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언제나 내 안의 샘물, 내 안의 부처에서 | 나의 불교 이야기

길은 언제나 내 안의 샘물,
내 안의 부처에서


박윤정
번역가


며칠 전 새 보금자리로 이사를 왔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매일 절에서 치는 저녁 종소리를 듣고, 창문으로 절의 지붕과 나무, 하늘이 매 순간 새롭게 그려내는 풍경화를 감상하고, 넓은 절 마당을 비밀의 화원인 양 느긋하게 산책하며 명상의 시간을 갖고, 귀여운 미소를 머금은 인자한 얼굴에 예술적이기까지 한 미륵 부처님 상과 매일 대화를 나누면서 지금 해야 할 생의 임무를 기억할 수 있는 곳. 흔히 말하는 ‘공간의 외주화’ 측면에서 이보다 더 멋진 곳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서울 한복판에서 가격도 상대적으로 비싸지 않았다.

그렇게 ◦◦◦ 절 옆 구옥의 맨 꼭대기 층으로 짐을 옮긴 첫날, 나는 오랜만에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새벽녘에 잠결인지 꿈결인지 새벽 예불 소리가 들려왔다. 도심에서 깊은 산중에서나 느낄 법한 먼 그리움을 일깨워주는 소리라니!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의 깊고 큰 연민이나 서원, 고독, 언제든 꽉 찬 허의 공간에서 자유로이 노닐 수 있는 어떤 초월적 결기 같은 것도 느껴지는 듯했다. 달콤하고 아늑하며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그 순간 나는 비몽사몽 중에도 끄응 돌아누우며 속으로 외쳤다. ‘맞아, 이 예불 소리를 다시 만나러 여기로 온 거였어!’


‘옴 마니 파드메 훔’에서 ‘해달숨’까지
소리에는 몸과 마음, 영혼의 온갖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자연히 소리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소리를 받아들이는 나의 반응을 잘 관찰하면, 지금의 내 상태를 더욱 잘 느끼고 이해해서 소리의 힘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때로는 소리를 방편으로 닦은 마음 바탕 덕분에 귀한 인연을 만나거나 삶의 소명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내게도 소리에 이끌렸던 인상적인 기억들이 더러 있다. 오래전 30대의 뒤얽힌 정념들 속에서 조금은 힘들게 일상을 살아내고 있던 때였다. 어느 날 티베트 스님들의 탱화 전시회를 보러 법련사 갤러리를 방문했다. 그런데 지하 전시실로 이어지는 계단에 발을 내딛는 순간,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음악에 나도 모르게 핑 눈물이 고였다. 아무런 갈등도 없이 그저 평온하다 여기고 있었는데, 나의 감정이나 생각과 상관없이 불현듯 눈물이 솟구치다니!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에 나는 전시장을 나오자마자 이 음악이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이 음악은 바로 육자진언 ‘옴 마니 파드메 훔’을 티베트 스님들이 노래처럼 읊은 것이었다.

이후 나는 집에서 수시로 이 음악을 틀어놓았다. 신경에 거슬리지도 않고, 듣고 있으면 왠지 불안도 줄어들고 마음도 평온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옴 마니 파드메 훔’ 소리가 일종의 소리 돔을 형성해서 나를 숱한 부정적 생각과 파장들로부터 보호해주는 것 같은 신비주의적인 (그러나 다분히 과학적인)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나는 육자진언을 방편 삼아 일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기쁘게 나의 마음 바탕도 닦아나갔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 무의식적인 닦음의 효력과 공덕 때문이었을까? 이후 나는 어느 새벽 산책길에 절 문 앞에서 비질을 하고 계시던 비구니 스님과 우연히 마주쳤다. 숫기 없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초면에 차까지 한 잔 얻어 마셨다. 이후 매일 일정한 시각에 스님과 집 근처 동산을 운동 삼아 걸으면서 좋은 말씀도 듣고,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도 나누면서 한 시절을 잘 건넜다. 스님은 지금도 내 무의식 한편에서 상징적인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건강하게 숨 쉬고 계신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나와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떨어져 절로 들어오신 스님이 육자진언의 바탕에 스며 있는 자비와 큰 서원의 마음을 고리로 만나, 친구처럼 혹은 스승과 제자처럼 서로의 길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애썼던 것 같다.

인연의 법칙도 인과의 법칙과 같아서, 공부에 직간접적으로 보탬이 되는 인연은 또 다른 공부의 인연들을 열매처럼 풍성하게 맺어준다. 한 예로 나는 이 비구니 스님이 계시던 절에 가끔 법문을 하러 오시던 비구 스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법명을 받았다. 내게 법명을 주신 스님은 수십 년 전부터 공부와 법문을 통해서 많은 이들에게 바른 공부의 자세와 방법, 깊이 있는 지식과 지혜를 두루 나눠주고 계신다. 특히 이 스님의 『반야심경』과 유식학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현실과 무의식의 심각한 고비들까지 지혜롭게 넘어갈 수 있었다. 거기다 ‘일월성’-어감이 좀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해와 달의 성품이라는 원래의 의미를 ‘해달숨’이라는 순수한 우리말로 나름대로 바꿔보았다. 성품의 의미를 확장하면 영혼과도 닿는데, 이 영혼(spirit)의 어원이 호흡하다(breathe)에 있기 때문이다.-이라는 과분한 법명까지 받았다. 이 법명에 걸맞게 해와 달의 마음과 엄격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법칙에 따라서 이번 생의 소명을 숨 쉬듯 고요히 해나가는 것이 지금도 나의 가장 큰 바람으로 남아 있다.


매일 내 안의 종소리를 듣고 머리를 조아리다
분주하게 이삿짐을 부리고 보니 벌써 저녁때가 되었다. 짠맛이 유난히 진한 땀을 닦아내다 보니, 절의 종소리가 은은하면서도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공 ~ 공 ~ 둥 ~ 온 사방을 다독이는 종소리에 이끌려 옹기종기 어깨를 붙이고 앉아 있는 집들과 산과 절의 지붕을 잠시 내다보았다. 어느 순간 좀 울컥했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알면서도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그 복합적인 감정 줄의 끝에 깊은 초월적 슬픔 같은 것이 있고, 그 슬픔의 정서 속에는 사실 변치 않는 구체적인 감정 같은 건 없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커다란 초월적 슬픔의 깊은 우물에서 이따금 목을 축이거나 가르침을 듣거나 대화를 나누면서, 나를 비우고 내게 있는 것을 세상과 나누고자 노력하는 일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때로 보이거나 보이지 않아도, 들리거나 들리지 않아도, 크고 작은 사건과 인연들을 통해 내가 가야 할 길로 다시 나를 되돌려주는 많은 인연과 생명, 내 안의 샘물, 부처님에게 고마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서.


박윤정
법명은 일월성(日月性). 한림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쳤다. 카피라이터와 월간 『정신세계』 기자로 일했다. 주요 번역 분야는 명상과 불교, 심리학, 문학이며, 옮긴 책으로 『사람은 왜 사랑 없이 살 수 없을까』, 『디오니소스』, 『달라이 라마의 자비명상법』, 『틱낫한 스님이 읽어주는 법화경』, 『식물의 잃어버린 언어』, 『생활의 기술』, 『생각의 오류』 등 8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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