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명상
한자경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간화선(看話禪)’이란 단어는 볼 간(看), 말 화(話), 좌선 선(禪)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간화(看話)는 아무 말이나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말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특정한 경지에 이르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① 특정한 말이 무엇이고, ② 그 말을 보는 특정한 방식이 무엇이며, ③ 그렇게 해서 이루고자 하는 경지가 무엇인지를 밝혀본다.
화두(話頭)에 걸림
간화선에서의 특정한 말을 화두(話頭)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두(頭)는 중국어에서 한 글자의 단어를 발음하기 편한 두 글자로 만들기 위해 흔히 덧붙이는 접미사로 예를 들어 돌을 석(石)에 두(頭)를 붙여 석두(石頭)라고 하고, 나무를 목(木)에 두를 붙여 목두(木頭)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화두’라는 단어는 그냥 말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중국 선종의 역사에서 화두는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화두는 좌선을 하던 선사들이 절차탁마하는 과정에서 스승과 주고받은 대화 중 일부를 정형화해놓은 구절이다.
예를 들어 ‘모든 중생에 불성이 있다’는 가르침 이후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듣고 선사가 던진 답변인 ‘무(無)’, ‘부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으로 주어진 ‘뜰 앞의 잣나무’나 ‘마른 똥 막대기’, 또는 ‘부모가 나를 낳기 전 나는 무엇이었나?’, ‘시체(몸)를 끌고 다니는 이것은 무엇인가?’처럼 일상의 사유로는 그 답을 찾아내기 어려운 질문들,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에 대해 던질 수 있는 물음인 ‘이 뭣고’, 이런 것들이 바로 화두(話頭)이다.
화두는 깨달음을 구하는 제자에게 스승이 던져주는데, 깨달음의 여건이 갖추어진 제자라면 그 화두를 듣는 순간 일상의 논리나 사유 규칙이 깨지고 개념적 사려분별 작용도 멎어버리면서 불현듯 밀려오는 의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화두는 수행자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키고자 마련된 장치이다. 수행자가 화두로 촉발되어 일어난 의심에 빠져드는 것을 ‘화두에 걸린다’고 한다. 간화선은 그렇게 화두로 인해 일어난 의심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며, 이를 ‘화두를 든다’, ‘화두를 참구한다’고 말한다.
화두 들기: 의심(疑心)에서 의정(疑情)으로 그리고 의단(疑團)으로
간화선은 화두에 걸리면, 그 화두에 대해 논리적으로 사유하거나 개념적으로 분별해 그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불성과 관련해 주어진 화두 ‘무!’에 대해 머리를 굴려 ‘어떤 부류의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고, 다른 어떤 부류의 중생에게는 불성이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다든가, ‘불성의 의미가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사유로써 의문의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반복적 또는 습관적으로 물음만 되뇌고 있는 것도 화두를 드는 바른 방식이 아니다. 일을 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듯이 머릿속에서 계속 ‘무’를 되뇐다거나 ‘이 뭣고’를 되뇌는 것은 화두를 드는 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때 화두는 살아 있는 생생한 활구(活句)가 아니라 생명력 없는 사구(死句)가 된다.
