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과 이론의 연기 | 불교와 과학의 세계

관찰과 이론의 연기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과학철학은 우리가 관찰하는 사물의 내용이 순수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고 논한다.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이 논점을 전하기 위해 나는 한 세기 전 칼 포퍼가 자신의 학생들에게 한 질문을 되풀이한다.

“자네들이 지금 보고 있는 내용을 내게 말해보라.”

학생들은 질문이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은 후 다양하게 답변한다.

“교수님 얼굴을 보고 있습니다.”

“칠판을 배경으로 한 교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입고 계신 스웨터 어디서 사셨습니까?”

“여자 친구 생각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칠판 앞에 서 있는 나를 향하고 있는 학생들의 시야에 들어온 데이터는 대체로 동일할 텐데, 이들의 관찰 내용은 각양각색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관심에 따라 우리가 주의를 집중하는 대상은 달라진다. 내 말에만 집중한다면 내 얼굴만 볼 가능성이 있지만, 칠판에 적은 내용과 관련지어 강의를 듣는다면 칠판도 함께 보게 마련이다. 옷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라면 선물 받은 내 스웨터에 주의를 집중할 것이고, 변심한 여자 친구로 고민하는 학생은 강의에 몰입하지 못한다. 우리 일상의 사소한 관찰 내용도 이렇게 보는 이의 관점에 의존(緣)해서 생겨난다(起). 관찰은 배경이 되는 관점이나 이론에 연기한다.

관찰의 이론 의존성은 과학사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코페르니쿠스 이전 천동설을 믿던 모든 이는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태양이 움직이고 있다”고 관찰했다. 그러나 지동설이 진리임이 드러난 지금 우리는 동해에서 감상하는 일출이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동일한 현상이 전혀 다른 관찰 내용으로 성립되는 이유는 관찰이 배경 이론에 의존하기 때문, 즉 그것에 연기하기 때문이다. 과학사에는 이런 예가 무수히 많다. 금속에 녹이 스는 원인을 우리는 그 표면이 산화(oxidization)되기 때문이라고 관찰한다. 그러나 18세기 라부아지에가 산화 이론을 제시하기 전까지 유럽인들은 그 이유가 금속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어주는 플로지스톤이라는 미묘한 물질이 떠났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관찰 내용은 배경 이론에 의존해 연기한다.

그런데 이런 연기 관계는 연기를 인과 관계로만 해석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연기 관계가 인과라면 원인이 오직 한 방향으로만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그 반대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관찰의 내용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물리적 데이터가 기존의 관점 및 배경 이론과 결합하면서 성립한다. 관점이나 배경 이론과 화합하지 않고서는 관찰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배경 이론이 관찰의 내용을 규정할 뿐 아니라, 그 역으로 관찰의 내용이 배경 이론을 결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플로지스톤 이론은 녹슨 금속의 무게가 증가한다는 관찰 내용이 알려지면서 설득력을 잃는다. 왜냐하면 금속으로부터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서 그 표면이 녹슨다면 어떻게 녹슨 금속이 더 무거워질 수 있는가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관찰 내용으로 그 배경 이론이었던 플로지스톤 이론이 폐기되고 라부아지에의 산화 이론이 받아들여지게 만들었다. 관찰 내용이 이론을 규정한 경우이다.

관찰 내용과 배경 이론은 서로에 의존하며 연기한다. 이런 상호의존 관계는 한쪽 방향만의 연기가 아니라 상호 연기를 인정하는 북전불교의 연기관으로 설명된다. 한쪽 방향의 의존 관계만을 말하는 인과로서의 연기만 인정하는 남전불교의 연기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북전불교의 포괄적인 연기관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그런데 근경식(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을 통해, 즉 세계가 가진 데이터(境)가 우리의 감각기관(根)을 통해 우리 의식(識)이 가지고 있는 관점 및 배경 이론과 화합해 성립된 관찰 내용이 그 자체로 고유한 본성, 즉 자성(自性)을 지니고 실재(實在)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초기 불교의 『밀린다왕문경』과 대승의 중관 나가르주나의 『근본중송』을 막론하고 불교는 이런 산물(product)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근경식 삼사의 연기를 통해 성립된 관찰 내용이 그 독자적인 특성, 즉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착각한다면 심각한 오류인데, 이 문제는 좀 더 깊이 논의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한국에서 철학과 과학 그리고 불교계에서 창발론(emergentism)에 영향을 받은 일부 논자들의 주장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잘 끓인 된장찌개를 한 숟갈 입에 넣어 혀를 통해 그 물질적 데이터를 뇌로 전달케 한다. 그리고는 의식 속에서 그 구수한 맛을 즐긴다. 이때 창발론은 원래 존재하지 않던 구수한 맛이 이 세상에 새로 출현했다고, 즉 창발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과연 옳을까? 맛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감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새로이 세상에 출현하는 존재자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지구상 수십억의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감각 경험을 통해 시시각각 새로운 존재자를 창조한다는 말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우리 인간이 그토록 끊임없이 존재자를 새로이 창조해낼 권능이 있는가?

창발된 것이 ‘새로운 것’이라는 말은 고유한 속성, 즉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는 말이다. 나로서는 대승의 공사상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런 주장이 불교계에서 유행하는 사실이 놀랍다. 된장찌개(境)가 혀(根)에 닿아 우리 의식(識)과 화합해 나온 산물일 뿐인 구수한 맛과 그 밖의 모든 감각 경험은 자성이 없어 공하다. 공한 이것들이 도대체 어떻게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사물이 이 세계에 새로 생겨난 것이라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초기 불교도 대승의 중관도 그런 존재의 실재를 부정한다. 신기하다고 해서 새로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혹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관점 및 배경 이론과 그것이 초래할 수도 있는 상(相)의 문제에 대해 논의하겠다. 절집에서는 흔히 상을 가지고 사물을 보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관점이나 배경 이론 또는 상 없이는 세계에 접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빛은 실은 전자기파여서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색깔은 물질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색깔이라는 상(perceptual concept)을 통해 시각 경험을 분류하고 정리할 뿐이다. 물리 세계에 색깔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 세계가 보내온 시각 데이터를 눈이 받아들여 우리 의식이 가진 상으로 가공해 색채 경험을 만들어낸다. 색깔은 우리 의식이 만들어낸 산물이고, 연기의 산물은 자성이 없어 존재 세계에 실재하지 않는다.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의 산물도 모두 마찬가지다. 색깔이라는 상을 통하지 않고 사물을 직접 꿰뚫어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상을 가지고 사물을 보지 말라는 가르침은 특정한 상에 얽매여 그것이 보여주는 내용이 실재하고 또 그 사물이 실체라는 오류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로 이해해야 옳을 것 같다.

상에 얽매이지 말라는 경고는 위에서 설명한 오감의 문제보다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개념(linguistic concept)에 묶여 사물을 보지 말라는 말로 들릴 때가 더 많다. 그러나 이 또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실행하기 불가능한 가르침이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을 때도 숟가락, 젓가락, 국그릇, 반찬, 식탁 등 우리가 언어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여러 사물과 접해야 식사가 가능하다. 젓가락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바쁜 아침에 그것으로 즉각 반찬을 집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이와 같이 개념이라는 상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가 이런 상에 얽매여 이 상이 포착하는 사물에 이런 상이 부여하는 자성이 실재하고 또 그런 사물이 실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되겠다. 윤리나 정치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상들을 상기하면 그런 오해가 얼마나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아마도 이것이 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경고가 실제로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 『불교는 생명과학과 어떻게 만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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