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 “육식을 줄이자”
육식 절제는
붓다와 대자연에 바치는
공양이다
김규칠
대한불교진흥원 이사
육식과 관련된 문제의 중대성
먼저, 현실 속에서 함께 나눌 어떤 진실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지난 2018년 10월 24일 대한불교진흥원이 주최자가 되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정부 관계 당국자와 여야 국회의원들 그리고 시민들이 동참한 가운데 ‘공장식 사육과 대량 살처분 어젠다 대회’를 열고 강연 등 나름대로의 캠페인을 해왔다. 이후 자료도 더 모으고 세미나도 하면서 ‘동물성 식품에 관한 진실’, 즉 ‘육류와 유제품의 생산과 소비’ 때문에 일어나는 대표적인 문제점을 다시 정리해보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육식과 관련된 문제의 중대성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1) 거대 농장과 공장식 대량 사육은 감염 병원체 유인 및 매개 기지가 된다. 어떤 연유에서든 야생의 터전을 침범하면 미생물과 공생 관계에 있던 숙주 야생동물이 새 터전을 찾아다니던 도중에 농장과 축사 가까이 오게 되고, 그곳에 살던 중간 숙주 동물들과의 접촉을 통해 바이러스와 슈퍼박테리아가 인간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것이다.(※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수의학과 최강석 교수의 『바이러스 쇼크』 참고 )
2) 과다 육식은 동물을 매개로 전염병을 불러오는 것 외에도 성인병의 심각한 원인을 제공한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집단 사육은 유해 미생물의 발생을 억제하기 위해 항생제를 남용하고, 살균 소독제를 빈번히 뿌린다. 제조, 가공, 배송 등의 과정에 보존제, 산화 방지제, 발색 및 착색 착향제, 조미제, 품질 개량제 등 각종 화학 물질들이 첨가되며, 인체 내에서의 생화학적 반응 과정에서 교란, 손상, 영양소의 소모, 유해 물질의 발생과 축적 등 문제를 야기한다.
3) 육식을 계속할수록 이점(利點) 이상으로 리스크(risk)가 커진다. 성인병의 유발 요인뿐만 아니라 발암 물질 등 위해 요소들이 있을 수 있어 그것들이 동물 및 인체에 유입되며 계속 쌓이게 된다. 그 결과 징후가 나타나고 증세를 느끼기 시작하면 리스크는 증폭된다.
4)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요인은 탄소 배출인데 축산이 세계 모든 교통수단의 배출량(약 13%)보다 더 많이 배출(최소 18% 이상)한다. 그중에서도 소의 배출량이 가장 많고 양과 돼지가 그다음이다. 메탄가스의 경우에는, 전체 배출량 중 축산업이 35%나 배출한다.
5) 전통적 가축 사육 정도를 넘어선 축산도 도를 넘으면 물과 공기 등 환경의 오염원이 될 뿐만 아니라 구제역과 조류독감 등 각종 질병에 노출되는 등 취약함으로 인해 공적, 사적 희생과 비용은 적지 않은 손실로 돌아온다. 사육과 도살, 생산 제조와 소비, 대량 살처분과 폐기물(침출수 등)의 처리 과정에서 물과 토양을 과도하게 소모하고 오염시키며 악영향을 끼친다.
6) 목축과 사료 재배 농장을 위해 저지르는 삼림의 남벌과 토양의 훼손은 막대하다. 1~2초마다 축구장 크기의 숲이 없어지고, 해마다 이탈리아 나라 크기만 한 삼림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있다. 숲과 함께 크고 작은 야생의 세계가 한번 사라지면 생태계의 원천인 야생의 회복은 어렵다. 탄소 배출을 흡수 억제하는 대형 고래들이 격감하면 그 분변에 의존하던 식물성 플랑크톤과의선순환 관계가 무너지고, 상어 등 멸종 위기 어종을 비롯해 어족의 남획과 각종 유해물 투기가 일어나면 해양의 생태계 파괴와 오염 문제를 크게 악화시킨다. 이는 현재 지구온난화 등 생태계 파괴로 이어지고 있다.
7) 도살과 사육 과정에서 잔인한 동물 학대와 살육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전기 충격이나 순간 고열 도살의 경우도 살아 움직이는 목숨과의 살벌한 사투(死鬪)라 약간만 차질이 나도 동물에게 더 심한 신체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주고 상흔을 남기며 그런 먹을거리는 인체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젖소는 인간용 채유를 위해 아기 송아지를 낳는 즉시 모유로부터 배제당하고, 수컷 병아리는 감별 과정에서 쓰레기나 사료용으로 분류되어 끔찍한 방법으로 사라지고 있다.
8) 이처럼 잔인하고 비참한 일들이 반복되면 생명의 귀중함에 대한 인지 감수성 상실과 양심의 마비를 초래한다. 각종 질병으로 매년 대량 살처분이 대규모로 일어나는데도 짐짓 모르는 척 일상적 생활 습관에 젖게 된다. 사회의 다른 이슈들에 묻혀 흘러가다 보니 더 둔감해진다.
