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성지 보드가야 | 부처님 4대 성지 순례

위대한 성지 보드가야


보드가야에 있는 마하보디 대탑

불교의 4대 성지는 여래께서 태어나신 곳, 위없는 정등각을 깨달으신 곳, 위없는 법의 바퀴를 굴리신 곳, 반열반(般涅槃, parinirvāna)하신 곳이다. 부처님께서는 이곳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네 가지 장소이며, 이 4대 성 지에 순례를 떠나는 청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누구든 모두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세계에 태어날 것이라고 직 접 말씀해두신 것이 『전법륜경』에 전해지고 있다. 

보드가야가 전 세계 불교도들의 최고의 성지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등 불교 지도자들이 매년 1월이 되면 칼라차크라 법회를 보드가야에 서 봉행해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장사진을 이루기도 한다. 보리수 아래에 금강보 좌를 둘러싼 석재 울타리 주변에 수많은 순례객들이 좌선하고 있다. 그 주변의 넓 은 공간에는 단체로 참배하러 온 스리랑카 불자들의 하얀 옷이 햇빛을 반사하고, 티베트 불자들이 끊임없이 절을 하고 있다. 

7세기 이후 구법승들의 주요 참배지로 급부상한 보드가야에는 전정각산 유영굴, 수자타 공양터, 가섭 제도처, 상두산 등의 주변 유적이 있지만 가장 핵심은 마하보 디 대탑이다. 마하보디 대탑은 높이 55m가 넘는 중앙 탑 둘레에 작은 4기의 탑을 둔 5탑 양식의 고탑형 스투파이다.  고탑형 스투파는 굽타 시대에 유행한 양식이다. 아소카왕이 단순한 울타리로 이루어진 보리당의 형태로 건축물을 세운 뒤에 쿠샨 혹은 굽타 시대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추정하는데, 늦어도 현장 스님이 방문 한 7세기 초엽 이전에 성립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슬람 침입 이후 15세기까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현재의 사원은 19세기 후반에 미얀마 파간의 마하보디 대탑을 모방한 탑을 보고 다 시 복원된 것인데, 보수 기록을 남기지 않아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신라의 혜초 스님이 보드가야에 도착해 마하보디 대탑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기쁨을 오언시로 표현해두었다. 그 시에는 “보리대탑이 멀 어 길이 가파르고 험한 것에 대한 근심 걱정을 업풍에 날려버리리라”고 한 혜초 스 님의 기개가 시공을 넘어 그대로 전해져온다.

보드가야에는 대탑 외에도 보리수, 금강보좌, 선정칠처(禪定七處-금강보좌, 경행처, 응시처, 황금 저택, 반얀 나무, 무찰린다 호수, 라자야타나 나무), 호수 입구의 아소카왕 석주 등이 유구한 역사를 드러내고 있다. 

대탑의 동굴처럼 좁은 통로 안의 감실에 모신 불상은 10세기 후반에 제작되었고 높 이 2m인  항마촉지인상인데, 19세기 복원 때 인근 힌두교 사원인 마한트 사원에서 옮 겨온 것이다. 항마촉지인 불상의 양식은 사르나트에서 시작되었지만, 보드가야에서 본 격적으로 유행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석굴암 불상의 양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왜 보드가야는 오랜 역사를 통해 전 세계 불자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것 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 때문일 것이다. 깨달음이야말로 인생의 고뇌와 질곡을 해결 해줄 수 있는 해답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모든 이들이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던 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해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는 그리 용 이하지만은 않았다. 첫 탁발 음식을 먹었을 때의 고뇌는 참으로 인간적이다. 삭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싯다르타는 “거친 탁발 음식을 먹으려고 하자 장이 뒤틀리며 먹은 음식 을 토할 것 같았다. 그러나 훌륭한 음식을 버리고 사문이 입는 가사와 사문이 먹는 탁발 음식을 바라며 출가하지 않았는가!”라며 스스로를 훈계하고 담담히 공양했다고 한다.  

