도전적 단순미, 친근하면서도 우습게 느껴지는 토속적인 해학미와 아울러 그것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집단적으로 배치된 점이 운주사 불적의 신선한 감동이며 특별한 매력이다.
비보풍수의 태두인 도선 국사는 국토의 모든 산봉우리를 부처로 보았고, 우리나라의 지형을 행주형국(行舟形局)으로 짚었다. 국토 전체를 태평양으로 향하는 배(船)의 모습으로 본 것이다. 국토의 산세를 살피던 국사는 장차 나라가 변란과 내분으로 평안치 못할 거라고 예감했다. 동해안인 관동지방, 영남지방은 태백산맥으로 산이 높아서 무겁고, 호서 호남은 평야가 많아서 가볍기 때문에 동쪽으로 나라가 기울어진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보로 월출산에서 조금 떨어진 화순의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에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탑을 조성하려 했다. 뱃머리에 부처라는 짐을 많이 실으면 배가 균형을 잃지 않을 것이며, 천불천탑을 세우면 높은 탑은 돛대를 삼고, 천불은 사공이 되어 태평양을 향해 저어가면 풍파를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도선 국사는 즉시 사동(使童) 하나를 데리고 와서 터를 다듬어놓고, 도력으로 천상의 석공들을 불러 흙과 돌을 뭉쳐 천불천탑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천상의 석공들은 “다음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란 단서를 달고 도선의 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국사가 하룻날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고자 했으나 공사가 끝나갈 무렵 일하기 싫어한 동자승이 “꼬끼오!” 하고 닭 울음소리를 내는 바람에 석수장이들이 모두 날이 샌 줄 알고 하늘로 가버려 결국 미완의 ‘와불(臥佛)’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북두칠성은 풍요, 생명의 관장, 죽은 영혼이 돌아가는 별을 의미한다. 그래서 민족 풍습이나 민간신앙에 북두칠성과 관계된 것이 많다고 한다. 운주사의 칠성바위는 북두칠성의 배치를 땅에 구현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칠성바위의 크기가 북두칠성 각 별의 밝기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며 북극성 자리에는 바로 ‘와불’이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운주사가 간직한 설화의 백미가 서쪽 산 능선의 거대한 두 분의 ‘와불’에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다.
화순 운주사 전경 (사진 | 운주사 홈페이지) |
원래 와불은 석가모니 부처가 누워 돌아가신 모습을 새긴 열반상을 가리키지만, 운주사 ‘와불’은 각각 앉은 모습[좌상]과 선 모습[입상]으로 조각해 일으켜 세우려던 것이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누워 있는 부처님이 되어버렸다. 애초에 와불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 조각을 마친 후 등판을 분리시켜 세우는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탓이다. 마치 부부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기의 ‘와불’은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하늘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다. 무지한 민중을 위해 “겨우 견디고 살아가는 사바세계”에 내려올 하생 신앙의 미륵은 의당 저런 모습일 것이다. 누워 있는 부처가 일어서면 미륵 세상이 온다고도 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도 한다.
시인들은 다투어 운주사를 노래하고 소설가들은 미처 우리가 알지 못한 천불천탑의 비밀들을 끄집어낸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의 마지막 부분은 인상적이다. 영조 3년 변산반도와 월출산을 근거로 난을 일으킨 유민들이 6년 뒤 전라도 진도와 나주 일대에서 난을 일으킨 노비들과 합류한다. 관군에게 패해 달아나던 그들은 능주(화순) 땅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세우면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오며 노비와 천민이 양반 대신 나라의 중심이 되는 개벽천지 새 세상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게 된다. 배는 천민들의 세상이요, 그 배를 움직이는 물은 자신들과 같은 천민들이라는 믿음에서 천불천탑의 조성은 용화세계의 건설이자 상처 치유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운주사 와불 두 기. 와불이 일어서면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설화가 전해진다.(사진 | 운주사 홈페이지) |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무엇이 일어날 것이라 그들은 상상했을까? 중생들은 미륵을 본 적이 없기에 제각각 모습이 달랐을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해서 999개의 미륵상과 탑을 세우고 마지막 미륵만이 남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 천 번째 와불이 일어나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는 미래에 대한 간절한 희망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처럼 ‘와불’이 일어서면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흥미진진한 설화는 억압받으며 힘겹게 살아야 했던 많은 민초들에게 미륵화생의 간절한 희망이자 현실 치유의 방편이 되었다. 설화가 우리에게 주는 묘미도 그런 무한한 상상력 속에서 우리가 어느새 현실의 상처를 치유받고 밝고 희망찬 내일의 삶을 보듬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주 부석사가 풍광에서 으뜸이라면, 화순의 운주사의 불상과 불탑은 기이함에 있어 따를 곳이 없을 것이다. ‘천불천탑’들은 크기도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근처에 굴러다니는 자연석을 활용해 조성한 ‘못난이’ 돌부처와 소박한 탑들은 단순하고 투박한 서민들의 심성을 잘 보여주는 이미지들이다. 그야말로 ‘무기교의 기교’의 극치이다. 예술의 경지는 익으면 익을수록 단순해진다고 했다. 그 단순함 속에서 아주 노련한 솜씨는 서툰 것같이 보인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미학적 힘이 분출된다. 이 소박한 돌부처와 탑들은 독일 함부르크 미술대학의 요헨 힐트만 교수에 의해 빛을 발했다. 그는 미술사학자들이 “못난이 돌부처요, 동냥치 거지 탑”이라고 폄훼해 부를 때, “그것들이 진정으로 잘생기고 성스러운 미륵부처님이며 가장 원숙한 기교가 발휘된 걸작 석물”인 점을 밝혀냈다. 천 년 전 민초들이 염원했던 새로운 희망과 세상은 지금도 여전하며, 우리는 이들을 따라 다시 상상의 세계로 떠날 것이다.
백원기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평생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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