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물리학으로 본 불교사상 | 불교와 생명과학 2

불교와 생명과학 2


양자물리학으로 본 불교사상


양형진 

고려대학교 디스플레이·반도체물리학부 교수



뉴턴역학의 성공과 양자역학의 등장

 갈릴레이에서 시작된 근대 물리학은 뉴턴역학으로 완성되었다. 뉴턴은 천문학의 골칫거리였던 행성과 혜성의 운동을 만유인력과 동역학(dynamics)의 법칙으로 완벽하게 설명했다. 이로써 모든 천체의 운행이 만유인력이라는 단 하나의 원인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는 천상과 지상이 같은 동역학의 법칙으로 운행된다는 것이어서, 하늘과 땅이 같은 세계임을 알게 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나오면서 뉴턴역학으로 기술할 수 없는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측정 기술이 발전하고 측정 영역이 확대되면서 역학의 영역 안에서도 뉴턴역학이 기술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근대 물리학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20세기 초에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등장했다.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이 글에서는 양자역학을 살펴보겠다.

양자역학과 양자

 양자역학은 미시(microscopic) 세계를 구성하는 물체의 동력학을 다룬다. 양자역학에서 양자(量子)란 우리말로 ‘덩어리’ 혹은 ‘알갱이’이며, 전자, 양성자, 중성자,소립자, 이들로 구성된 원자, 빛 알갱이인 광자(光子, photon) 등이다.양자가 지극히 미세하다는 것을 원자와 광자를 통해 살펴보자. 탄소 2kg에는 10조 곱하기 10조 개의 탄소 원자가 들어 있고, 30와트의 전구는 1초 동안에 100억 곱하기 100억 개의 광자를 방출한다. 양자가 이렇게 작으므로 우리 눈으로 몸으로 감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원자를 셀 수도 없고 빛을 알갱이라고 느끼지도 못한다. 양자역학은 우주가 이런 양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측정 행위와 양자암호

 양자가 아주 작으므로 거시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현상이 양자의 세계에서는 항상 일어난다. 이는 크게 보면 모두 측정과 관련된다. 거시 세계의 측정에서는 측정 대상의 상태가 측정하는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여기서 “객관적”이라고 한 것은 측정 대상 자체의 물리량이 측정 행위와 상관없이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당연해 보이는 측정의 전제 조건이 거시 세계와 달리 양자 세계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양자암호(quantum cryptography)는 측정 행위가 양자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두 사람이 양자통신을 하는데, 이들이 주고받는 양자를 가로채서 통신 내용을 도청하려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측정하면서 측정 대상을 변화시키지 않으려면 어떤 측정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정보를 아는 사람이 양자통신을 하는 두 사람뿐이라면, 도청자가 양자를 가로채서 측정하더라도 정보를 알아낼 수 없다. 더구나 측정은 양자 상태를 변화시키는 흔적을 남긴다. 이 흔적으로 도청되는지를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으므로, 완벽하게 안전한 양자 암호통신이 가능해진다.

측정으로 변하는 측정 대상

 양자의 세계에서는 측정 대상을 변화시키지 않고 측정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원리적으로 보여준 것이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다. 광자가 진동 방향을 바꾸지 않고 편광판을 통과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고 양자통신 내용을 도청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전자의 위치를 명확하게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양자역학에서는 전자의 위치를 명확하게 알려는 시도 자체를 아예 포기한다. 그러므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과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의 궤적은전혀 다르다. 행성의 위치는 뉴턴역학을 모르더라도 과거의 관측 자료만 있으면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다. 반면 전자의 위치를 아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양자역학은 전자의 위치를 전자구름(electron cloud)과 같은 확률 분포로만 표시한다.

이중성

 양자역학의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duality)도 측정과 관련된다. 빛은 간섭과 회절을 하므로, 20세기 이전에는 파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흑체복사, 광전 효과, 컴퓨턴 효과에서는 빛이 입자처럼 행동한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런 경우에는 빛이 알갱이처럼 행동하지만, 일반적인 다른 경우에는 예전에 알려진 대로 파동처럼 행동한다.
 이런 상황은 예전에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이미 알려진 대로 입자처럼 행동하지만, 특별한 상황이 되면 파동의 특성을 보인다.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는 어떤 상황에서는 파동처럼 행동하고, 파동이라고 생각했던 빛은 어떤 상황에서는 입자처럼 행동한다. 이를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이라고 한다.

양자 상태 : 빨간 사과는 빨간가?

