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를 일깨워주는 나무 | 숲이 사람을 살린다

삶의 지혜를 일깨워주는 나무


신준환 

동양대학교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





나무는 우리에게 물음을 준다. 지평선에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보면 하늘과 땅 사이에 물음표가 하나 서 있는 것 같다. 나무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묻고 있는 자세다. 제주도의 오래된 마을에서는 팽나무를 숭상한다. 저 옛날 제주도는 현무암 지대라 어디에서 물이 날지 몰랐다. 어디에 마을을 세워야 사람들이 물을 길어오는 고생을 하지 않을까? 바다가 온 누리를 감싸고 있으나 이런 짠물이 아니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민물이 필요했다. 이런 의문의 답은 팽나무가 자라는 곳이다. 그곳에 생명을 기를 수 있는 민물이 난다. 아마 중부지방에서는 버드나무가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렇듯 나무는 물을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나무는 또 천기를 읽어내는 지표였다. 슬기로운 사람들은 그 땅에서 나무가 자라는 모양을 보고 사람들이 살아갈 방식을 설정했다. 추운지 따뜻한지 바람이 얼마나 센지 모두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천지간의 문제를 나무에 물었다.


나무 역시 끊임없는 물음으로 자란다. 우선 나무는 물을 끊임없이 길어 올려야 살아갈 수 있다. 나무는 우주의 태양에너지를 받아서 지구의 물순환을 타고 이산화탄소를 탄수화물로 합성한다. 이것이 지구에 살아가는 생명체의 에너지원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나무가 매우 높이 자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소나무는 30m 넘게 자랄 수 있고 미국의 워싱턴주나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는 100m 넘게 자라는 나무도 많다. 나무는 이 높은 곳까지 물을 어떻게 길어 올리는 것일까? 첫째 문제는 물이 갈 길을 내는 것이다. 처음 땅에 오른 이끼 같은 식물은 물길을 따로 마련하지 못해 겨우 땅거죽에 붙어 살았다. 그 후 관다발식물이 진화해 물관을 마련했다. 관다발식물에 속하는 나무의 줄기는 대부분 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나무의 줄기라 부르는 것은 안쪽으로 물관을 만들고 바깥쪽으로 체관을 만드는 형성층이 자란 것인데 한 해 동안 물관이 자란 것이 나이테로 보이는 것이다. 체관이 자란 것은 나무껍질(수피)이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이 물관은 나무의 세포이기는 한데 속이 완전히 빈 작은 관이라는 것이다. 속이 비어서 쉽게 물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효율적으로 일을 하니 얼마나 훌륭한 삶인가? 그렇지만 물관을 수목생리학에서는 죽은 세포라고 한다. 세포 내용물이 하나도 없이 비었으니 하나의 세포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또한 물 분자는 극성을 띠고 있어 서로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다. 이것을 응집력(표면장력)이라고 하는데 연잎 위에 떨어진 물이 아름다운 물방울을 이루는 성질이다. 그래서 물은 나무 안에서 끊어지지 않고 손에 손잡고 저 높은 나무 높이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과정에 나무는 에너지를 하나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을 높이까지 올리는 힘은 태양이 제공한다. 태양에너지가 나뭇잎에서 물을 증발시키면 잎에 물이 부족해 가지의 물을 당겨오고 가지는 줄기의 물을, 줄기는 뿌리의 물을, 그리고 뿌리는 토양의 물을 당겨온다. 물 분자의 응집력은 이 사이에 끊어지지 않는 힘을 제공한다. 이렇게 물이 토양, 나무, 대기로 끊어지지 않고 옮겨가기 때문에 토양-나무-대기 연속체라고 한다. 이 과정에 나무는 에너지 하나 들이지 않는다. 참으로 재미난 현상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되면 자연스럽다고 하고 자기 욕심에 차지 않으면 부자연스럽다고 한다. 필자는 나무를 보며 불심을 떠올린다. 집착하지 않고 자신을 비우니 진리가 통하는 길이 된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었다고 어디로 갔는가?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닌가?


육체를 비워서 탐진치(貪瞋癡)를 버리고 팔정도(八正道)를 행하는 길을 환히 비춰주는 존재, 육체가 없기에 사람들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더 확실히 살아 있는 존재, 육체가 없기에 과거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을 통해서 늘 거듭날 수 있는 새로운 존재가 되지 않았는가? 해마다 새싹을 틔우며 새로운 세계를 펼쳐내는 나무를 보며 물어본다. 해탈과 열반의 모습은 어떠한지?


살아 있는 나무는 많은 것을 베풀어준다. 그런데 나무는 죽어가면서 다양한 생명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완전히 죽은 후에는 새로운 세계가 된다. 죽은 나무에는 비관다발식물인 이끼부터 관다발식물인 풀, 그리고 심지어 나무까지 자라고, 미생물은 물론 다양한 무척추동물과 척추동물이 무수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나무의 삶은 자기의 죽음으로 생명의 역사를 다시 집약해 새로운 세계로 펼쳐내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삶은 죽음과 대응하는 개념이 아니라 탄생과 죽음의 관계식(함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죽을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인류 역사는 물론 성인의 삶까지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날마다 죽자. 진정한 삶은 사라지지 않는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윤회의 고리를 끊는 것은 어디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자기를 죽이고 다시 거듭나는 삶이 아닌가?



신준환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수목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동양대학교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다시, 나무를 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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