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담과 불교심리학으로 현대와 소통한다 | 나의 불교 이야기

불교상담과 불교심리학으로 현대와 소통한다


윤희조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윤희조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를, 서울불교대학원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불교학 전공). 서울불교대학원대 불교와심리연구원 원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동 불교학과(불교상담학 전공) 교수로 있다. 저서에 『불교의 언어관』, 『불교 심리학 연구』 등이 있다. 


포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연 계열을 선택했고, 서울에 있는 공대로 진학했다. 남자 고등학생들이 흔히 그렇듯이 먹고살기 좋은 길이라 생각했을 뿐 큰 고민은 없었다.

그런데 대학교 1학년 때에 막냇동생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문득 먹고사는 문제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어차피 잠시 머물다 갈 인생인데, 보다 근원적인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공부를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공대를 자퇴하고 다시 공부해 철학과로 진학했다.

처음 철학을 공부할 때 너무 신났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도 많았지만, 부지런히 수업을 듣고, 세미나에 참여했다. 그 자체가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동양 고전 강독, 과학철학, 언어철학 등 학과에서 열리는 세미나는 모두 참석하면서 공부했다. 가장 많은 사고의 전환점이 되었던 수업은 서양 고대 철학 수업이었다. 이때부터 고전 희랍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대학원 지도교수가 되시는 이태수 교수님 강의를 그 당시에는 필사를 하면서 철학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또 하나 인상적인 수업은 대학교 3학년 때 들은 인도 철학 강의였다. 동경대에서 학위를 받고 막 입국한 이종철 선배님께서 수업을 하셨다. 지금은 정년퇴직을 앞두고 계신 연세가 되셨지만 그때는 젊은 교수님이셨다. 그 당시 철학과 분위기가 서양 철학 일색이었는데, 불교논리학은 새로운 학문의 가능성을 보였다. 어쩌면 학부 때 강의를 했던 이종철 선배님이 강사가 아니라 교수였다면 애초부터 불교를 전공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서울대 철학과에는 서양 철학을 전공하는 교수진과 선배들이 많았던 터라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나 또한 서양 철학도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공부하는 내내 늘 목이 말랐다.

처음에는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했는데, 철학을 공부할수록 삶과 괴리가 생기게 되었다. 나의 문제의식을 철학이 제시하고 있는 문제의식에 억지로 꿰맞추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재미있고, 모든 것이 알고 싶던 철학 공부가 내 삶과 유리되기 시작했다.

그 매너리즘의 끝에서 접하게 된 것이 불교 수행이었다. 수행을 하면서 수행과 관련된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다 보니, 수행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적인 수행이라는 위빠사나를 공부해보고 싶어졌다. 1990년대 말은 위빠사나 수행이 막 전파되던 시기였다. 수행을 통해서 내 삶이 다시 활력을 찾게 되었고, 불교를 공부해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교 철학을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수소문하다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 학교에서 석사 과정부터 다시 밟기 시작했다. 불교 공부를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서양 철학을 공부할 때의 뭔지 모를 불편감이 불교를 공부하면서부터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서양 철학은 항상 탈레스에서 시작되는데, 그 탈레스 이전에 대한 이야기가 늘 궁금했다. 그런데 그 근원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찾을 수 있었고, 불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산스크리트어 문법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희열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희랍어 문법과 산스크리트어 문법이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왜 인도-유러피언 어족이라는 말이 나왔는지를 절절하게 알 수 있었다.

석·박사 과정을 밟으면서도 아주 재미있게 공부를 했다. 나는 어딜 가나 공부는 재미있게 하는 모양이다. 서양 철학을 해본 경험이 있는지라 불교를 학문적으로 어떻게 공부할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니 뭐랄까 불교가 나에게는 너무 친숙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전에 공부를 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불교가 제시하는 이론이나 경지가 어렵지 않았다. 특히 중관의 논리가 그 당시 나에게는 너무나 쉬웠기에 그와 관련된 박사 논문을 쓰게 되었다. 철학에서 언어와 관련된 문제가 중요하고, 불교에서는 실재와 관련된 문제가 중요하기에 둘의 관계를 살펴보는 논문을 쓰게 된 것이다. ‘불교에서 실재와 언어적 표현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게 되었다.

마침 운이 좋아서 모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었고, 불교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아 이제는 불교만 하면 되겠구나’ 했는데, 불교상담 전공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부처님이 잠시라도 짬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모교는 상담과 심신 치유를 전공하는 학과가 함께 있어서, 불교도 두 전공의 토대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한편으로는 올바른 방향성으로 보였다.

불교의 현대화의 한 방편으로 불교상담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 그때부터 나의 업무가 되었다. 모교에서 석사 때부터 이웃 전공에 관심이 있었기에, 유아와 무아, 의식과 무의식 등과 같은 문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그리고 불교상담의 토대가 되는 학문으로 불교심리학을 정립해나가는 작업도 함께했다. 이런 작업을 한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관련 서적 10여 권을 번역하고 관련 논문 30편을 등재했다. 원생과의 수업은 항상 이러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수업에서 가장 많이 배우는 사람은 나였고, 가장 많은 통찰을 받은 것도 나였다. 이러한 통찰은 또다시 원생에게 회향하는 순환이 늘 이루어졌다.

내가 아마 불교학에만 머물렀다면 고답적인 학문에만 머물렀을 것이다. 나는 불교상담을 통해 현대와 소통하는 불교로 나아가게 되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작업을 계속할 것 같다. 불교가 그들만의 리그에 머무는 한, 확장성은 사라지고 시대와의 소통은 단절된다. 현대인의 고민과 문제에 대해서 답할 수 없는 종교와 철학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종교와 철학이 아니게 된다.

21세기의 문제에 대해서 답할 수 있는 철학과 종교라면 그 철학은 2,500년 전의 종교이든, 100년 전의 철학이든 현대의 철학이고 현대의 종교이다. 불교상담과 불교심리학을 연구하면서 이런 고민을 항상 한다. ‘나는 현대인의 문제의식에 대해서 답하고 있는가, 현대의 고민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아마도 이 일은 인연이 주어질 때까지 계속할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나는 불교를 만난 이후에 더 이상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서 물을 마셨고, 목마름을 해결했다. 당신도 그렇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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