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란 무엇인가 | 불교, A에서 Z까지
불교란 무엇인가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회장
이번 호부터 격월로 연재하는 <불교란 무엇인가 - 불교, A에서 Z까지>는 불교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불교를 기초부터 공부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한 코너이다.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를 한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불교는 그 역사성과 지역성, 그리고 교리의 다양함으로 인해 보는 각도에 따라 할 말이 너무 많은 종교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인류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큰 깨달음을 얻은 샤카무니 붓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2,500여 년 전 일이다. 종교의 보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한 종교가 2,500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이렇게 긴 세월 동안 발상지인 인도를 벗어나 주위의 여러 나라로 전파되면서 각 나라의 특성을 반영해 변형이 되었으리라는 것도 짐작이 된다. 더구나 불교는 다른 종교나 사상에 대해 포용하고 관용하는 넉넉함이 있기 때문에 외양적인 신행의 모습은 물론 교리적 다양함에서도 다른 종교를 훌쩍 뛰어넘는다.
우선 불교를 신앙적으로 그리고 수행적으로, 마지막으로 학문적으로 그 넓이와 깊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는 긴 역사와 폭넓게 확산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서 교리는 물론 신행 행태에 있어서도 실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수행 면에서도 불교는 다른 종교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 종교를 만든 교주나 자기들의 하나뿐인 신앙 대상에 예배하고 기도만 하면 되는 그런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불교는 수행 방식이 실로 다양하다. 절을 하고 참선하는 것 이외에도 염불이나 진언 염송, 독경, 사경, 혹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위빠사나나 사마타 수행 등등 실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선의 종류에도 간화선, 묵조선, 조사선 등등 그 종류가 무수히 많다. 또한 불교의 마지막 버전인 밀교에서는 더욱 다양한 수행 형태를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각자의 근기에 맞게 시설된 수행 형태로서 아픈 사람의 체질에 맞게 약을 주는 한의약처럼 응병여약(應病與藥)의 장점을 발휘하지만 종교적 카리스마를 약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점은 한국 불교가 1,700년이라는 역사적 후광 효과에도 타 종교와 비교해 열세를 면하지 못하는 원인의 일부일 수도 있다.
학문적으로 불교에 접근하는 것은 더 어렵다.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우리와 가장 친숙한 한문 이외에도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와 일본어, 영어, 중국어 등의 보조 언어가 필요하다. 읽어야 할 경전들도 근본 경전인 『아함경』을 비롯해 『반야경』, 『화엄경』, 『법화경』, 『정토경』 등 무수한 대승 경전과 수많은 밀교 경전 및 논서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처럼 방대한 불교의 모습에 압도되고 만다. 그래서 학자들조차도 불교라는 실체에 대해 한마디로 단언을 내리는 것을 망설인다. 그러니 일반 사람들이 불교를 어렵다고 느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불교의 본질을 알고 나면 너무나 쉬운 것이 불교이기도 하다.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괴로움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해탈, 혹은 열반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깨침,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얻는다는 의미이다.
‘불교’라는 말은 곧 불(佛)의 가르침[교(敎)]이다. ‘불’이라는 것은 깨달은 사람, 혹은 눈뜬 사람이라는 의미의 인도말 붓다(Buddha)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이다. 붓다라는 말을 처음에 한자로 음사할 때는 ‘불타(佛陀)’라고 적었다. 우리말의 ‘부처’도 이 ‘불타’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불타가 나중에는 ‘불’로 생략되어 부르게 된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영원성과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옛날에는 맞는 말 같았지만 지금은 맞지 않다면 그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자기들 신을 믿는 자에게는 해당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교리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러한 면에서 불교는 감히 진리라고 자부할 수 있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의 이성이 합리적이 되면 될수록 더욱 빛나는 것이 불교의 진리이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거기에서 거기가 아닌가, 결국은 다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종교에도 정교와 사교가 있다. 사교의 가장 큰 특징이 그릇된 교리에 있다는
불교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뛰어넘는 기적을 말하지 않는다.