 지금까지 소개했던 내용을 양자 상태(state)와 관련해 살펴보자. 측정 대상의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양자 상태는 고전 물리학이나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상태와는 상당히 다르다. 고전적 대상은 측정하더라도 그 상태가 변하지 않는다. 은행 잔고를 확인할 때, 확인 수수료 이상으로 잔고가 달라지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다. 양자 상태는 그렇지 않다.
 측정이 양자 상태를 바꾸는 것은 양자 암호통신이나, 편광, 이중성, 스핀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양자통신에서 측정 정보를 모르고 측정하면 양자 상태가 달라진다. 편광판은 광자의 진동 방향을 바꾼다. 파동처럼 행동하던 광자는 상황에 따라 입자처럼 행동한다. 입자처럼 행동하던 전자는 상황에 따라 파동처럼 행동한다.

측정의 한계

 양자가 상황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는 것은 측정이 측정 대상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양자 상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대상이 어떤 것일지를 말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편광의 예를 통해 살펴보자. 편광 측정을 한 다음 광자가 위아래 방향으로 진동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우리는 그 광자가 위아래 방향으로 진동하는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동-서) 방향으로 진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동서 방향으로 진동하는 가능성을 배제할 뿐, 대각선 방향으로 어떻게 진동하는지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과일이 붉다는 것은 그 과일이 파랗지 않다는 것일 뿐, 동그란지 아니면 길쭉한지를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양자역학은 위아래와 동서 중에 어느 방향으로 진동하는지를 알기 위해 위아래, 동서를 측정할 때는 대각선 방향의 진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수학적 구조의 특성상 불가능하다. 오히려 위아래, 동서 방향의 진동을 정확하게 알면 알수록, 대각선 방향의 진동에 대해서는 점점 더 모르게 된다. 위아래로 진동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면 알수록, 대각선 진동의 불확실성은 점점 더 커진다. 불확정성 원리 때문이다.

마음이 그린 상태

 측정은 측정 대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양자역학의 측정은 우리가 보려고 하는 어느 한 면만을 보여준다. 그 한 면을 완벽하게 알게 되면, 다른 면을 완벽하게 모르게 된다. 어느 한 면에 대해 확실한 정보를 얻게 되면, 이미 알고 있던 다른 면에 대한 정보는 완벽하게 지워진다. 결국, 양자 상태란 측정 대상의 전반적인 상태가 아니라 어느 한 면의 정보를 나타낸 것이고, 그나마 다른 측정을 하면 그 정보가 지워지는 상태다. 측정 주관과 분리된 대상의 객관적인 상태가 아니다. 양자 상태란 측정 대상 자체의 상태가 아니라, 측정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측정 주관이 판단한 것을 측정 대상에게 규정한 것이다. 우리 마음이 그린 것을 대상에 부여한 것이다.

세간

 대상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는 게 양자역학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도 마찬가지다. 사과를 보면서 우리는 사과가 빨갛다고 한다. 양자역학의 용어를 빌린다면 사과는 빨간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과는 정말 빨간가? 아니다. 사과의 표면에서 빨간색 파장의 전자기파가 나왔을 뿐이다. 그 전자기파가 우리 눈의 망막을 자극하고, 그 자극이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고, 이를 우리 뇌가 빨간색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사과가 빨갛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사과가 빨갛다고 그린 것이다.
 사과는 빨간색이었던 적이 없다. 우리 뇌가 빨갛다고 그렸고, 우리가 빨갛다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빨갛다고 말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전자와 광자도 파동이었던 적도 없고 입자였던 적도 없다. 우리가 파동과 입자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파동으로 보이면 파동이라고 하고 입자로 보이면 입자라고 했을 뿐이다. 단지, 우리 마음이 파동이나 입자라고 그렸을 뿐이다.
 불교에서 세간(世間)이란 우리 마음이 그린 세계다. 우리가 사는 곳은 우주가 아니라 세간이다. 『화엄경』의 게송으로 글을 맺는다.

약인지심行(若人知心行) 보조제세간(普造諸世間)

마음이 움직여 모든 세간을 두루 짓는다는 것을 안다면

시인즉견불(是人卽見佛) 요불진실성(了佛眞實性)

이 사람은 바로 부처를 본 것이고 부처의 참 성품을 깨달아 안 것이다 .


양형진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와 신시내티대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고려대 과학기술대학 디스플레이・반도체물리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산하대지가 참 빛이다(과학으로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과학으로 세상 보기』가 있고, 『놀라운 대칭성』, 『과학의 합리성』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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