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밤하늘 별과 법정 스님, 그리고 나 | 나의 불교 이야기

나의 불교 이야기 ①


송광사 밤하늘 별과 

법정 스님, 그리고 나


김동률 

서강대학교 기술경영대학원 교수


법정 스님이 입적하기 전 계셨던 송광사 불일암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크 루카치 『소설의 이론』 첫 구절이다.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 철학자로서 리얼리즘 문학과 문예비평 등 광범위한 지적 영역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상가다. 인용한 구절은 루카치를 얘기할 때 늘 따라 나오는, 이른바 ‘인구에 회자되는’ 문장의 셀럽쯤 된다. 석학 루카치의 말인 만큼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 글이 주는 가장 원시적인 의미를 깨달은 곳은 절집이었다. 

이십대 한 시절, 나는 순천 송광사에서 반년간 지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런저런 이유로 잠적해 있었다. 험악했던 1980년대, 그 시대 젊음들이 흔히 겪던 일이다. 송광사에서 보낸 반년 동안 나는 겉모습만은 완전히 행자승이었다. 자줏빛 장삼을 걸치고 막 출가한 스님들의 고된 일상을 그대로 따랐다. 이른 새벽 일어나 쌀을 씻고 밭에 가서 아침 반찬거리 재료로 푸성귀를 뽑아 씻었다. 커다란 가마솥에 쌀을 안치고 장작불을 때는 것이 주어진 일이었다. 물론 손맛이 있는 진짜 출가한 행자 스님은 찬을 만들고 국을 끓이고, 보다 전문적인 일을 맡았다. 공양 준비에 이어 바루 공양이 끝나면 절집 곳곳을 쓸고 닦았다. 절집의 하루는 노루꼬리 만큼 짧았다. 몸은 훈련병만큼이나 고단했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평안했던 ‘송광사 시절’이었다. 절이라고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가본 게 전부인 나로서는 평생 잊지 못한 승가의 경험을 그해 반년 하게 된 것이다. 겨울 한철, 음력 보름날이면 산기슭 허름한 목욕탕은 붐볐다. 목욕 날, 인근 사찰 스님들까지 삼삼오오 나들이 겸 목욕하러 큰절 송광사로 왔다. 정작 실내 풍경은 조금 기괴했다. 모두가 빡빡 민 머리, 마치 물 위에 둥근 공들이 둥둥 떠 있는 모습이었다. 많이도 낯설었던 그날 풍경이 지금도 선명하다. 

읍내 나들이는 설레었다. 언젠가 돌아오는 밤길이었다. 당시는 울퉁불퉁했던 비포장도로, 조금만 방심하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그믐께쯤 되었을까. 사방은 칠흑 같았다. 길을 찾기가 무척 어려웠다. 이럴 땐 별이 등대가 된다. 그날 밤 내게 길을 알려준 것은 별이었다. 앞서 언급한 위대한 사상사 루카치의 아포리즘을 가장 원시적으로 이해한 계기가 된다. 

그런 밤, 가만히 노래를 불렀다. “저 별은 나의 별/저 별은 너의 별/별빛에 물들은/밤같이 까만 눈동자/(중략) 이 밤이 지면/꿈도 지고/슬픔만 남아요/창가에 피는/별들의 미소/잊을 수가 없어요…” 혼자 흥얼거린다. 송창식과 윤형주가 불렀던 독일 노래 ‘두 개의 작은 별(Zwei kleine Sterne)’ 번안곡이다. 

한겨울 절집, 밤은 길고 몹시 외롭다. 이십대 청년에게 산사의 밤은 더욱 그랬다. 가만히 뜰에 나가본다. 서울과 달리 송광사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이 많았다. 차가운 겨울밤, 별은 고독하다. 나는 별을 무척 좋아한다. 서울로 유학 온 이십대 시절, 오랫동안 별을 잊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송광사 절집 생활 덕분에 다시 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절 뒤 조계산 울창한 숲 사이로 듬성듬성 별이 스친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이 생각난다. 아, ‘하바별시’도 있다. 대입 시험에 시 제목을 뒤죽박죽 섞어놓고 맞는 제목을 답하라는 고약한 문제가 곧잘 출제되었다. 덕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하바별시’로 달달 외웠다.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인간의 양심과 밤하늘의 별”이라며 칸트가 그토록 찬양했다는 별이다. 