9) 이 모든 사태는 인간의 자비심의 싹과 측은지심을 망실케 하고, 결국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상호 관계를 훼손하면서 인간의 자기 소외와 정신적 황폐화를 가져온다.
10) 그리고 근본적으로 대자연[공기, 물, 무기물 등]-식물(다양성)-동물(다양성)-미생물과 인간의 집합・공존체의 연쇄 연관의 관계에서 생명 다양성과 생태계 파괴를 초래하고, 대칭적 균형과 조화를 상실하게 하고 있다.
공장식 축산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
이상과 같이 문제점을 정리하다 보니 톨스토이, 간디 같은 분들이 채식주의자가 된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피엔스』, 『호모데우스』의 저자로 유명한 역사가 유발 하라리는 영국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공장식 축산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 중 하나”라고 했다. 나는 생계를 위해서 부득이 하는 일이나 잘 모르고 하는 일을 무조건 비난하거나 혹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결과는 연기의 이치를 모르고 저지른 과오의 업보일 것이다. 연기법적 세계란 상호 불가분의 관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만물이 관계를 맺고 오랜 세월 동안 지속하고 살아오는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고 지탱해주는 존재론적 의의와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살려주고 보살펴주는 관계만이 아니라 때로는 간접적으로 매개를 통해서, 때로는 돌아가는 우회로를 통해서 서로 작용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 자연이 인간을 비롯해 온갖 생물들에게 베푸는 무주상 보시와 자연적 존재자들끼리 서로 베푸는 호수적(互酬的) 관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순수증여와 호혜적 증여를 뜻한다. 공기, 물, 태양에너지, 각종 무기물과 영양분을 가득 포함하고 있는 흙의 대지 등 헤아리기 어려운 많은 요소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아름답고 조화로운 생태적 관계를 이루어왔다. 그것이 인간의 탄생과 성장, 발전, 존속에 기여해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자연은 생색도 내지 않고 의식하지도 않고 베풀어준다. 자연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자연만큼 대자대비를 묵묵히 실천하는 존재는 없다. 그들이 우리의 스승이고 우리의 불보살이다. 그 대자연 속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존재 세계의 바탕과 근간을 이루고 있는 존재가 미생물이고 야생이다. 그들은 대자연의 자손들이다. 우리는 그들이 말이 없고, 핍박을 해도 순종하는 데 익숙해 습관적으로 함부로 대하고 그들을 무시하고 학대했다. 심지어는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빈번히 발생 원인과 전파 경로를 오해해 박멸하려 했다. 너무 우리 인간 중심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모든 생명은 연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그들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은 그 자체로서는 우리에게 이롭다거나 해롭다거나 어느 한편으로 정해진 존재는 아니었다. 연기적 관계와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였다. 연기적 세계의 유동적 과정 속에서 각각의 존재 의의를 존중하고 지켜주었더라면 피해는커녕 천지는 극락처럼 되었을 것이다. 연기법은 그렇게 생명 하나하나를 살리면서 대자연 전체의 천변만화를 이루고, 천지의 조화로운 운행은 생명 하나하나의 의의와 역할을 실현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대자연은 붓다 같은 존재다. 아니 붓다가 대자연의 연기법을 닮았다. 붓다는 분별과 단절의 성벽을 넘어 야생으로 들어가 야생으로부터 배워 대자연처럼 된 존재다. 대자연의 연기법과 무아와 무사상(無四相)을 체득해 불법도 붓다도 의식하지 않은 대자연인이 된 것이다. 스스로 그러함의 자연적 대자유, 자기도 없는 자유를 실현한 대자유인이다. 자연은 일부러 이치를 내세움도 없이 스스로 그러함으로 함이 없는 무위의 불연(不然)이지만 그러하기 때문에 대자연적 자유의 대연(大然)이다.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는 마음은 미(美)와 시(詩)를 생각하는, 동물과 어린이와 순수를 좋아하는 불교인의 마음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자연 존중’, ‘생명 존중’, ‘자연과 생명의 보호’부터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서 오계도 나오고 보살계도 나온다.
그러므로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무리(無理)이며 지리(至理)이고 불연이며 대연이라”고 했다. 결국 붓다는 붓다 자신에게 공양하지 말고 대자연에 공양하는 것이 무사상이고 무아이며 연기법이라고 가르친 셈이다. 불교인이 이 이치를 진작 깨달아 실천했더라면 이곳이 불국정토가 되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는 그걸 알고 무언과 무관여의 일생을 살고자 했으나 신관(神觀)과 ‘동아줄의 환상’과 카스트제도에 휘둘린 사람들에게 할 수 없이 말씀을 남기게 되었으니 그것이 불경(佛經)이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인들에게 육식과 관련된 붓다의 호소에 가까운 말씀을 여기에 전한다. 붓다 말씀의 요지는 이렇다. ‘보살행을 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지복(至福)이다. 그러므로 불보살들을 공양하면 복을 받는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풀 한 포기든 보살피고 아껴주는 사람이 보살이다.’ ‘세상과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이 자유롭고 행복해지려면, 제일 먼저 대자연의 존재로 눈을 돌려라. 이 세상 살아있는 생명들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부터 실천하라’는 것이다.
