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과 분노의 뿌리
자기기만
정계섭
전 덕성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인간은 천부적으로 생각하는 능력과 저마다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번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면 그밖의 다른 어떤 생각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습성은 어른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우리 시대 선지식 종범 스님이 법문 중 소개한 일화가 있다.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스님에게 왜 머리카락이 없냐고 추궁하듯이 따져 물어 곤혹스러우셨다는 얘기다. 이렇듯 어린아이도 자라면서 자신의 생각을 갖게 되며 그래서 부모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해서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이 아이는 사람은 모름지기 머리털이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에 속은 것이다. 어린아이의 이런 악의 없는 자기기만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어른들 세계에서 벌어지는 자기기만은 매우 중차대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이른바 자기기만(自己欺瞞, self-deception)이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어서 무명(無明) 내지 어리석음(痴)에 다름 아니다. 누가 무슨 충고를 하든 듣지 않고 구태의연한 삶을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기만에 빠져 지나친 자기 확신을 하기 때문이다. 나이 들면서 고집불통이 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보통 탐진치(貪瞋痴) 3독(三毒)이 같이 간다고 하지만 우리로서는 어리석음(痴)이 제악(諸惡)의 주범이다. 탐욕의 근원을 추적하다 보면 자기기만을 만나게 된다.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우리를 즐겁게 한다.” -『숫타니파타』
사람들이 쉽게 유혹에 빠지는 것은 유혹의 대상이 곱고 감미롭기 때문이다. 우리를 즐겁게 하기 때문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이 순간의 즐거움이 일생의 괴로움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그러니 자기 성찰이 부족한 젊은 시절에는 무엇보다 욕망을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기기만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는데 지면 관계상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자기고양적 편향(self-enhancement bias)’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이는 공격 상황에서 동물에게서도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수탉처럼 몸집을 부풀리고, 개처럼 털을 곤두세우고, 카멜레온이나 문어처럼 요란한 색깔로 위장하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자기 부풀리기는 거짓 개인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진다. 명절에 친지들이 모였을 때 왕년의 무용담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일행 중에는 자신을 과장해서 높이고 남을 폄하함으로써 편향된 역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자기기만의 문제는 스스로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만약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은 도덕적 불성실, 즉 거짓에 해당하고 여기에서는 논외로 한다.
자기기만은 개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그것은 군중심리로 나타나는데 군중은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 군중이 이성을 잃고 난폭해지는 것은 나치 선전상 괴벨스 같은 조종자의 술책에 여지없이 넘어가기 때문이다. 『군중심리』의 저자 귀스타브 르봉(Gustave Le Bon, 1841~1931)의 말을 들어보자.
“군중이란 개인의 의식과 인격을 완전히 상실하고 조종자에게 통제되는 인간들의 집합체다.”
집단이기주의가 날로 판을 치는 우리 사회에 큰 경종을 울리는 말이 아닌가.
국가 차원에서도 자기기만을 볼 수 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원폭 공격을 자초했는데 오히려 그것을 빌미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이란 혐의를 피하려는 자기기만의 극치다.
그 누구도 자기기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워런 버핏의 위대한 동업자라 불리는 찰스 멍거(Charles Munger, 1924~ )의 명언을 소개한다.
“자기기만보다 쉬운 것은 없다. 사람들은 각자의 바람을 위해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나부터 이 말을 집 안의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놓을 작정이다.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말대로 가장 속이기 쉬운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정계섭 프랑스 파리 쥐시외(Paris -7) 대학에서 일반언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덕성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말로 배운 지식은 왜 산지식이 못 되는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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