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재가열전|세속에 핀 연꽃
김형효 거사
“나는 머리 안 깎은 중이다”
철학을 넘어 불교로 가다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보편적 진리가 따로 있고 그것이 도덕과 정의의 원천이라 믿는 철학자들에게 애국심은 부차적이다. 애국심은 보편적 진리가 아닌 특정 국가의 특수한 현실에 대한 집착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형효(1940~2018) 선생님의 경우는 달랐다. 선생님은 처음 철학적 사유의 길에 들어설 때부터 안으로는 자신을 정신적으로 구원해줄 진리가 무언지를 찾으면서 동시에 밖으로는 힘없고 가난한 조국의 현실에 대해 가슴 아파하면서 극복의 현실적 방안을 찾았다.
선생님이 평생 고민했던 안과 밖의 두 가지 문제는 선생님만의 화두는 아니었다. 1904년 한성감옥에 갇힌 젊은 이승만은 “내 나라를 구하고 내 영혼을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승만이 찾은 해답은 시종일관 기독교였다. 선생님의 서울대 철학과 시절의 은사 박종홍은 향내와 향외로 철학적 사유의 길을 나눈 다음 통합의 길을 모색한 바 있다. 박종홍이 찾은 해답은 유교와 실용과 국가의 다소 모호한 종합이었다. 이 두 선각자들과는 달리 김형효 선생님이 찾은 해답은 불교였다.
선생님이 불교에 귀의한 것은 1990년대 중반 그러니까 5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러서였다. 당시 선생님은 사모님과 함께 탄허 스님의 제자 혜거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금강선원을 찾아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그 후 염불과 참선은 선생님의 생활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선생님은 오전 9시 조금 넘어 연구실에 나오면 제일 먼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했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여기는 제자들에게 선생님은 말했다. “나는 머리 안 깎은 중이다.” 선생님은 이미 철학자이기보다 수행자였다.
선생님이 불교에 귀의한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애국심에서 비롯된 선생님의 현실 참여는 1980년대 말 좌절로 끝났고 선생님은 철학계와 지식인 사회로부터 손가락질받는 죄인이 되었다. 2005년 정년할 때까지 극소수의 친한 사람들 외에 아무도 선생님을 찾지 않았다. 선생님은 자신의 연구실에 유폐되어 사실상 유배 생활을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유신 잔당”이 왜 거기 있느냐고 묻는 힘센 정치인들이 많았다. 실질적인 신변의 위협이었다. 하지만 더 힘든 것은 내면의 괴로움이었다.
선생님의 애국 활동은 국가의 특수한 현실보다는 보편적 진리를 앞세우는 철학도와 지식인들의 눈에는 도덕과 정의에 위배되는 독재 정권을 위한 부역 행위였다. 과연 이게 정말일까. 선생님이 정말 그랬을까. 정말 타도해야 할 독재 정권이 있었고 선생님은 정말 권력욕에 눈이 멀어 부역 행위를 했던 것일까. 혹시 철학자들이 믿어온 이른바 보편적 진리가 도덕과 정의의 이름으로 우리 현대사와 선생님에게 폭력을 가했던 것은 아닐까. 구체적 현실을 무시하면 진리도 도덕도 정의도 결국 다 폭력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어쩌면 애당초 철학 자체가 폭력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왼쪽으로 기울어진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는 아무도 선생님을 위해 그런 물음을 물어주지는 않았다. 선생님의 애국 활동은 덮어놓고 죄악이었다. 연구실 바로 앞에서 학생들이 “어용 교수 물러나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듣던 그 학생들이었다. 민주를 명분으로 내세운 그들의 폭력을 동료 교수들은 말리지 않았다. 선생님의 덕을 보았던 사람들마저 선생님을 외면했다. 인간에 대해 절망해야 했다.
선생님은 형언할 수 없는 내면의 괴로움에 시달렸다. 그리고 사유했다. 철학적 사유 외에 의지할 데라고는 없었다. 선생님은 근본적인 물음들을 다시 물었다. 도대체 보편적 진리라 할 만한 것이 있기나 한가. 도대체 불변의 도덕적 선과 불변의 사회적 정의라고 할 만한 것이 있기나 한가. 아마도 선생님은 인간에 대한 절망 속에서 내면의 괴로움과 싸우면서 온 힘을 다해 그런 물음들을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1980년대 말 이후 선생님의 후기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다.
인간에 대한 절망과 보편적 진리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된 선생님의 후기 철학적 사유는 인간을 해체하고 철학을 해체하고 도덕과 정의를 멀리 떠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선생님은 청계산 밑 연구실에 유폐된 상태에서 그런 방향으로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밤낮없이 철학적 사유의 편력 여행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무게 있는 철학적 저술을 여러 권 펴냈지만 마지막 종착역은 인간과 세계, 철학과 진리를 남김없이 다 해체해 공(空)으로 돌아가는 불교였다. 해체의 정점에서 만나게 되는 공 혹은 무(無) 속에 선생님의 만년의 철학적 사유와 실천 수행이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뜻밖에도 선생님이 불교에 안착해 당신의 마음이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플라톤 이후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은 하이데거로부터 왔다. 선생님이 젊은 시절 너무 난해해서 접어두었던 하이데거에 대해 다시 눈을 뜨게 된 것은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알고 난 다음이었다. 해체주의의 원조는 하이데거였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들이 얽히고설켜 돌아가는 변화의 세계,
김형효 선생님은 불교에서 자신을 정신적으로 구원하는 길을 찾는 동시에
세상을 물질적으로 구원하는 길을 찾았다. 젊은 시절부터 고민했던
안과 밖의 두 가지 문제를 불교가 다 해결해준 셈이다.
