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외도의 분기점 제법무아 | 불교란 무엇인가 | 불교, A에서 Z까지

불교와 외도의 분기점
제법무아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 회장


불교와 다른 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로 갈라진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종교에서는 우주를 주재하는 영원불변의 신을 상정하기도 하고 또 생을 거듭해도 변하지 않는 나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다고 단언한다. 모든 것은 인연화합에 의해 변천해갈 따름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한마디로 표현한다.

모든 것이 변천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에 대해서는 인도의 다른 종교나 여타의 철학에서도 설하고 있지만 제법무아의 진리는 오직 불교만이 내세우는 독보적인 철학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제법’이란 무위법과 유위법을 포함하는 일체의 것을 말한다. 무아에서의 ‘아’는 산스크리트어로 아트만(ātman)이라고 하는데, 생멸 변화를 떠난 영원불멸의 존재로서의 실체나 본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법무아는 모든 현상에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제행무상은 누구나 용이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제법무아는 불교 이외의 학설이나 종교에서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불교 독자의 설이다.

붓다 당시의 외도들은 모두 불생불멸의 영원의 존재로서의 실체를 인정했다. 특히 ‘나[ātman]’라는 것의 실체에 대해서는 누구나 그것을 믿었다. 지금의 이 몸이 죽더라도 나의 실체는 다른 세상에서도 거듭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의 대표적인 것이 바라문교였다. 그들은 개인적 실체를 아트만이라고 했으며, 우주적인 실체를 ‘브라만(brahma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트만과 브라만의 합치를 수행의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이러한 아트만이나 브라만을 인정하지 않았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실체를 인식하는 것도, 증명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무기(無記)라고 해 문제로 삼지 않았다. 그러한 본체 혹은 실체는 우리가 지각하고 인식할 수 있는 세계로서의 현상계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불교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입증할 수 없는 본체 혹은 실체는 수행과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언급하지 않았다. 불교에서 문제로 삼은 것은 고정불변의 실체를 지니지 않는 현상으로서의 세계였다. 즉 우리의 인식과 경험이 미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관찰을 하고 사유했다.

불교에서는 외도들이 주장하는 아트만, 즉 ‘아(我)’라는 것을 ‘상일주재(常一主宰)’라는 말로써 표현했다. ‘상(常)’이란 변화하지 않고 상주하는 것, 즉 영원불멸을 말한다. ‘일(一)’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주(主)’는 주체이며 중심이 되는 것이다. ‘재(宰)’는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작용하며 영원불멸로서 스스로의 주체가 되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상일주재’라는 것을 좀 더 쉬운 표현으로 하자면, 개개인에 내재해 스스로를 주관하는 영원불멸의 영혼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모든 사상은 이러한 아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전개되었다. 인도의 사상이나 종교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종교나 사상도 대부분 이러한 아나 영원불멸의 영혼을 전제로 하면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은 이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서 상일주재의 영원불멸의 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불교 독자의 사상인 제법무아이다.

불교에서는 어째서 실체나 본체인 아를 인정하지 않는가? 불교에서는 연기설을 내세워 우리들의 심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일체의 존재는 인연화합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기 때문에 아를 인정하지 않았다. 연기에 의한 존재는 원인과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항상 변하기 때문에 아의 정의인 상(常)에 어긋난다. 또 연기에 의한 존재는 수많은 인과 연, 조건에 의해 존재하므로 어떤 것이 독립해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아의 정의인 일(一)에 어긋난다. 또 모든 존재는 무수한 연기의 중첩에 의해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어떤 고정적인 주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主)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 무수한 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그 무수한 연에 의해 존재하고 변하기 때문에 어떤 하나가 일방적으로 그것을 제어하고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아의 정의인 재(宰)에도 어긋난다. 예를 들면 내가 늙기 싫다고 안 늙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아의 부정은 한마디로 모두 연기의 진리에 의해 부정된다.

연기의 진리에 비추어보면 상일주재의 아라는 것은 그 어떤 것에도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제법무아를 법인(法印)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붓다께서는 “무상한 것은 고이며 고인 것은 아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영원불멸의 아라는 것이 있다면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도 생기지 말아야 한다. 영원불멸로서 변화하지 않는 내가 있다면 다른 것으로부터 영향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영원히 젊고 싶고 영원히 살고 싶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도 심신도 모두 다른 것에 의존해 존재하고 있는 연기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붓다께서는 연기의 진리에 비추어 종래의 인도의 사상과 종교와는 정반대되는 입장인 무아를 주장하셨기 때문에 영원불멸의 고정적인 아를 이유도 근거도 없이 상정하는 것이야말로 집착과 미망으로 이끄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간파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영원불멸의 나가 있는 것처럼 집착해 탐진치를 일으키고 고통의 나락에 빠져든다. 자기와 자기의 소유물이 영원한 것처럼 집착해 탐진치를 일으킨다. 그것이 곧 고의 원인이 된다.

무아를 체득해 집착이 없게 되면 무애자재(無礙自在)의 삶을 살 수 있다. 무아를 체득하게 되면 아무것에도 걸림 없는 삶을 살 수 있으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아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탐욕도 없을뿐더러 남을 멸시하고 시기·질투하는 일도 없게 된다. 무아에 의해 오히려 자타의 대립을 넘어서 대아(大我)를 완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고 해 모든 것을 공으로 보는 것도 제법무아와 같은 의미이다. 모든 것이 공이기 때문에 걸림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일체의 고액(苦厄)을 초월한다는 『반야심경』의 말씀은 이를 두고 한 것이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오온(五蘊)에는 진정한 나로서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액을 벗어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법무아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게 되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아를 잘못 이해해 나라는 것이 없으므로 어떠한 행위를 해도 과보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죽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수행을 하거나 선업을 쌓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막행막식을 하기도 한다. 이런 것을 악취공(惡取空)에 떨어진다고 한다.

무아라고 해도 영원불멸의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아를 부정하는 것이지 업력의 주체로서, 혹은 인격의 주체로서의 상식적인 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즉 오온이 화합한 가아(假我)로서 업을 형성하고 과보를 받는 주체는 하나의 통일체로서 변화의 연속선상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하는 자기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우리는 나라든가 타인을 구별해 있다고 하는 것이지 영원불멸의 존재로서의 실체를 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무아라고 해도 연기에 의한 존재인 우리들의 마음의 존재까지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연기에 의한 존재는 유라든가 무를 떠난 중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로부터 무아에 대한 이해는 호랑이가 새끼를 물 때처럼 너무 세게 물어도 안 되고 너무 가볍게 물어 떨어뜨려서도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라고 했다. 이 말은 공이나 무아를 이해하는 데에 신중을 기하라는 것으로 유와 무의 양극단을 떠나 중도의 입장에서 무아와 공을 이해하라는 말이다. 이것을 흔히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표현한다. 참된 공의 이치 가운데에서 묘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제법무아의 진리를 통해 참된 나, 진실한 모습의 나를 찾는 것이 불교 수행의 관건이다. 참된 나, 진실한 모습의 나라고 하면 사람들은 또 거기에 집착한다. 즉 나라는 실체나 본체에 집착하게 된다는 뜻이다. 참된 나, 진실한 나란 연기의 세계에서 어떻게 인식이 일어나고 연기라는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아에 대한 바른 이해는 논리와 추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깊은 수행에 의해 제법무아의 진리를 체득함으로써 비로소 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불교총지종 정사이면서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불교 교양으로 읽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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