화두를 드는 바른 방식은 화두로 인해 일어난 의심의 마음 상태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의심의 마음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이 기존의 사유 논리와 개념 틀의 영역 바깥으로, 일상의 사유 세계 바깥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으로 빠져나간 마음은 이제까지 내가 알던 모든 것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황망함, 생각이 멎어버리는 갑갑함,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는 공허함을 느끼며, ‘오직 모를 뿐!’만으로 각성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그런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하고 곧 익숙한 사유 세계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것이 습(習)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의심이 일어나면 자기도 모르게 이런저런 생각들이 밀려오면서,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진다. 간화선에서 사유하지 말라는 것은 그렇게 밀려오는 생각들을 따라가지 말고 의도적으로 사유 세계 바깥으로 빠져나가라는 것이다. 정박한 배가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지면에 닻을 내리듯이, 생각의 파도를 타고 출렁이지 않기 위해 생각 바깥의 고정점, 의심에 몰두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 너머 의심에 몰두하다 보면 의심이 그대로 나의 감정이 되는데, 그것을 ‘의정(疑情)’이라고 한다. 그 의심에의 몰두를 계속 밀고 나가면 어느 순간 나는 없고 오로지 의심만 남게 되는데, 그렇게 변화된 상태를 의심 덩어리, ‘의단(疑團)’이라고 한다. 이처럼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생각 너머 의심에만 몰두함으로써 의심을 의정으로, 의정을 다시 의단으로 바꾸어가는 것이 화두를 드는 바른 방법이다. 이 노력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화두 타파: 일심의 자각, 본래면목의 깨달음
성성하게 깨어 있되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생각 너머의 의심에 머무른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분별적 사유의 차원과는 구분되는 또 다른 차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우리의 마음이 분별적 사유 의식, 6진(塵)을 반연하는 대상 의식, 제6의식이 전부가 아니고, 그 이상이라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자타분별을 따라 경계 지어진 내 몸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그러한 제한성 너머에서 전체(기세간)를 비추고 나(유근신)를 밝히는 빛이다. 마음은 일체 경계가 사라진 무경계의 마음, 우주 전체에 두루 하는 ‘신묘하고 맑고 밝은 마음’, 묘정명심(妙淨明心)이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그러한 묘정명심으로 자각하는 본각(本覺), 자신을 텅 빈 마음으로 신령하게 아는 공적영지(空寂靈知)를 갖고 있다. 대승은 이러한 마음을 ‘여래장(如來藏)’, ‘일심(一心)’, ‘본심(本心)’이라고 부르고, 선종은 이 마음을 인간 내면에 자리한 본래 부처의 마음, 인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 간주한다. 선 수행은 바로 이 본래 마음자리에서 눈떠서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닫고자 하는 수행이다. 그 본래면목의 본래 마음자리로 나아가는 제1 방편이 바로 사유 바깥의 의심을 붙잡는 것이다.
의심은 알 듯 말 듯한 마음 상태이다. 제6의식의 분별적 사유로는 답을 알지 못해 갑갑하지만, 그 갑갑함을 일으키는 것은 정작 답을 아는 듯한 느낌이며, 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분별적 의식 너머의 본심 내지 일심이다. 의심에 몰두한다는 것은 그 갑갑함의 벽을 뚫고 제6의식 바깥의 본심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의 틀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면 할수록 제6의식의 논리적 사유 틀, 분별적 개념 체계는 더욱 견고하게 다가오며 더 강한 압력으로 나를 옥죄어온다. 이것을 나를 가두고 압박해 오도 가도 못 하게 만드는 벽, 은산철벽(銀山鐵壁)이라고 한다. 뱉지도 삼키지도 못할 밤송이가 목에 걸린 모양새가 되면, 고지가 눈앞이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가 도로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듯, 쥐를 낚아채고자 쥐구멍을 노려보는 고양이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듯, 이 상태에서도 죽을힘을 다해 의심을 끝까지 밀어붙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를 옥죄던 은산철벽이 마침내 무너져 내리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은산철벽에 갇혀 천근같이 무겁던 몸이 한순간 날아오르는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고, 마음은 온 천하 중생을 모두 끌어안을 것만 같은 자비심과 환희심으로 넘쳐나게 된다. 이것을 화두 타파(打破)라고 한다. 화두가 타파된다는 것은 곧 제6의식의 개념적 분별적 사고의 벽을 뚫고 나와 언어의 길이 끊어진 자리, 본래 마음자리에 이르는 것이며, 그 자리에서 자신의 본래 성품, 본성을 직관하는 것이다. 이를 견성(見性) 내지 갑작스러운 깨달음, 돈오(頓悟)라고 한다.
한마디로 간화선은 화두로 인해 촉발된 의심 하나를 붙잡고 일체의 개념적 사유를 떨쳐냄으로써 표층의 제6의식보다 더 넓고 깊은 본심에 이르러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심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이 본심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에 간화선을 ‘경절문(徑截門)’이라고도 한다. 이상과 같은 간화선의 단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화두로 인한 의심(疑心) → 의정(疑情) → 의단(疑團) → 은산철벽 → 화두 타파
= 견성(見性), 돈오(頓悟)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 『심층마음의 연구』,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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