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보사찰 통도사와 자장율사 이야기 | 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통도사에는 수호신 용이

도량을 지킨다


그림 | 한생곤

경남 양산의 영축산 자락에 위치한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있다.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을 설치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해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통도(通道)라고 했다 한다. 한편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라고 한 것은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님이 설법하던 인도 영축산의 모습과 통하기 때문”이라 한다.


통도사를 창건한 분은 목숨보다 지계(持戒)를 중시했던 자장율사(590~658)다. 스님은 일찍 부모를 여읜 후, 본인의 논밭과 집을 희사해 원녕사란 절을 세웠으며, 홀로 깊은 산에 들어가 백골관(시체가 썩어서 백골이 되는 모습을 보고 덧없음을 깨닫는 수행법) 수행을 했다. 636년(선덕여왕 5), 왕명으로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 종남산 운제사에서 3년 동안 수행한 스님은 청량산의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기도 정진했다. 그러던 중, 꿈에 낯선 스님이 나타나 게송을 일러주었는데 깨고 나니 범어로 된 게송이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를 때 꿈속에 한 스님이 나타나 그 뜻을 풀어주었는데, 그 꿈에 나타난 분이 문수보살이다. 스님은 문수보살로부터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염주와 경전 등을 받아 7년 만에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로 돌아온 자장율사는 사리를 모실 절을 세우기 위해 문수보살께 기도를 올리며 절을 세우기에 적당한 곳을 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잘 차려입은 동자가 나타나 동국에 부처님을 모시라고 일러주었다. 스님은 동국이 신라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나 넓은 신라의 어느 곳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동쪽으로 날려 보냈더니 오리는 한 송이 칡꽃을 물고 돌아왔다. 엄동설한에 오리가 칡꽃을 물고 오는 것을 본 스님은 의아했다. 하지만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절을 세우라는 것이 부처님의 뜻임을 깨닫고, 흰 눈이 쌓인 한겨울에 칡꽃을 찾아 나섰다. 며칠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영축산에 도착했을 때 큰 못 하나를 발견했다. 그 연못 주변에는 신기하게도 두 송이의 칡꽃이 피어 있었는데, 오리가 물어 온 꽃과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세 송이였으나 스님이 날려 보낸 오리가 한 송이를 물고 왔던 까닭에 두 송이만 남은 것이다.


자장율사는 마음속으로 감탄하고 산 아래 큰 연못이 있는 곳에다 절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연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절을 지으려면 연못을 메워야 했기에 자장율사는 용들을 불러내 설득에 나섰지만 용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법력으로 연못을 펄펄 끓게 해 용들을 쫓아냈다. 아홉 마리의 용 가운데 다섯 마리는 남서쪽을 향해 산 너머로 도망을 갔는데 그곳을 ‘오룡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세 마리의 용은 동쪽으로 달아나다 솔밭 길 근처 야트막한 산의 큰 바위에 부딪혀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때 용이 흘린 피가 바위에 낭자하게 흘렀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바위를 ‘용피바위’ 또는 ‘용혈암’이라 불렀다. 현재 산문 쪽에 있는 검붉은색의 용혈암은 이 용들이 흘린 피가 묻어서 바위색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한 마리는 순종하며 절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자 자장율사가 자그마한 연못을 만들어 그곳에 살도록 했다. 그 연못이 지금 통도사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구룡지(九龍池)’로, 불과 15㎡ 남짓한 크기에 수심도 한 길이 채 안 되는 타원형의 작은 연못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자장율사는 그 연못을 메우고 금강계단을 쌓고 646년(선덕여왕 15)에 절을 세웠다. 그 절이 바로 통도사다.


한편 자장암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짓기 이전에 토막에서 수도하던 산내 암자다. 자장암 법당 뒤 절벽 바위에는 1,400년 전 부터 금개구리가 살고 있다고 전한다. 요즘도 자장암에서 정성 들여 기도를 잘하면 볼 수 있다는 이 금개구리는 스님이 통도사를 세우기 전, 석벽 아래 움집을 짓고 수도하고 있을 때 나타났다.


통도사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구룡지. 자장율사가 자그마한 연못을 만들어 용 한마리를 살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저녁, 자장율사는 공양미를 씻으러 암벽 아래 석간수가 흘러나오는 옹달샘으로 나갔다. 바가지로 막 샘물을 뜨려던 스님은 잠시 손을 멈췄다. “원 이럴 수가. 아니 그래 어디 가서 놀지 못해서 하필이면 부처님 계신 절집 샘물을 흐려놓는고!” 스님은 샘에서 흙탕물을 일으키며 놀고 있는 개구리 한 쌍을 두 손으로 건져 근처 숲속으로 옮겨놓았다. 다음 날 아침, 샘가로 나간 스님은 개구리 두 마리가 다시 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허참, 그 녀석들 말을 안 듣는구먼!”


스님은 다시 오지 못하도록 이번에는 아주 멀리 갖다 버리고 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음 날에도 개구리는 또 와서 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로구나.” 스님이 개구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여느 개구리와는 달리 입과 눈가에는 금줄이 선명했고 등에는 거북 모양의 무늬가 있었다. “불연이 있는 개구리로구나.” 스님은 개구리를 샘에서 살도록 그냥 놔두었다.


어느덧 겨울이 왔다. 자장율사는 겨울잠을 자러 갈 줄 알았던 개구리가 눈이 오고 얼음이 얼어도 늘 샘물 속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 안 되겠구나. 살 곳을 마련해줘야지.” 스님은 절 뒤 깎아 세운 듯한 암벽을 손가락으로 찔러 큰 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고 그 안에 개구리를 넣어주었다. “언제까지나 죽지 말고 영원토록 이곳에 살면서 자장암을 지켜다오.” 스님은 이렇듯 불가사의한 수기를 내리고는 개구리를 ‘금개구리(金蛙)’라 명명했다.


그 뒤 통도사 스님들은 이 개구리를 금와보살, 바위를 금와석굴이라 불렀다. 금와석굴은 말이 석굴이지 지름이 1.5~2cm에 깊이 10cm 정도의 작은 바위 구멍이다. 그 속에는 이끼가 파랗게 끼어 있는데 개구리 같기도 하고 큰 벌 같기도 한 것이 살고 있다고 한다. 자장율사의 수기를 받아 오늘까지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 이 금와보살은 통도사 내에 길조가 생길 때면 나타난다고 한다.


요컨대 통도사는 “내 차라리 계를 지니고 하루를 살다가 죽을지언정 파계하고 백 년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자장율사의 올곧은 지계 정신과 금와보살을 통한 생명 존중과 자비 실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불지종가(佛之宗家)로, ‘산사–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여전히 세인들의 마음을 끌고 있다.


백원기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평생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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