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자유와 경제 활동의 자유 | 불교와 자본주의

불교와 자본주의 2


마음의 자유와 

경제 활동의 자유


윤봉준

미국 뉴욕주립대학교(빙햄턴) 경제학과 교수



불교는 욕망에의 집착을 버릴 것을 가르친다. 불교의 무욕(無慾)은 개인의 자리심(自利心)에 기초한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와는 정반대로 보인다. 불교와 자본주의 간에 공통분모는 없는가?


불교와 근대 자본주의 간의 접점을 찾아보면 첫째로 자유가 있다. 불교는 미망(未亡)과 집착(執着)으로부터의 자유를 근간으로 한다. 『반야심경』에 의하면 물체, 느낌, 마음, 감각, 의지, 의식(色受想行識)이 모두 실체가 없는 헛된 것(五蘊 皆空)임을 깨달으면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된다.


근대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경제인을 기반으로 한다. 개인이 남의 구속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고 생산, 소비, 물건의 교환을 자기 뜻에 따라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제도다. 이 경제 행위의 자유는 타인, 특히 공권력의 통제로부터의 자유를 전제한다.


불교에서의 자유

불교가 말하는 자유는 적용되는 대상이 자본주의와 같지 않다. 미망과 집착의 대상이 개인에게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즉 자유의 적이 나의 내부에 있다. 나의 감각기관(眼耳鼻舌身意)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아름답고 감미롭고 부드럽고 즐거운 것에 매혹되어 이것을 취하려는데 정신이 팔린 바로 나 자신이다. 저급하든 고차원이든 우리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욕망이 끊임이 없어 채워지지 않으므로 고통을 받는 것이 중생(衆生)이다. 108가지의 번뇌에서 해방되는 길은 색성향미촉법의 헛됨을 깨달아 자유를 찾는 것이다. 물론 자유인이 되어 늙음과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된다고 해서 늙음과 죽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깨달은 자든 중생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늙고 죽으며 세상은 그대로 계속되지만 여기에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 자유이다.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 無老死 亦無老死盡).


욕망의 만족이 덧없음을 깨닫게 해 번뇌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불교가 말하는 자유다. 나 스스로가 만든 족쇄를 풀고 자유인이 되기 위한 실천 원리로 불교는 8정도를 제시한다.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정(正定)이다. 요약하면 생각, 말, 행동, 생업 활동을 바르게 하라는 것이다.


누구나 8정도를 통해 바른 생활을 하고 타인에게 자비심을 베풀면 개인은 행복해지고 사회도 평화롭고 발전할 것이다. 마음의 자유가 개인과 사회의 풍요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와 자유

불교의 자유가 인간을 욕망의 족쇄에서 해방시켜 마음의 빈곤을 없앤다면 자본주의는 개인의 경제 활동의 자유를 통해 욕망을 만족시키고 물질적 빈곤을 해소한다. 개인의 욕망, 즉 이기심을 구속 없이 마음껏 발휘하게 해 개인과 사회의 물질적 번영을 가져온다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다.

250여 년 전에 애덤 스미스는 물질적 풍요로움은 분업에서 나온다는 것을 통찰했다.1 분업은 노동 생산성을 높인다. 노동자의 작업이 특화되면 그의 기술이 향상된다. 하나의 작업에 전념하면 다른 작업으로 이동할 때 일어나는 시간 소모가 없어지고 그 작업에 특화된 기계의 발명도 가능해진다. 이렇게 해서 개별 노동자의 생산성이 높아지면 사회는 물질적 풍요가 증진되어 경제가 발전한다.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는 분업을 고취하는 것은 무엇인가? 분업이 되면 개인이 혼자 자급자족할 수 없다. 쌀 농사만 짓는 사람은 옷을 만들지 않으므로 재봉사의 옷과 자기의 쌀을 교환해야 한다. 즉 물건과 물건의 교환이 있어야 분업이 가능해진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의 중요한 하나는 교환 본성이다.


그럼 왜 교환을 하는가? 나에게 필요해서다. 농부는 옷이 필요해서 나의 쌀을 재봉사의 옷과 교환한다. 교환은 이타심이 아니라 자리심(自利心 혹은 이기심)에 근거한다. 즉 이기심이 교환을 낳고 교환이 분업을 가능하게 하고 분업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다. 따라서 풍요의 근원은 개인의 자리심(이기심)이다.


자리심을 발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개인의 자유다. 자유가 없이 타인의 강요에 의해서는 자리심이 발현되지 않는다. 즉 자유가 있어야 모든 개인이 자기의 뜻에 따라 분업할 분야를 정해 생산하고 자기가 생산한 것과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을 교환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가 가져오는 풍요는 그 원천이 개인의 자유, 특히 경제 행위의 자유다.