송광사 반년의 하이라이트는 법정 스님과의 만남이다. 송광사 뒷산으로 반 시간쯤 올라가면 불일암이 있다. 스님이 계시는 곳이다.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 계시던 스님이 일간지 칼럼으로, 수필집 『무소유』로 유명세를 타자 불일암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했다. 훗날 알았다. 어느 늦가을, 지게에 책을 가득 실은 처사 한 분과 걸어가는 스님을 우연히 산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길로 쭐레쭐레 따라간 게 인연이 되어 그해 한철 심심하면 불일암으로 놀러 갔다. 좀처럼 곁을 허용하지 않는 스님이지만 나와는 꽤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그런 인연으로 불일암은 어느새 내 마음의 절집으로 자리 잡았고, 언젠가 반드시 찾아야 할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지난 겨울방학, 친구들과 2박 3일 절집을 다녀왔다. 장성 백양사, 송광사, 불일암 일정이다. 백양사 주지 스님은 나와 군 생활을 같이한 전우다. 보병이었던 나는 부대내 법우회 회장으로, 스님은 군종병 신분으로 만난 것이다. 언젠가 서울 조계사 앞으로 지나가다 우연히 만나 다시 교류하게 되었다. 불은(佛恩)이다. 백양사 방문은 스님의 초대로 이뤄졌다. 육군 김 병장과 군종병이었던 주지 스님의 회고담으로 그날 밤이 짧았다. 

이튿날 불일암을 찾았다. 불일암 일정은 내가 고집해 집어넣었다. 수십 년 만에 찾은 암자는 옛 모습 그대로다. 상좌 스님과 차를 마시며 오랜 시간 옛 얘기를 주고받았다. ‘감개무량’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가 보다. 법정 스님은 뜰 앞 후박나무 아래 한 줌의 재로 계신다. 손수 만들었던 나무 의자도 여전히 건재하다. 내가 좋아했던 파초는 아래 단으로 자릴 옮겼지만 역시 그대로였다. 스님은 가고 없지만 절은 의구했다. 

 나의 기상 시간은 새벽 5시다. 갓 내린 에스프레소에 얼음을 가득 채운다. 얼음같이 차가워진 커피는 식도를 타고 내린다. 나는 이 감각을 무척 좋아한다. 이른 새벽, 가만히 서재에 앉아 있으면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새벽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불교방송』이 예불을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 시간만큼은 무념무상의 경지에 빠지게 된다. 유년 시절부터 질풍노도기 대학 시절, 곤고했던 유학 시절 등등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어떤 날은 눈물이 핑 돈다. 주로 서재에서 조용히 듣지만 새벽 골프가 있는 날에는 차 안에서 조금 크게 틀어놓고 듣는다. 아, 스님들의 독경 소리는 너무 처량하고 슬프다. 평생을 절집 근처를 맴돌았지만 고백하건대 난 “찐” 불교 신자가 아니다. 그런 내가 어느새 가장 좋아하는 곳이 절집이고 독경 소리를 바흐의 파르티타보다 위대하게 여기게 되었다. 대학 시절, 대불련 활동을 하면서 우르르 몰려가 계를 받은 엉터리 청년이 어느새 “찐하디 찐한” 불교쟁이가 되었다. 시절 인연이다.  



김동률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사우스캘리포니아대학교(Univ. of South Carolina)에서 매체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YTN』, 『KTV』 등에서 시사 프로그램 앵커로 활약했으며 현재는 서강대 기술경영대학원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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