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명상
정준영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둘째 아이가 유치원에 다녀왔다.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궁금했다.
“오늘은 유치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니?”
“아빠, 우리 오늘 명상했어!”
“와! 너희 유치원은 명상도 가르쳐주는구나! 명상 시간이 따로 있어? 무슨 시간에 했는데?”
“음… 우리가 떠들고 장난치다 혼날 때 하는 거야.”
명상이 유행이다. 대중매체를 통해서도 다양한 명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명상의 영역은 방대하고, 사람에 따라 이해하는 방식도 다른 것 같다. 아마도 유치원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의 훈육법으로 명상을 사용하셨나 보다. 사실 눈을 감고 몸을 세워 앉아 있기는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어렵다. 눈을 감고 앉으면 다리가 저리고 어깨는 무겁다. 집중은 사라진 지 오래이고 이완보다는 버티기에 들어가기 쉽다.
명상은 이처럼 어려운 것인가? 오늘날 명상은 이완이나 힐링 등을 통해 심신의 건강법으로 알려져 있다. 즉 좋지 못한 심신의 상태를 좋게 만들고자 진행한다. 바쁜 일상에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잠시 벗어나 자연과 만나거나 휴식을 취하고 다시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충전의 방식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명상은 쉬운 것인가? 만약 명상이 쉽고 빠르게 행복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지금 전 인류는 명상에 빠져 있을 것이다.
명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명상은 종교적 역할이었다. 명상(冥想, 瞑想)의 사전적 의미는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을 말한다. 그럼 고요히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영어로 접근하면 조금 더 구체화된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meditation’에 대해 ‘한 주제 혹은 일련의 주제에 대한 지속적인 생각, 숙고, 진지하고 지속적인 성찰 또는 정신적 묵상(contemplation)’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묵상하다’의 의미를 포함하는 ‘meditate’는 ‘깊고 지속적인 성찰’ 또는 ‘생각에 집중해 머무름’을 의미하는 라틴어 ‘meditari’에서 파생되었다.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붓다의 명상은 무엇일까? 초기 불교 안에서 ‘생각’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들 중에서 명상은 선정(禪定)의 의미에 가깝다. 팔리어 ‘자나(jhāna, 禪定)’ 역시 ‘묵상하다’, ‘명상하다’, ‘생각하다’의 의미를 지닌 ‘자야띠(jhāyati)’에서 나온 중성명사이다. 산스크리트어 ‘디야나(dhyāna, 禪那)’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대상을 향한 깊은 생각, 그리고 집중을 수반하는 맥락에서 명상은 선정에 가깝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다루는 명상이나 선정의 뉘앙스는 언어적 의미보다 특정의 방법 혹은 상태로 이미 자리 잡은 것 같다. 다만, 명상은 유일신교에서 배격할 만한 용어도 아닐뿐더러, 불교에서 가볍게 다룰 의미도 아닌 것은 분명하다.
붓다는 명상도 선정도 넘어서고자 했다. 그는 신을 향한 기도나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았으며, 자기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을 것을 강조했다. 동시에 몰입을 통한 일시적 고요함에 머무는 것 역시 경계했다. 붓다는 지금 이 순간의 알아차림과 함께 성장하는 과정을 제안했으며 이를 ‘바와나(bhāvanā, 발전, 修行)’라고 불렀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거짓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참고: 월간 『불교문화』 2020년 10월호) 일반적으로 명상은 수행과 동의어처럼 다루어지기도 한다. 오늘날 불교 명상과 불교 수행의 차이를 구분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명상은 수행과 동등한 의미라기보다 부분 조건에 해당한다. 우리는 성장과 발전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고 그중의 하나가 명상이다.
그렇다면 붓다의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붓다는 크게 세 가지를 제안한다. 바로 ‘윤리(戒)’, ‘집중(定)’, 그리고 ‘지혜(慧)’이다. 이들을 수행자가 반드시 닦아야 하는 세 가지 훈련(Ti-sikkhā, 三學)이라 부른다. 이 세 가지 훈련법은 각자 독립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수행자는 계학(戒學)을 통해 욕구와 분노 등[貪瞋癡]을 외적으로 표출하지 않을 수 있다. 쉽게 말해 싫어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욕을 하거나 때리고 싶어도 참는 것이다. 이때 순간의 감정을 언행으로 표출하지 않는 것이 계의 역할이다. 아마 윤리가 없다면 세상에는 폭력이 난무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육근(六根)의 단속은 수행자를 외부의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처럼 성장시킨다.
하지만 마음은 쉽지 않다. 외부로 표출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 안의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표현은 안 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는다. 집중(定)은 끓는 마음을 바라보도록 도와준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화가 날 때 내가 화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마음은 싫어하는 대상에서 벗어나 나에게로 올 수 있다. 분노의 대상을 잠시 잊고 나의 상태를 살필 수 있는 것이다.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손이 떨리는지… 싫어하는 대상을 잃은 분노는 잠시 휴지기를 가질 수 있다. 그 틈을 통해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객관적인 접근은 분노와 내가 하나라는 동일시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집중은 마음뿐만 아니라 몸에도 다가간다. 수행자는 호흡, 통증, 가려움 등의 감각에 대한 집중이 가능하다. 반복되는 집중의 훈련(定學)은 나타나는 현상의 생성, 변화 그리고 소멸을 객관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과정에서 마음의 힘은 마치 튼튼한 줄기처럼 성장한다. 덕분에 우리는 불선(不善)과 헤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씨는 숨어 있다. 언제든 조건만 형성되면 이들은 튀어나올 기세다. 지혜의 역할이 절실하다. 지혜가 숨어 있는 불씨를 찾아 없애는 것은 아니다.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을 선택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혜는 어떠한 현상이든지 상호 의존해 발생(緣起)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조건에 따라 생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혜학(慧學)이다. 마치 흔들리지 않는 뿌리(戒)와 튼튼한 줄기(定) 덕분에 실한 열매(慧)를 맺는 것과 같다. 세 가지 훈련은 팔정도(八正道)로 구체화된다. 이 과정에서 수행자는 모든 현상은 변하고(無常), 변하는 것은 만족스럽지 못하며(苦), 변화 안에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다는 사실(無我)을 알게 된다. 이것이 붓다의 수행법이다.
이 글은 명상의 자세가 어렵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명상은 안락하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 혹은 심신의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명상을 지속하다 보면 좋은 순간들보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많이 만나게 된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왜냐하면 명상은 괴로움을 회피하고 즐거움을 찾기 위한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붓다의 수행은 성장을 추구한다. 성장에서 필요한 것은 즐겁고 편안함이 아니라, 그것이 괴로움일지라도 있는 그대로를 경험하고, 버티고, 이겨내는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반복적으로 키워낸 경험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의 자산이다. 수행자가 추구하는 편안함은 괴로움이나 어려움이 없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문제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정준영
스리랑카 국립 켈라니아대학교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주제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명상학 전공 교수로 있으면서 대원아카데미, 한국명상전문가협회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 다른 명상』 등이 있다.
1 댓글
괴로움을 회피하고 즐거움을 찾기위해 명상을 하는것이 아니라 명상을 통해 다양한 문제들이 있어도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능력을 키운다는 글귀가 너무도 마음에 와닿아 슬프면서도 몬가모르게 뭉클합니다. 좋은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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