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다양한 불교자본주의 | 불교와 자본주의

불교와 자본주의 1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불교자본주의


유승무

중앙승가대학교 포교사회학과 교수





들어가며

모든 생명체는 영양분을 섭취해야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밥이 생존의 필수인 이유다. 그러나 인간은 무기물, 식물, 다른 동물 등과는 달리, 영양분만 섭취하고 살지는 않는다. 사회를 구성하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사회를 구성하고 의미를 찾아내지 않으면 사는 것마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법(法; Dharma)’의 존재 이유리라. 때문에 밥과 법의 문제 혹은 그 둘 사이의 관계 설정 문제는 모든 인간과 그들의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실존의 실천적 과제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맥락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삶의 가치(혹은 의미) 사이의 관계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인은 물론 현대 사회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숙명이 이 글의 배후 가정(background assumption)이다. 이렇듯 불교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고자 하는 이 글의 주제는 매우 보편적 주제다. 때문에 이 글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방법론상의 한정이 불가피하다. 이 글의 관점은 명확히 사회학적 관점으로 한정되어 있다.


베버와 벨라를 넘어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즉 연구 대상의 보편성과 방법론상의 특수성을 모두 충족해야 하는 조건 속에서라면, 최소한 두 거봉, 즉 베버(M. Weber)와 벨라(R. Bellah)를 우회할 수는 없다. 주지하듯이 베버는 근대 사회를 추동한 자본주의 기원을 종교, 특히 개신교와 연관시키면서 설득력 있게 해명한 사회학자일 뿐만 아니라 불교가 (시민)사회를 ‘주술의 정원’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에 자본주의 발흥에 적지 않은 걸림돌로 작용했음을 시사한 학자다. 때문에 불교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베버의 테제에 대한 비판이 불가피하다.


필자가 보기에 이 과제, 즉 베버 비판의 과제를 비교적 충실하게 수행한 사회학자로는 벨라가 단연 으뜸이다. 벨라는 일본의 전자본주의(pre-industrial) 시기인 도쿠가와(德川) 시대의 가치를 제공한 불교, 유교, 신도야말로 정치체(the polity)를 합리화했고 그 정치체가 전체사회를 일본의 산업화에 유리하게 이끌었음을 실증했다.


그러나 벨라의 연구 성과는, 벨라 스스로도 고백하고 있듯이, 베버의 잣대인 합리성의 잣대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발전의 경로만 새롭게 검증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벨라의 비판적 연구조차도 베버의 주장을 완전히 극복하기보다는 베버의 테제를 보강하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이것이 필자가 이 비판을 반쪽짜리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필자가 보기에, 베버와 진검승부하기 위해서는, 베버 비판의 칼끝이 베버 테제의 잣대이자 서구 근대의 심장인 합리성으로 향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 정신, 의식, 그리고 이성 등과 같은 서구 철학적 전통을 행위론적으로 승계한 합리성은 플라톤 이래 지금까지도 서구 사회에서는 강력한 사상적 전통을 지닌 가치이고 그러한 점에서 서구 사회가 이미 비교 우위를 점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경우 동양 사회조차도 근대성(modernity)이란 무화과의 열매를 따 먹은 이상 합리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합리성 혹은 합리적 행위는 서구 사회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결여된 가치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우리에게는 결여된 그 무엇을, 이따금씩 열등감을 느껴가면서, 추적하는 작업을 해야 할 까닭이 있을까? 오히려 우리의 소중한 가치로 간직되어온 마음(마음 사상, 마음 문화)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논의하는 것이 더 유의미한 작업이 아닐까?


불교의 마음과 자본주의의 관계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ethos)을 이성에 부합하는 행위 양식, 즉 합리성(rationality)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 암시하듯이 서구 사회는 이성의 전통을 강하게 유지해온 반면에, 동양 사회의 경우 불교나 유교에서 유래한 ‘마음의 전통(심학;The theory of Maeum)’을 강하게 이어오고 있다. 실제로 불교는 불성 혹은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달아 삼독에 물든 마음을 정화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고 있으며, 『맹자』의 「진심장(盡心章)」 상(上)을 보면 유학 마음 이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맹자조차도 입명(立命)을 위해 자신의 진정한 마음, 즉 진심(盡心)을 다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교리적·사상적 근거 때문에 마음 사상(혹은 심학)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인의 행위 양식을 강하게 규정해오고 있다. 이 글에서 우리가 불교의 마음 개념(혹은 마음 사상 혹은 마음 문화)과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려는 까닭이다.


