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민주주의 정신과 오늘의 문제 | 불교와 민주주의 1

불교와 민주주의 :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1


불교의 민주주의 정신과 

오늘의 문제


정천구 

백성욱연구원 이사장



불교와 민주주의

 불교는 근대 민주주의 발전 이전에 성립된 가르침이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이 가장 잘 들어 있는 종교다. 자유민주주의는 공화주의와 함께하는 제도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헌법에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민주주의의 기원을 그리스에서 찾지만,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도 붓다의 모국인 샤캬(Śākya)는 밧지(Vajji), 말라(Malla) 등과 같은 공화국이다. 붓다의 부친 슛도다나(정반왕)는 선거로 선출된 왕이었다.
 인류 역사상 여러 형태의 공화국이 있지만 공통된 특징은 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공동체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정한 규칙과 합의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민주주의에서 공화주의가 빠지면 독재가 된다. 어떤 정치 체제나 1인 지배이건 소수 지배이건 민중의 지배이건 집권자가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제 맘대로 국정을 운영하면 그게 바로 독재요 전제정치(autocracy)다.
 민주주의는 이념적으로는 자유, 평등, 박애 등 프랑스대혁명 때 내세웠던 이념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이념은 이미 기원전 6세기 붓다가 설파한 이념이다. 그래서 인도에서 불교 부활의 큰 역할을 한 인도 초대 법무장관 암베드카르 박사(Dr. Ambedkar)는 자기는 민주주의의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을 프랑스대혁명이 아니라 자기의 스승 붓다로부터 배웠다고 말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이 세 가지 이념은 3위 일체로서 한 가지만이 아니라 세 가지 이념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 평등만 내세우거나 자유만 내세우면 안 되고 자유, 평등,박애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한다면서 한쪽에서는 자유를 다른 쪽에서는 평등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세계적 대결로 발전한 사실에 비추어 이 말은 문제의 본질을 잘 지적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경험적으로도 정의할 수 있다. 경쟁적인 선거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느냐 아니냐로 정치 체제가 자유민주주의냐 아니냐를 판가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늘어놓아도 경쟁적인 선거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로 인정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는 선거의 무결성(無缺性)과 공정성에 그 존폐 여부가 달려 있다. 근자에 우리나라를 포함해 지구촌의 여러 나라, 심지어 자유민주주의 종주국이라 여겨오던 미국에서조차 부정선거 시비가 심각한 것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자유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음을말해주고 있다. 이는 근대 경험과학이 불러온 위기이기도 하다.

과학주의의 문제점

 경험에만 과도하게 의존한 근대 과학은 인류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으나 그에 못지않은 위험도 가져다주었다. 20세기에 핵무기와 세균무기 같은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했으며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나치즘과 코뮤니즘과 같은 전체주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 21기에는 거대 자본, 빅 테크(Big Tech), 그리고 거대 언론이 야합해 자유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인 언론의 자유를 말살하고 조지 오웰의 소설『1984년』에 나오는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사회를 가능케 하고 있다.

불교는 몽매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과학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종교이며

철학이다. 불교의 반야 지혜는 경험을 넘어선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불교의 가르침을 모델로 한 정치, 경제, 정신생활 전반에서 광범위한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는 또한 과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불교는 과학에 친화적이지만 과학주의와 몽매주의의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과학주의는 자연과학의 모델을 철학과 인문학의 문제에도 적용하려는 시도이다. 경험과학에만 의존할 경우 철학의 비판적 해방적 기능을 상실한다. 삶의 의미와 윤리 도덕의 문제 등은 경험과학으로 파악할 수 없다. 과학주의에 빠지면 인간은 결국 짐승이 된다. 그러나 과학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과학을 외면하거나 유사 과학으로 대체하려는 시도 역시 피해야 한다. 그건 몽매주의다. 종교에 뿌리를 두고 천동설을 믿는 권력이 과학으로 발견한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를 재판에 넘겨 입막음하려 했던 우매함과 같은 것이다.
 불교는 몽매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과학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종교이며 철학이다. 불교의 반야는 경험을 넘어선 지혜이다. 원래 아프리카, 그리스, 인도, 아시아 등에서 불교를 포함한 종교는 대부분 믿음과 지혜를 함께 추구했다. 그런데 서양에서 믿음만을 절대시하고 지혜의 추구를 이단으로 모는 종교 세력이 대세를 장악해 근대 과학에서 지혜의 추구가 빠진 것이다. 반야 지혜의 추구를 제외하고 경험적 지식만 추구하면 과학은 에고(ego)와 욕망의 도구가 되어 인간을 억압하는 반인륜적 반민주적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구하려면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불교의 가르침을 모델로 한 정치, 경제, 정신생활 전반에서 광범위한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선거에 의한 다수 지배의 원칙, 권력 분립, 법치주의, 개인 인권의 존중 등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회복해야 한다.
 특히 과학기술이 민주주의의 본질적 내용을 훼손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아야 한다. 불교 경문에 “소는 물을 마시고 우유를 만들지만 뱀은 물을 마시고 독을 만든다(牛飮水成乳 蛇飮水成毒: 初發心自警文)”는 말씀이 있다.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혜택을 주어왔지만 누가 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에게 엄청난 독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누가 뱀의 마음을 가졌는지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점을 치거나 관상을 보거나 도인의 관심법(觀心法)에 맡기는 것 등은 객관성과 증거를 중시하는 과학의 검증(檢證) 절차를 통과하기 어렵다. 과학의 큰 업적 중의 하나는 검증을 핵심적 가치의 하나로 발전시킨 점이다.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은 투표에 관련된 중요한 사항을 기계에 맡기지 말고 사람의 손으로 하는 것이다. 인간이 악을 행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게 지혜로운 일이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하는 일들을 남에게 또는 기계에 맡기지 않는 이치와 같다. 인간의 선의(善意)는 믿어야 하겠지만 구체적인 사안에서 인간이 악할 가능성은 항상 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과거의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선각자들이 권력 분립제도, 비밀 투표제도, 언론 자유 및 개인 인권의 보호 등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만든 것 역시 인간이 악할 수 있는 경향에 대비해 자유, 평등, 박애 등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컴퓨터와 디지털 혁명 같은 것은 새로운 과학기술에 속한다. 그 편리성에 경도되어 표를 집계하고 계산하는 일 등을 이런 기술에 맡겨보았다. 그러나 그런 기술들은 선거 조작에 악용되었거나 악용될 가능성이 세계 곳곳에서 보고되는 실정이다. 표를 계산하고 집계하는 중요한 일들은 이제 수작업으로 다시 전환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오늘날 과학은 물질의 근원과 작용을 밝히는 데 머물지 말고 인간의 마음과 의식으로 연구 대상을 확대해 인간과 환경을 대량 파괴하고 인간 의식을 조정할 수 있는 악마적 기술들을 민주적 통제 아래 둘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을 살리고 자유를 보존할 수 있는 지혜를 개발하는 데 더 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들을 지키고 과학기술을 홍익인간을 위해 쓰도록 만드는 데 불교의 역할이 크다고 본다.


 

정천구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 조지메이슨대 방문학자, 영산대 총장, 서울디지털대 법률행정학과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백성욱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금강경 독송의 이론과 실제』, 『붓다와 현대정치』, 『금강경 공부하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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