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완성을 위한 불교적 수행 | 자유와 해탈 4

자유와 해탈 4


자유의 완성을 위한 

불교적 수행


원빈 스님 

송덕사 주지, 행복문화연구소 소장



 속박과 자유

 기독교에는 다양한 상징을 지닌 설화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정말 중요한 내용은 바로 ‘선악과(善惡果)’라는 상징에 대한 설화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극락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에덴동산에 아담과 이브가 살고 있었는데,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는 원죄를 지어 황야로 쫓겨난다는 내용이다. 인간이 낙원에서 황야로 쫓겨났다면, 황야는 인간에게 일종의 감옥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 감옥에서 벗어나게 될 때 낙원인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 자유를 되찾는 과정을 구원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자력의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자유를 되찾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선악과를 뱉어버리고 해탈의 자유를 누리는 불교의 가르침을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윤회에 묶인 이유는?

인간이 자유를 되찾는 방법을 알아보려면 먼저 ‘선악과’라는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선악과’의 효능은 단순히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을 넘어선다. 하나가 둘이 되면 그 이후에는 무한으로 늘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듯, 선악에 대한 분별의 시작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인식하게 되는 씨앗으로 작용한다. 즉 ‘선악과’는 다름 아닌 이분법적인 인식의 시작을 상징한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분별식을 활용하는 데 익숙하다. 너도나도 누구나 이분법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경험하기에 보통은 이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틀은 결정적인 문제점을 내포한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을 통해 오성의 한계를 말했다. 이것은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으로는 인식 대상인 물(物)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는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붓다의 지혜를 묘사할 때 여러 가지 개념을 활용하고 있다.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여실지(如實智)이다. 여실지란 ‘있는 그대로를 보는 지혜’라는 뜻인데 이것이 가능한 것은 다름 아니라 이분법의 인식 틀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범부의 이분법적인 인식에 대비되는 붓다의 인식을 불이(不二)라고 표현하는데 ‘선악과’라는 이분법의 독을 완전히 뱉어낼 때 도달할 수 있는 의식 상태로 진리를 경험할 수 있는 순수의식이다. 붓다와 범부가 한 공간에서 살아간다고 가정해보면 과연 그들은 한 공간에서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까? 붓다는 불이의 의식을 활용하기에 지금 이곳의 실체인 불국토에서 살지만, 범부는 이분법에 물든 인식의 틀로 살아가므로 똑같은 공간을 사바세계로 경험한다. 이처럼 정토(淨土)와 예토(穢土)가 동시에 겹쳐 있음을 모든 성인은 입을 모아 선언했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황야로 추방된 적이 없다. 선악에 물든 분별식 때문에 더는 에덴동산을 경험할 수 없게 된 것뿐이다. 이것은 마치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볼 수 없어 그리운 고향을 찾는 나그네 신세가 된 것과 같다. 범부 중생들이 윤회의 감옥에 묶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이분법의 인식 틀인 자기 자신의 우치(愚痴)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용서받으려고 애쓰기보다는 눈을 가리고 있는 우치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모든 개념을 깨뜨리는 중관(中觀)

용수(龍樹, Nagarjuna, 150? ~ 250?) 보살은 모든 논쟁을 희론(戱論)이라고 선언했다. 이분법의 인식 틀을 거쳐서 나온 모든 생각과 말은 아무리 고귀하게 포장해도 여실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용수 보살의 눈에는 분별된 개념에 불과한 허상을 움켜쥐고 서로 자신이 옳다고 논쟁하는 모습이 코미디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용수 보살이 모든 개념을 파사(破邪)의 대상으로 삼는 원리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깨끗한 물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듯이 만법의 실상 역시 이분법의 인식 필터(filter)를 거치면 허상으로 출력된다. 이 모든 개념의 허상을 파해야만 비로소 불이의 중도가 드러나게 된다. ‘선악과’가 만들어낸 분별은 무한하지만, 용수 보살은 이를 네 가지 쌍으로 간단하게 정리했다. 이를 포함하고 있는 용수 보살의 『중론(中論)』 「귀경게(歸敬偈)」를 소개한다. 


“연기(緣起)는 

불멸(不滅)・불생(不生)・

부단(不斷)・불상(不常)・

불래(不來)・불거(不去)・

불이(不異)·불일(不一)하며, 

희론(戱論)이 적멸(寂滅)한 것이며, 

길상(吉祥)한 것임을 가르쳐주신 

정등각자(正等覺者), 설법자 가운데 최고인 그에게 

나는 귀의합니다.” 


이 중 생멸과 단상, 거래와 일이가 바로 무수한 파사의 대상을 간단하게 네 쌍으로 줄인 개념이다. 그는 이를 타파하기만 하면 불이의 인식인 중도가 드러난다고 선언했는데, 이것이 바로 ‘팔불중도(八不中道)의 수행’이다. 어떤 사람들은 『중론』을 단순 철학서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오해이다. 이 논은 논리를 통해 이분법이라는 오류를 일으키는 논리를 제거하는 것, 이를 통해 중도(中道)를 관(觀)하는 중관(中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는 수행서이다. 

