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보리암 | 한국의 기도처, 관음성지 순례

차별 없는 평등으로 
모든 신앙을 끌어안는 성지

남해 보리암



비록 이름에 섬 도(島) 자는 없지만, 남해는 국내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남해에는 핫 플레이스 독일 마을 등 많은 보물이 있다. 이 가운데 으뜸은 남해 금산이다. 

금산은 마치 금강산을 축소한 듯 아름답다고 해서 ‘소금강’, ‘작은 봉래산’이라고도 했다. 원효 스님도 이 산이 마치 방광하듯 빛을 발하는 모습에 이끌려 오셨다. 초옥을 짓고 수행하던 스님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보광사를 세웠다. 산 이름도 보광산이라 지었다. 지금도 이 산에는 원효 스님께서 『화엄경』을 읽었다는 화엄봉이 있고, 의상과 원효, 윤필, 세 분 도반이 좌선했다는 삼사기단(三師基壇)도 있다. 

보리암을 인도 아유타국의 왕자인 장유보옥 선사가 세웠다는 전설도 전한다. 장유 선사는 자신의 동생 허황옥과 가야국 김수로왕 슬하의 왕자 열 명 가운데 일곱 왕자를 출가시켜 칠불암에서 모두 성불케 한 주인공이다. 가야에 도착해 일곱 왕자를 출가시키기 전까지 선사가 가장 먼저 수행한 곳이 남해 보광산이라는 것이다. 보리암에 터를 잡은 스님은 당시 인도에서 싣고 온 돌로 석탑을 세우고 모시고 온 관세음보살상을 본존불로 삼았다고 한다.  

지금도 보리암에는 이 두 개의 보물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은 금산의 화강암 재질로 밝혀졌고, 양식도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인도 파사석으로 조성된 석탑이 풍화되어 어느 때엔가 화강암으로 교체했을 가능성도 있다. 보광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은 높이 46cm의 자그마한 크기지만 왼쪽에 선재동자, 오른쪽에 용왕이 협시보살로 자리한 것이 독특하다. 이 또한 17세기 조선의 양식으로 보고 있다.

이후 1,000년 세월이 흘러 원효 스님처럼 빛에 이끌려 찾아온 이가 있었다. 고려의 이성계였다. 그는 왕좌를 위해 전국의 명산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 남쪽을 바라보다가 서광이 비치는 곳을 발견한다. 남해 보광산이었다. 100일 동안 치성을 올렸다. 산신께 왕이 되면 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드리겠다는 약속도 했다. 막상 왕위에 오르자 보광산 전체를 비단으로 싸야 할 고민에 봉착했다. 그때 한 신하가 ‘비단 금(錦) 자를 써서 이름 짓자’는 탁월한 묘안을 냈다. 언젠가는 없어질 비단보다 세세생생 빛바래지 않을 비단 이름으로 산을 장엄했으니, 이때부터 금산이 되었다.


관음성지 보리암을 상징하는 해수관세음보살상

남해 금산의 품에 안긴 보리암 전경. 금산은 바위마다 각각의 이름을 붙인 38경을 자랑한다.

보리암 보광전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
사진 | 문화제청

보리암 도량에서 ‘선은전(璿恩殿)’ 표지판을 따라 200m가량 산길을 오르내리면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성취한 자리가 나온다. 1903년 대한제국 각료 윤정구가 비각을 새로 짓고 2기의 비를 세웠다. 왼쪽의, 금산이 신령스럽게 응답한 사실을 기록했다는 「남해금산영응기적비」보다 오른쪽, 대한제국의 중흥과 고종의 장수를 기원한 「대한중흥공덕축성비」에 더 눈길이 간다. 무장 이성계를 조선의 왕으로 만들어준 영험한 기도처가 아닌가. 일제 침탈이 시작되던 무렵, 풍전등화에 처한 조국의 중흥을 발원했을 그 간절한 마음이 읽힌다. 

보리암은 구한말과 광복 이후 중건을 거쳐 오늘날의 면모를 갖췄다. 보광전 편액은 경봉 스님이 썼다. 범종에도 경봉 스님의 시가 새겨져 있다. 1970년, 해수관세음보살상을 모실 때 눈부신 서광을 내뿜는 이적이 있었다. 보리암은 해수관세음보살상을 모신 이래 가피력이 큰 관음성지로 각광받기에 이른다. 

황현은 보리암에 머물던 추억을 ‘반짝이는 노인성의 찬란한 별빛/ 새벽녘 창문으로 비치는데/ 몹시 아름다워 소리치며/ 서둘러 일어나라 공을 깨웠지’라고 읊었다. 여기서 반짝이는 노인성은 도교에서 신성시하던 별이다. 예로부터 동지 무렵부터 1월 사이에 노인성을 바라보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다. 노인성은 제주도와 남쪽 지역의 산간 지대에서만 볼 수 있었다. 특히 한라산의 존자암과 금산의 보리암은 노인성 관측 명소였다. 지금은 보리암 종무소에 걸린 간성각(看星閣) 현판만이 노인성을 바라보던 자리였음을 알려준다.  

금산은 바위마다 이름 붙여 38경을 자랑한다. 동서남북 신선들이 모여 놀았다는 사선대, 앉았다는 좌선대(坐仙臺)에, 노닐었다는 구정봉, 제석봉도 있다.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온 서불이 다녀갔다는 전설과 함께 석각 서화도 남아 전한다. 나막신 바위를 비롯해 치성 드리던 바위들도 허다하다. 금산 정상 근처 오래된 산신 제사 터에는 단군성전이 세워졌다. 관음성지 금산 보리암은 민족의 뿌리인 단군부터 신선을 비롯한 도교사상에, 산신이며 용왕 등 전통의 신앙까지 그 모든 믿음들을 두루 품어 안고 있다. 이것이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이다.

누구나 걱정 근심 하나씩은 짊어지고 산다. 언제라도 관음성지 남해 금산 보리암에 들러 다 떨구고 오면 좋겠다. 주차장에서 800m 걸어 오르는 길에 마주친 소금강의 진수에 반하고, 보리암 곳곳 기암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남해의 절경에 취하다 보면 한보따리의 걱정쯤은 눈 녹듯 사라질 터이다. 더구나 보광전 관세음보살 앞에 기도 올리고, 바람에 옷깃 날리며 그윽한 미소를 짓는 해수관음상 앞에서 절하고, 금산의 모든 기가 하나로 모여 있다는 3층 석탑을 돌고 돌며 관세음보살을 염할 수 있는데, 한 짐의 걱정거리가 무슨 대수이랴. 

글|이윤수 

방송작가. 문화 콘텐츠 전공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연등회의 역사와 문화콘텐츠』가 있다.

사진|신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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