즉 시간의 세계 너머에 따로 불변의 영원한 보편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보지 않았다. 『존재와 시간』은 “시간이 곧 존재”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또한 하이데거는 “존재는 무(無)”라고도 말했다. “철학의 종언”을 선언한 하이데거의 사유는 노장(老莊)과도 흡사했지만 무엇보다 불교와 흡사했다. 존재자들이 얽히고설켜 돌아가는 시간의 세계는 연기(緣起)의 세계와 다르지 않고, “존재는 무”라는 말은 “연기가 곧 공”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이데거는 보편적 진리 따위는 없다고 여겼으니 도덕이나 정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불교와 노장 역시 그렇다. 유학자들은 불교와 노장을 패륜으로 평가하는데 옳은 평가다. 선생님은 불교와 노장으로 하이데거를 해석하고 하이데거로 불교와 노장을 해석했다. 이것이 선생님의 후기 철학적 사유의 핵심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나 노장에는 해체주의적 언설이 풍부한 반면 수행론이 거의 없다. 선생님은 해체주의적 언설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의 수행론에 따라 실제로 무를 체득하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수행에 열심이었다. 마음을 비워 무를 체득하려면 먼저 소유의 무상(無常)함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소유물 가운데 최대의 것은
자신의 생명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명상하기”를 추천한다. 죽음을 생각하면 내 모든 소유는 덧없어지고 내 마음은 무를 닮아갈 것이다. 만년의 선생님은 염불과 참선으로 깨달음을 얻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철학적 사유로는 깨닫기 어렵다고 보았다. 20종이 넘는 저술을 남겼지만 그걸 자랑스럽게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년으로 갈수록 선생님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겸양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무아에 근접한 징표인 듯했다. 선생님이 정말 반야의 지혜를 얻어 삼라만상이 다 부처임을 깨달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년의 어느 날 선생님은 문득 “모든 것이 다 좋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다 좋다면 존재와 소유를 구별하고 본성과 본능을 구별하던 선생님의 만년의 철학적 사유까지 무효화된다. 물론 선과 악의 구별, 정의와 불의의 구별도 무효화된다.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 5년 정도 치매 상태였지만 뵐 때마다 늘 아무 말없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우리 제자들은 게을러서 선생님의 언설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선생님의 그 미소만큼은 잘 기억한다. 치매는 코기토의 불능 상태 혹은 사유의 죽음이다. 얼핏 보면 치매는 철학적 사유마저 여읜 무념무상(無念無想)과도 닮았다. 마음이 무념무상이면 마치 텅 빈 거울처럼 선악미추를 가리지 않고 뭐든 다 좋다고 받아들인다. 이때 미소는 일체 긍정의 신체적 표현이다. 선생님의 그 미소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무심으로 돌아감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님을 특히 강조했다. 노자는 “무에서 유가 나온다”고 말했다. 선생님 또한 무심으로부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행을 가능케 해주는 무진장의 힘이 솟아 나온다고 말했다. 인간은 누구나 도덕과 정의보다는 이익을 더 좋아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만년의 선생님은 이기적 본능을 자리이타적 본성으로 바꾸기만 하면 그것이 보살행이라고 역설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불교를 “본성의 실용주의”라 불렀다. 선생님은 불교가 세계 도피적 허학(虛學)이 아니라 21세기에 꼭 필요한 “새로운 실학(實學)”이라 여겼다. 시의적절한 진취적 불교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선생님은 불교에서 자신을 정신적으로 구원하는 길을 찾는 동시에 세상을 물질적으로 구원하는 길을 찾았다. 젊은 시절부터 선생님이 고민했던 안과 밖의 두 가지 문제를 불교가 다 해결해준 셈이다. 만년으로 갈수록 진리와 도덕과 정의를 주장해온 재래의 철학에 대한 선생님의 절망은 더욱 깊어졌다. 반면 불교가 “마음의 가난”과 함께 “물질적 복락”까지 가져다준다는 선생님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불교가 나를 구하고 세상을 구한다는 선생님의 말은 이론적 성찰보다는 실천적 수행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더 설득력 있게 들렸다.
만년의 선생님은 진짜로 “머리 안 깎은 중”이었다. 2018년 2월 어느 날 선생님의 부음을 듣자 김홍도가 만년에 그린 「염불서승도(念佛西昇圖)」가 떠올랐다. 이 그림을 보면 머리를 깔끔하게 깎은 스님 한 분이 연꽃무늬의 구름을 타고 둥그런 달빛 속에서 세상을 등진 채 서쪽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그 스님이 바로 선생님인 듯했다. 특히 그 스님의 뒷모습과 여윈 목덜미가 선생님과 비슷했다. 약간은 눈물겨웠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예상한 탓도 있지만 그림 속 스님처럼 해탈하셨는데 뭐가 슬프겠는가.
최진덕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학부 철학교수를 거쳐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문학, 철학, 그리고 유학』, 『민본주의를 넘어서: 동양의 민본사상과 새로운 공동체 모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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