기적을 제공하는 신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불교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방법을 실현하기 위한 지혜를 말할 뿐이다.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교리가 진리에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리는 일은 쉽지 않다. 종교라고 하면 믿음[信], 혹은 신앙이 필수적이다. 어떤 종교라도 믿음을 빼고는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이 그릇된 교리이든 이치에 합당한 교리이든 자기의 종교로 선택한 이상은 그 종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을 믿는다. 이러한 점에서는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불교에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승가의 이른바 삼보에 대한 절대적인 귀의도 믿음에 기초한다. 그러나 믿음이라고 해도 어떤 것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바른 믿음도 되고 그렇지 못한 믿음도 된다.
그릇된 믿음과 종교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이 발목을 잡고 많은 비극을 낳는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선택했던 종교가 그릇된 믿음을 강요하고 그것 때문에 불행해진다면 그러한 믿음이나 종교는 없는 것이 도리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교의 믿음은 미신도 아니고 맹신도 아니다. 불교의 교리는 과학적으로도 입증될 수 있는 진리이고, 누구나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어보면 스스로 알 수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뛰어넘는 기적을 말하지 않는다. 기적을 제공하는 신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불교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방법을 실현하기 위한 지혜를 말할 뿐이다. 그것은 사후의 세계에 대한 것도 아니고 신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의 인간으로서, 살아 있는 중생으로서의 나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대상으로 사유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믿음을 말하되 무조건 믿는 것을 배격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는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믿음, 혹은 신(信)이라는 말을 쓰며, 신심(信心)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다 같은 믿음이라도 무엇을 어떻게 믿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른 진리를 바르게 믿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종교에서는 그들의 불합리한 교리를 얼버무리기 위해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맹신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맹신의 태도는 철저히 배척된다. 불교에서는 많은 경전을 인도 고대의 아어(雅語)인 산스크리트어(Saṃskṛta)로 기록했는데 이것을 범어(梵語)라고도 한다. 이 산스크리트어의 믿음에 해당하는 말의 원어는 스라다(śraddhā), 혹은 프라사다(prasāda)이다. 이것은 ‘가르침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해 받아들이며 또 그 결과 마음이 청정하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의 믿음은 진리에 바탕을 둔 이지적인 면이 강한 믿음이다. 단순히 자기의 감정이 내키는 대로 무조건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의 내용을 따져보고 이해한 다음에 믿겠다는 것이 불교의 믿음이다.
불교에서의 이러한 믿음의 대상이 곧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라는 것이다. 삼보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또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집단인 승가를 가장 귀중한 세 가지의 보배로 여긴다는 뜻이다. 이처럼 삼보나 실천 방도로서의 계행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 불교이다. 지혜의 개발로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 우리는 해탈(解脫)했다, 열반(涅槃)에 들었다, 성불(成佛)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것은 고통, 혹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른 말로 깨달음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모르는 중생의 근본무명(根本無明)에서 모든 괴로움이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에 무명을 깨뜨리는 지혜의 획득을 불교의 궁극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 있어서의 지혜는 입문에서 해탈의 그 순간까지 일관해 강조되고 있다. 지혜가 결여된 믿음이 곧 미신이고 맹신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이라는 불교의 논서에는 “불법의 큰 바다를 믿음으로 들어가서 지혜로써 건넌다”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도 믿음을 중시하지만, 그 믿음은 미신이나 맹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지혜를 얻기 위한 진리에 대한 믿음이다. 불교에서의 지혜는 삼보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청정한 계행과 마음을 고요히 해 진리를 관조하는 선정을 통해 획득된다. 다른 종교에서처럼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성찰과 그릇된 행위에 대한 제어를 통해 진리를 확인하고 검증하면서 지혜를 체득해나가는 것, 이것이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무조건 믿는 종교가 아니라 지혜를 밝혀 괴로움의 근원을 제거하고자 하는 종교이다. 지혜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다른 어느 종교에서보다도 불교는 지혜를 강조하고 있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철학 박사). 전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불교총지종 중앙교육원 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불교총지종 정사이면서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근본불교개설』, 『현대인을 위한 불교 입문』, 『불교 교양으로 읽다』, 『내 인생의 멘토 붓다』, 『관세음보살 예찬문』, 『초발심자경문』, 『대일경 주심품』, 『생활불교, 재가불교』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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