무엇보다도 불교의 마음 개념은, 몸(신체)과 배대(背對)되는 정신적 현상을 의미하는 서구의 마음 개념과는 달리,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예컨대 유식학을 보더라도 신체의 감각기관으로 지각하는 전오식(前五識), 외부의 자극을 지각하는 마음인 제6식, 그리고 말라식이나 아뢰야식 등을 모두 포괄해 마음으로 칭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마음 개념은 인간의 영역인 생물학적 욕망, 탐·진·치와 같은 삼독심, 이성, 감성, 의지, 상상력 등 개인적 심리 등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시대정신 등 집합의식(collective consciousness)을 공유하고 나아가 개인의 삶과 연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중중무진의 존재들과도 구조적으로 연동되어 있다.


이렇듯 포괄적인 불교의 마음 개념에 따르면, 각 개인은 저마다 다른 마음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마음가짐의 다양성) 그러한 마음과 외부 세계의 구조적 연동에 따라 마음 씀씀이를 다양하게 현상할 수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라 부를 정도로 강력한 역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 성호 이익은 이를 조명론(造命論)이라 불렀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 씀씀이에 대한 통제 여부는 자신의 카르마(業)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불교에서 마음 수행을 강조하는 까닭도, 그리고 불성 혹은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을 가장 결정적인 삶의 계기로 간주하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원효의 일심이문(一心二門) 개념이 마음 현상의 다양성을 암시하는 메타포라면 토감 체험은 마음 깨침 체험의 결정성을 실증한다.


이러한 불교의 마음 개념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물질적 가치와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The sociology of early Buddhism』의 저자들인 베일리(G. Bailey)와 마벳(Mabbett)은 초기 불교가 물질적 가치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고 부정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재가자들에게는 『사분율』에 잘 나타나 있듯이 저축(saving) 등 물질적 가치의 축적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가지도록 가르쳤고, 출가자들에게는 물질적 가치에 대한 집착을 여의도록 사타법(捨墮法)을 제정해두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교와 자본주의 발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베버의 일면적 이해와는 달리, 불교 혹은 불교의 가르침은 행위자나 담지자(agent)의 마음 상태에 따라 자본주의와 결합하는 방식에서 다양하게 현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른바 불교자본주의의 양상은 우리 앞에 다양한 얼굴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불교자본주의의 다양한 얼굴

우선, 불교가 자본주의적 가치 추구를 적극적으로 추동해나가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한 사례를 보자.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나모리즘은 그 대표적 사례다. 이나모리즘의 주인공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는 열등생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알려지지 않은 지방대를 졸업하고 취직이 어려워 겨우 도산 직전의 회사에 취직해 회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전자 부품 회사인 교세라를 창업해 세계 100대 기업으로 키운 사람이다. 그런데 이나모리즘에는 불교 사상이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실제로 이나모리의 저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들, 즉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던가, “원력을 가져야 한다”라던가 “능력이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다”라는 등의 표현들은 모두 불교에서 가져온 것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이나모리즘에 각인된 불교적 가치는 이나모리즘의 성공 방정식, 즉 “사고방식×열의×능력”으로 구체화되어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이나모리 가즈오는 불교의 가르침이나 교훈을 기업 경영의 실천에 적용해 교세라 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고, 퇴직 후에는 자신의 퇴직금 전부를 모교에 기부하고 불문에 들어가 탁발승이 되었다.


이러한 사례와는 반대로 또 하나의 극단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이 자본주의적 작동의 제어장치로 활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시장에 간 붓다』의 저자 로이드 필드(L. Field)는 불교의 수행뿐만 아니라 지혜와 자비를 경제 활동에 접목시켜서 자본주의적 비즈니스의 비윤리적 관행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새로운 경제 질서를 만들어야 함을 역설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상과 같은 두 가지 극단적 시각이 상황에 따라 적당한 비율로 섞여 있을 것이다. 만약 미래의 언젠가 이러한 복잡성의 실재에 대한 실증이 충분히 이루어진다면, 아직까지도 한반도 상공을 배회하고 있는 베버를 독일로 돌려보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유승무

한양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불교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을 겸하고 있다. 『불교사회학』, 『마음사회학』 등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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