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가운데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제행무상' | 불교란 무엇인가

변하는 가운데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제행무상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 회장


불교를 상징하는 용어 가운데에 삼법인(三法印)이라는 것이 있다. 삼법인이란 세 가지의 뚜렷한 표시라는 의미이다. 그 가운데에 첫 번째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제행이란 생멸 변화하는 일체의 현상을 가리키며 무상이란 일체의 현상이 항상 그대로가 아니고 늘 변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현상은 인연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가운데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데에 불과하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그 주체가 된다고 생각되는 우리 자신까지도 인연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가운데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데에 불과하다. 무상이란 어느 순간은 멈추어 있다가 갑자기 변하거나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니다. 찰나 찰나 변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이다.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낙엽이 지고…’ 하는 차원의 낭만적인 변화만이 무상이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실로 엄숙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상 만물은 물론이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포함해 모든 것이 한 찰나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변해가는 것을 말한다. 사물이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일 뿐이다. 눈앞에 책상이 있고 책이 있으며 연필이 있다고 느끼지만 그것 또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도 매 순간 변한다. 오죽하면 우리의 마음은 제 멋대로 날뛰는 원숭이와 같다고 하겠는가? 우리의 마음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물도 그때마다 다르게 보인다. 어제 보니 슬프던 달이 오늘은 기분 좋게 느껴진다. 어제 보면 곱던 사람이 오늘은 밉게 보이기도 한다. 금방은 기분이 좋았는데 조금만 지나면 우울해진다. 이와 같이 시시각각 우리의 마음도 변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마음이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자기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육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느끼지만 10년 전, 혹은 20년 전의 어릴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하루, 이틀 하는 차원이 아니라 찰나적으로 변하는 것이 제행무상이다.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오늘날 과학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옛날에는 기껏해야 분자나 원자가 물질의 최소 단위라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은 전자·중성자·중간자 등 초미립자의 세계를 관찰한 결과 그러한 초미립자도 고정된 어떤 실체가 아니라 항상 변화하는 일종의 에너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물질에서 우주, 천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동적이라는 과학적 관찰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이 진리라는 것을 입증하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과학적 예를 들지 않더라도 제행무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눈앞의 사실로써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달리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명한 것으로 간주한다. 무상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우리가 잘 관찰해보면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것이 또한 무상이다. 

경전에서는 무상에 대해 ‘무상하기 때문에 고이다’ 혹은 ‘무상하기 때문에 무아이다’라고 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 한 비구가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비구여, 아무리 작은 물질이라도 항상 머무르며 변하지 않는 것, 영원히 존재하는 그런 것은 없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철저하게 무상을 설하셨다. 무상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괴로움을 느낀다. 이것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이 변화하면 거기에 따라 슬픔과 고뇌가 따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나의 몸이 늙어가는 것에 대해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누구든지 언제까지나 젊음을 유지하면서 재산을 보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행복을 누리며 살 수는 없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내가 누리고 싶은 것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는 현실에서 슬픔과 고통이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무상한 것은 고’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대전제로 내세우는 것 중의 하나가 인생을 고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이 고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지 못한다. 인생에 약간의 고통은 따르지만 그래도 즐거움이 많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고통이 있으므로 즐거움이 즐거움일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해보면 즐거움은 잠시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즐거움, 기쁨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잠시뿐인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우리가 견뎌야 하는 고통의 시간은 너무나 길다. 건강하던 몸도 어느덧 늙고 병들며, 많던 재산도 이슬처럼 사라져버린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거기에 상응하는 고통이 따르는 것이 세상사이다. 내가 바라는 상태대로 영원히 머물러 있으면 좋겠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거기에서 슬픔과 고뇌가 생겨난다. 

불교에서 이러한 무상을 관찰하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을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허무주의를 강조하기 위해서 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제행무상의 진리를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집착과 교만한 마음을 버릴 수 있으며, 진정한 행복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상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함으로써 나와 나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한 교만한 마음을 경계하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누릴 때에는 그 모든 것이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이며 자기의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인 줄 안다. 남들은 무능하고 어리석고 게으르기 때문에 그러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남을 얕보거나 경멸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리는 모든 세속적 행복은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인연이 화합해 자기에게 그러한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것은 조건이 변함에 따라 변한다. 이것이 무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을 누릴 때에도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수많은 인연의 제공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무상에는 번영과 행복의 쇠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불행한 상황도 무상하기 때문에 개선될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불행과 고통의 상태도 노력 여하에 따라 번영과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인연을 만들도록 끊임없이 노력과 정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떠한 상태라도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원인과 조건이 변화하면 그 상태도 따라서 변한다. 생긴 것은 반드시 멸하고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기 마련이며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상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순간순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시간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또한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찰나 찰나의 선악의 행위가 집적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천하는 무상의 세계에서 찰나 찰나의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하게 변하는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절실하게 무상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의 몸과 거기에 따른 느낌, 생각, 의식이 모두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 자신이 무상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거기에 집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지 않은 것으로 집착하고 착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우리가 무상을 말하는 것은 일체를 초연하게 바라봄으로써 무상한 것에 대한 집착을 떠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욕망이 제거되고 고통으로부터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안달하다가 그것을 포기해버릴 때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해지고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가끔 경험한다. 물론 무상을 이해하는 것과 포기하는 것은 성질이 다르지만 우리가 집착을 떠날 때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더 좋은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처럼 우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것에 대해 그것을 고정된 것으로 붙들어놓으려는 데에서부터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 무상을 철저히 이해하고 체득했을 때 쓸데없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그로부터 오히려 건전한 노력을 기울일 수가 있다. 무상하기 때문에 오히려 개선의 기회가 찾아올 수가 있다. 이처럼 제행무상에 대한 바른 인식은 구도심과 종교심을 일으키고 집착과 교만을 제거해 마음에 흔들림이 없게 하며, 순간순간을 충실하게 살면서 해탈이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불교총지종 정사이면서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불교 교양으로 읽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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