마하보디 대탑을 향해 절하는 티베트 불자들

마하보디 대탑의 항마촉지인 불좌상

잘 교육받은 왕세자, 생로병사를 고뇌하던 사색가. 무색계 선정을 성취한 선정 수 행자, 가장 강도 높은 고행자라는 이력을 거쳐 고타마 싯다르타는 큰 나무 아래에 앉아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러자 그 큰 핍팔라 나무는 깨달음의 나무라는 뜻의 보 리수로 이름을 바꾸었고, 깔고 앉았던 풀더미는 금강보좌로 변신했다. 

그렇다면 고타마 싯다르타는 무엇을 깨달으셨다는 말인가? 그 최초의 원형을 찾아보자.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최초로 읊은 게송이 전해지고 있다. 그 게송 에 깨달음의 핵심이 담겨 있다. 최초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한량없는 생의 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를 찾아 구하였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면서 

거듭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고통이었네

아, 집을 짓는 자여, 

내 이제 너를 보았으니 

너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너의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열반에 이르러

모든 갈애(tanha)는 파괴되어버렸네. 

마하보디 사원의 티베트 스님들의 법회

보리수와 금강보좌

이 감흥어는 집 짓는 자를 보지 못함→윤회→고통, 집 짓는 자를 봄→열반→갈애 의 파괴로 요약된다. 이 게송에서 보듯 부처님께서는 집 짓는 자를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봄으로써 고통스럽던 마음이 고요하게 되었으며 모든 갈애가 없어져버린 것 이다. 이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회상하시고 있다. 

이 불패(不敗)의 자리를 얻기 위해 4아승지 10만 겁 동안 나의 머리를 많이도 잘라 서 보시했고, 나의 두 눈과 심장을 많이도 보시했다. 쟈리 왕자와 같은 아들과 캉하 지나 공주와 같은 딸, 맛디 왕비와 같은 아내를 하인으로 달라는 사람들에게 보시 했다. 이 자리는 내가 다섯 가지 마라(탐, 진, 치, 교만, 사견)를 완전히 이겨낸 자리이다. 또한 매우 길하며 영광스러운 자리이다. 이 자리에 머무는 동안 성불하겠다는 서원 을 비롯한 모든 서원을 충족했다. 

부처님은 바라밀 중에서도 보시바라밀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의 정점 이 자식과 아내의 보시이다. 즉 자식과 아내에 대한 애착을 보시한 것이다. 이를 통 해서 불패의 자리, 즉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게송은 또한 최초의 게송에서 갈애의 파괴라고 언급한 것을 다섯 가지 마라를 극복한 것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숙고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불의 내용인 것이다.  

다섯 마라(=5개蓋)의 극복에 대한 언급이 깨달은 후의 7주간의 선정락 중 5주째에 다시 등장한다. 다섯 마라 중 탐·진·치는 마왕의 세 딸인 갈애, 혐오, 애착의 모양 으로 다시 등장했다가 부처님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고 사라진다.

교만은 바라문에 대한 언급에서 등장한다. 바라문은 번뇌로부터 자유로워 열반 을 증득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이라고 새롭게 정의하셨다. 삶을 살아가는 과정 과 정진하는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교만하지 않은 것이 얼마 나 중요한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견은 부처님께서 법에 의지하면서 지내리라고 결심하는 데에서 등장한다. 사 견의 극복이 곧 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보드가야는 인도 대륙의 북쪽 히말라야 산록에 있는 작은 나라의 한 왕세자가 세속의 왕위를 버리고 법왕의 자리에 오른 곳이며, 그 불패의 깨달음은 시공을 초월한 승전보를 울리게 되었던 것이다.


글과 사진|각전 스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39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해양수산부에 근무하다가 궁극적 진리에 대한 갈망 으로 출가했다. 현재 전국 선원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저서에 『인도 네팔 순례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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