‘자연 존중’, ‘생명 존중’, ‘자연과 생명의 보호’ 실천이 불교인의 마음
다른 존재자를 배려하는 마음은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는 마음은 미(美)와 시(詩)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미와 시를 생각하는 마음은 동물과 어린이와 순수를 좋아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불교인의 마음이다. 스님이나 신도나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자연 존중’, ‘생명 존중’, ‘자연과 생명의 보호’부터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서 오계도 나오고 보살계도 나온다. ‘고기를 먹어도 됩니까’라는 질문에 붓다의 대답은 어떠했을까? 붓다의 대답은 간단하다. ‘보살이 어찌 산 짐승을 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살을 먹겠느냐’이다. 붓다 당시에 보통 일곱 집 탁발을 하고 돌아와 공양을 했는데 그때 마을 사람들이 보시하는 음식물들을 가리지 않았으니 그 속에는 고기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붓다가 고기를 원했거나 불자들 보고 먹으라고 한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깨달은 분은 말없이 사람이든 음식이든 가리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보시하는데 어렵고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했을 뿐이다. 여기에 경전에 나오는 말씀을 소개하겠다. 『불교성전』(1972년 대한불교조계종 성전편찬회/동국역경원 간행본, 544,
545, 558, 561, 565, 568, 572p)에 나오는 내용이다.
『수능엄경』에 보살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에게 ‘살생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어떤 (열대 사막이나 한대) 지방은 사람이 먹을 푸성귀가 나지 못해 부득이 (다섯 가지) 깨끗한 고기라면 괜찮다고 허락했으나, 그렇지 않은 곳인데도 중생의 살을 뜯어 먹는 사람을 어떻게 불자라 할 수 있느냐? 비록 삼매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 순간은) 모두가 흉악한 나찰인 것이다. 청정한 비구나 보살은 걸어다닐 때에 산 풀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는데 하물며 손으로 뽑겠느냐?” 또 『불설범망경』에 “중생을 죽이는 인(因)과 죽이는 연(緣)과 죽이는 방법과 죽이는 업(業)으로 목숨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대계를 비롯해 보살십중대계에 이어 보살사십팔계 법문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고기를 먹지 말라. 고기를 먹으면 자비의 종자가 끊어진다”, “죽을 생명을 거두어주고 살려주어라”, “중생을 손해 보게하지 말고 피해를 입히지 말라. 가축을 기르지 말라”, “중생을 항상 교화하도록 노력하라. 혹 짐승을 대하면 보리심을 내라고 속으로 염(念)하고 입으로도 말을 건네라.” 이와 같이 경전에 분명히 근거가 있지만, 설령 없다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 우리가 붓다와 붓다의 말씀을 믿고 불보살과 보살행을 수행하는 출가 스님들을 공양하는 마음이 있는 불교인이라면 그 마음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는 분명하다. ‘살고 싶어 하는 생명’을 계속 살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지, 죽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웬만한 사람이면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아름답고 물 맑은 산천의 나라며 전통적으로 오만 가지 나물을 즐겨왔던 겨레로서 세계에서 채식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을 가진 곳이었다. 한동안 육식 광풍에 휩쓸렸으나 이제 코로나 비상시국을 뚫고 나가는 지금부터 심기일전해 우리의 훌륭한 장점을 살려 활로를 연다면 아마도 참으로 좋은 시절이 올 것이다. 현대는 생명을 해치지 않고도 건강하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좋은 방법이 있는 시대다. 그렇다면 방향과 길은 명확하다. 되도록 중생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먹고, 입고, 묵을 곳을 마련하는 삶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가능하면 그 길에서 철저하고 완전히 실천할 수 있다면 그 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철저히 못한다 해도 이런 대원칙과 의의를 확실히 알고 그 길로 한두 발걸음이라도 성큼 내딛고 계속 나아간다면 그것이 모여 천지를 아름다운 조화세계로 이끌 것이다.
김규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동 대학교 신문대학원을 졸업하고, 비엔나대학과 와세다대학에서 연수를 마쳤다. 외무고시에 합격해 18년간 외교관으로 근무했으며 시민정책연대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서 활동했다. KBS <심야토론>, EBS <하나뿐인 지구> 등을 진행했고, KBS 해설위원 및 이사, BBS불교방송 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산업기술정보원장, 국민대 객원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원 및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을 지냈다. 현재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이자 불교인문사회과학원 원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탈정치시대의 새로운 항로』, 『불교가 필요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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