파사현정(破邪顯正)과 팔불중도의 수행 원리는 모두 이분법의 인식 틀과 이에 필터링되어 분별된 개념들, 즉 인식의 틀과 내용을 모두 극복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분법이라는 예토에서 살아가는 중생이 중도관을 통해 인식의 틀 자체가 바뀌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정토를 경험하게 된다. 허상으로 물들게 하는 ‘선악과’의 선글라스만 벗는다면 만법이 있는 그대로의 진리로 경험되는데 용수 보살은 이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교리로 정리했다. 그는 인간의 인식 체계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는 점을 체계적으로 논증하는 것뿐 아니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교리와 수행 체계까지도 『중론』이라는 가르침 속에 담아놓은 것이다.


완전한 자유를 위한 불교적 수행

불교의 자유는 해탈이다. 해탈이란 ‘풀어헤치고[解] 벗어난다[脫]’는 의미이니, 묶여 있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인 것이다. 앞에서 중생은 윤회라는 황야에 묶여 있고 이곳에 묶인 이유를 이분법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분법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나와 너를 구분 짓는 자아의식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아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나 대자유의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을 교육했다. 붓다는 제자들을 수준에 따라 범부와 성인으로 구분 지었는데,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 끝에는 성인의 이상향인 아라한이 있다. 아라한은 윤회에 묶여 있는 족쇄를 완전히 풀고 벗어나 해탈한 존재이다. 아라한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 중 살적(殺賊)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살적은 ‘중생을 윤회의 감옥에 묶어두는 유일한 적을 죽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적은 누구일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아라한은 생사가 반복되는 윤회 속 환상의 죽음이 아니라 자아의 진정한 죽음을 이룩한 존재이다. 

불교의 자유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결국 ‘자아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이 자아가 나와 너를 구분 짓는 이분법의 시작이고, 선악과를 뱉어내는 여정의 마지막 관문에서 만나게 될 윤회의 감옥을 책임지는 대간수이다. 오해할 수 있는 점은 자아에 묶여 있다고 표현을 하면, 자아가 마치 말뚝과 같이 실체가 있는 것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아라는 관념은 갖가지 번뇌들이 힘을 합쳐 유지하고 있는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해탈의 길을 교육하며 제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해탈 수준을 점검해볼 수 있는 기준을 말했다. 그 기준이란 열 가지 번뇌의 족쇄인 유신견, 의심, 계금취견,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착, 거친 분노, 색계에 대한 탐욕, 무색계에 대한 탐욕, 도거, 자만, 무명을 말한다. 그리고 이런 족쇄를 풀어낸 정도에 따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으로 성인의 명칭이 나뉜다. 이 열 가지 족쇄가 바로 자아를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족쇄 하나가 느슨해지고 풀릴수록 자아의 허상은 힘이 약해지지만, 무아에 대한 체험적 앎은 강해진다. 

범부는 무아에 대한 체험적 앎이 전혀 없기에 열 가지 족쇄 중 하나도 풀지 못한 상태이다. 성인의 시작인 수다원부터는 무아의 앎의 흐름에 들어가기 시작하기 때문에 앞의 세 가지 유신견, 의심, 계금취견을 풀어낸다. 사다함과 아나함은 다음의 두 가지 족쇄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착과 분노가 옅어지면서, 완전히 끊어내는 과정을 겪는다. 마지막으로 아라한은 남은 다섯 가지의 족쇄를 풀어내는데 이것이 자아의 완전한 죽음인 해탈의 완성이니 이 열 가지 족쇄를 풀어낸다면 선악과를 뱉어내고 열반의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불교는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문화권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그렇기에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법 역시 매우 광대하다. 하지만 그 핵심은 자승자박(自繩自縛)하고 있는 이 족쇄를 풀어내는 것이다. 족쇄의 열 가지 축에 대한 명확한 앎을 기준으로 삼을 때 불자의 수행 주제가 명확해진다. 또한 이 기준으로 자신을 점검해갈 때 의심 없이 정진을 이어나갈 수 있다.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족쇄의 열 가지 정체와 팔불중도라는 수행법을 크게 써서 벽에 붙여놓고 항상 마음에 되새길 때 자유의 길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원빈 스님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행복문화연구소(http://cafe.daum.net/everyday1bean) 소장으로 있으면서 경남 산청에 있는 송덕사의 주지를 맡고 있다. 『BBS불교방송』 라디오와 TV에서 <행복한 두시>와 <원빈 스님의 최고의 행복학, 불교>를 진행했고, 지금은 『BTN불교TV』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같은 하루 다른 행복』, 『명상선물』,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 『굿바이, 분노』 등이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