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절, 큰 믿음|암자 기행
번뇌의 진흙탕에서 수고하는 무리가
바로 여래의 씨앗
내변산 월명암
어떤 사랑은, ‘목숨을 맡기는 것’ 말고 달리 방도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이 살아가야 할 이유일 때, 그 사랑은 곧 목숨입니다. 한국 불교사에도 그런 사랑이 있었습니다.
지리산, 천관산, 능가산 등지에서 수도를 하던 영희, 영조, 광세라는 세 스님이 문수도량을 찾아서 오대산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어느 저녁 지금의 김제 만경 들판을 지나다 구무원(仇無寃)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날 때부터 말을 하지 못하는 묘화(妙化)라는 이름의 열여덟 살 딸이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묘화는 광세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묘화의 말문이 열린 것입니다. 동시에 벼락처럼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묘화는 광세 스님에게 간절히 함께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비구로서 당연한 도리였습니다. 묘화 역시 단호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것입니다. 스님은 비구의 길을 접었습니다.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을 낳았습니다. 15년 뒤 거사는 아이들을 부인에게 맡기고 수도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옛 도반 영희, 영조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세 사람은 도력을 가늠해보기로 했습니다. 질그릇 병 세 개에 물을 가득 채워서 들보에 달아두고 돌로 쳐서 물이 흘러내리는지 아닌지를 시험해보기로 한 것입니다.
돌로 친 세 개의 물병 가운데 거사의 물병 속 물만이 허공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영허대사집(暎虛大師集)에 실린 「부설전(浮雪傳)」에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월명암’은 부설 거사가 도를 이룬 곳입니다. 조계종 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로691년(신라 신문왕 11년)에 부설 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옵니다. 호남의 대표적인 산상 수도처의 하나로 1915년에 학명 스님이 중건한 이후 행암(行庵)·용성(龍城)·고암(古庵)·해안(海眼)·소공(簫空) 스님 같은 근세 고승들이 거쳐 갔던 곳입니다.
월명암은 변산 팔경 중 서해낙조(西海落照)와 월명무애(月明無靄)를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이름 높습니다. 변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쌍선봉(498m)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있습니다. 월명암을 가는 가장 쉬운 길은 736번 지방도의 남여치에서 2.2km를 걸어 오르는 것입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내소사에서 직소폭포를 거쳐 월명암을 참배하고 남여치로 내려서면(10km) 내변산의 비경을 마음 깊이 새겨 넣을 수 있습니다.
부설 거사를 향한 묘화의 사랑은 귀의(歸依)에 가까울 것입니다. 비구로서 계를 내려놓고 묘화를 받아들인 부설 거사의 사랑은 날숨에 호응하는 들숨 같은 것이었습니다. 세상 어떤 척도로도 잴 수 없는 목숨의 무게에 값하는 사랑입니다.
“번뇌의 진흙탕에서 수고하는 무리가 바로 여래의 씨앗(『유마경』「불도품」)”이라한 바, 그 씨앗에서 피어난 대승불교의 한 꽃이 바로 월명암입니다.
글|윤제학, 사진|신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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