자리심과 자비심

자본주의의 기본이 되는 인간 심성은 이기적인 자애심(自愛心)이다. 개인의 경제 활동의 목적은 자신의 이익(自利)을 위해서다. 이 이기적 개인들이 이루어내는 사회적 결과는 모든 사람들이 박애(博愛)를 목적으로 일하는 사회와 다르지 않다. 분업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내가 생산한 물건을 남에게 팔기 위해서는 살 사람의 사정을 배려해야 한다. 사는 사람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내 물건을 제값을 받고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2 저녁 식사로 내게 쇠고기, 맥주, 빵을 제공한 사람들은 그들의 이익이 목적이었지만 그 결과는 나를 위한 단란한 저녁 식사다. 즉 사익 추구가 낳는 결과는 박애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저질의 쇠고기를 속여서 팔면 요행으로 일시적 이득을 취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결국 소비자의 외면을 받으므로 사익 추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이기적이지만 그 때문에, 즉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남을 배려하는 박애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애(이기심)는 자비(혹은 박애)와는 상반된 개념으로 보이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 활동에서는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와 기독교

배금(拜金)사상이나 물질우선주의는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종교와는 대척점에 있다. 자본주의는 흔히 배금사상과 동일하게 취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막스 베버는 금욕주의적 개신교(ascetic Protestantism)의 정신에서 (특히 칼빈교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나왔다고 주장한다.3 사적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은 근대 자본주의가 발생하기 이전에도 존재했다. 전근대적(전통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활동의 목적은 재산을 모아서 그것으로 부유한 생활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경제 활동의 목적이 사적 소비에 있었다. 노동이나 기업 활동의 대가(代價)인 소득과 자산 축적은 소비라는 최종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전근대적 자본주의는 합리적인 사고라고 볼 수 있다. 부를 위한 부의 증식이 아니라 소비를 위한 부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근대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금욕적 개신교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열심히 근로하고 기업가가 이윤 창출에 매진하는 이유는 재산을 모아서 안락한 생활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상지인 북유럽과 북미의 근로자와 기업가에서 베버가 주목한 것은 그들 개신교도들의 생업 활동에서의 근면, 성실, 규율이었다. 그들의 근로와 기업 활동은 단순히 생활비를 벌거나 이윤을 남기자는 것이 아니다. 경제 활동을 모범적으로 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근대적 기업가의 하나인 록펠러를 예로 들면 스탠더드 석유 회사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 활동을 그만두지 않았다.


금욕주의적 개신교 정신에 따르면 근로자든 기업가든 자기의 생업을 신이 부여한 천직(calling)으로 받아들이고 생업 활동을 훌륭하게 함으로써 신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 근면, 절약의 정신으로 노동자는 근로를 성실히 해 가계를 풍성하게 하고, 기업가는 열심히 사업을 해 종업원에게 보람된 직장을 제공하고 좋은 제품으로 소비자의 복리를 증진하며 기업을 키우는 것이 신앙을 실천하는 길이다.


자본주의와 불교

『반야심경』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곧 욕망이나 세상이 헛되다는 공(空)의 지혜를 가르치고 있다. 이 공의 지혜를 터득하면 생업은 방기(放棄)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할 수 있지만 오히려 반대로 경제 활동을 더욱 충실히 할 것이라고 본다. 사심(邪心)이 없어 모든 행동이 적절하면, 마음에 걸림과 두려움이 없이 성실한 노동, 바람직한 기업 활동을 영위할 수 있다. 불교의 지혜와 자본주의가 상충된다고 볼 수 없다.


불교에도 개신교의 ‘천직’에 해당하는 교리가 있다. 8정도의 정업(正業)은 잘못된 행위를 금하고 선행(善行)을 쌓으라는 것이다. 정명(正命)은 몸, 입, 뜻을 올바른 생활을 위해 사용하라고 가르친다. 노동자와 기업가가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정업과 정명을 실천한다면 생산적 근로자, 바람직한 기업 운영이 가능해진다. 그 결과는 개신교의 자본주의 정신과 다를 바 없다. 불교가 주는 마음의 자유에 자본주의의 사적 경제 활동의 자유가 접목되면 정신적 평안과 물질적 풍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 최상의 조합이라고 생각된다.


1. Adam Smith (1776; 1981),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Vol. I and Vol. II, Indianapolis: Liberty Fund

2. Adam Smith, 앞의 책, Book I, Chapter 2, pp. 26~27

3. Max Weber (1930; 1998),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2nd ed., Los Angeles: Roxbury Publishing Company



윤봉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미경제학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뉴욕 빙햄턴주립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있다. 공저서로 『경제발전과 적정임금』, 『노조정치세력화의 폐해』 등이 있다.


#월간불교문화 #불교 #문화 #불교문화 #대한불교진흥원 #오늘 #감성 #공감 #공유 #스님 #부처님 #붓다 #부처 #사찰 #한국 #전통 #명상 #수행 #건강 #날씨 #경전 #불경 #문화재 #buddhism #buddhismandculture #북리뷰 #서평 #시 #소설 #수필 #부 #자본주의 #윤봉준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