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열어 꿈을 응원하다
청년 구직자에게 정장(正裝) 대여해주는
비영리단체 ‘열린옷장’
서울 광진구 화양동에는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옷장’이 있다. 여간해서는 손이 가지 않는 셔츠나 블라우스, 타이와 구두로 가득 찬 ‘정장 전용’ 옷장이다. 합격하면 마르고 닳도록 입겠다며 큰맘 먹고 산 정장, 상기된 얼굴로 인생 첫 면접을 치렀을 때 입었던 정장, 취업 후 한쪽 구석에 고이 모셔져 나프탈렌 냄새가 밸 때까지 까맣게 잊고 마는 정장들이 다시 태어나는 옷장. 사회 선배의 정장을 기증 받아 청년 구직자에게 대여해주는 비영리단체인 ‘열린옷장’(서울시 광진구 소재)의 문을 살짝 두드려보았다.
2호선 건대입구역에 내려 5분 정도 걸으니,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5층짜리 건물 입구에 세워진 노란 안내판이 보였다. 따라 올라가니 대여를 전담하는 5층 사무실에서는 옷장 주인 김소령 대표가 대여자의 신체 사이즈에 맞는 정장을 골라주기 위해 줄자로 가슴둘레를 재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민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민간 연구소인 ‘희망제작소’가 운영하는 단기 프로그램에서 현재 ‘열린옷장’의 두 대표(김소령, 한만일)와 아이디어 제공자인 또 다른 친구가 만났다. 면접 보러 가는 대학생들에게 안 입는 정장을 빌려주고 싶다고 무심히 털어놓은 한마디가 사회 혁신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프로그램 과제를 거쳐 사업 계획으로 발전하기까지 채 반년도 걸리지 않았다.
공동 사무 공간을 제공하는 업체 ‘코업’에서 한 칸짜리 행어를 둘 만한 공간을 내주었고, 두 대표가 옷장을 뒤져 안 입는 정장들을 세탁해 걸었다. 처음에는 한 달에 열 벌 대여할까 말까 했지만 라디오 방송 등 전파를 타며 기증되는 옷들이 하나씩 늘어났고, 행어도 하나둘 늘며 지금의 화양동 사무실로 이전하게 되었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했던 김소령 대표와 침구회사의 영업기획팀에 있었던 한만일 대표는 사직서를 내고 주말에만 운영하던 ‘열린옷장’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해 겨울에는 TV에 소개된 ‘열린옷장’을 보고 자원봉사를 자청한 청년도 있었다. ‘열린옷장’의 빈틈없는 살림꾼인 정선경 씨는 그때부터 쭉 옷장지기를 자처하고 있다.
“우연히 다큐멘터리를 보고 메일을 보내 자원봉사자로 일하게 됐어요. 이곳에 오는 자원봉사자들 대부분은 같은 처지의 구직자를 돕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지만, 평일 오후나 주말을 쪼개 일손을 돕는 직장인들도 있지요.”
대여하는 옷 정리를 다 마치지 못하면 야근을 하기도 하고, 크게 복지 헤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봉사자들의 마음 씀씀이와 대여자들의 감사 메시지에 다시금 열의가 솟는다는 선경 씨. 단순히 옷을 빌려주는 업체라면 많지만, 빌려준 사람들, 빌려 간 사람들이 응원과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는 곳은 ‘열린옷장’이 유일하다.
“저희는 옷을 기증 받을 때 옷에 담긴 사연을 함께 받아요. 옷에 담긴 추억, 도전을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응원의 메시지 등을 옷과 함께 공유하는 거죠. 한 벌의 정장에는 사회 선배인 기증자의 경험과 에너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거든요. 청년 구직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위로와 응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30년 전 첫 출근 때 입었던 정장을 보내는 중년의 직장인부터, 이 옷을 입고 합격했으니 좋은 기운을 나눠 주고 싶다며 새것과 다름없는 정장을 기증하는 사회 초년생까지, 수십 개의 행어에 가득 걸린 정장은 한 벌 한 벌이 한 편의 짧은 소설과 같다. 각각의 사연들은 대여자의 사이즈에 맞는 옷을 골라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 치수와 함께 저장되고, 옷을 빌려 간 대여자들이 손으로 직접 써 내려간 감사 메시지들은 차곡차곡 모여 연 1회 기증자에게 전달된다.
“이렇게 모인 감사 메시지만 수천 장이 넘어요. 메시지를 발송하고 나면 재기증이 많이 들어와요. 내 옷 입고 합격했다, 아버지 장례식에 잘 다녀왔다, 이런 얘기들이 들리니 뿌듯한 거죠.”
김소령 대표는 이런 응원과 감사의 메시지들이 의외의 효과를 낳기도 한다고 전했다. 바로 손상돼 돌아오는 정장 수가 줄어든 것. 옷에 관한 사연을 읽은 대여자들이 기증자의 추억을 훼손하지 말아야겠다, 이 옷은 나 같은 사람이 또 필요로 할 것이라는 책임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기증된 옷을 요즘 유행에 맞게 수선하고, 깨끗이 세탁해 조향사 노인호 씨의 ‘재능 기부’로 완성된 시트러스 향의 향수와 포장하면 대여 준비 완료. 사업 초반부터 좋은 기운을 나누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며 지금까지 자비를 들여 향수를 기부하는 노인호 씨의 진심이 대여자들에게도 전해졌는지, 향수만 조심스럽게 더 요청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기증자 분들은 소중한 옷이니까 소중한 곳에 쓰였으면 한다는 좋은 뜻으로 보내지만, 모든 옷을 다 쓸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다른 업체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돈이지만 대여비를 받고 있고. 제대로 된 정장을 제공하려면 냉정하게 분류해야 돼요. 그래서 수선으로도 구제할 수 없는 낡은 옷은 제3세계에 의류를 지원하는 비영리 민간 단체인 ‘옷캔’에 보내요. 기증된 모든 옷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5,000원짜리 행어 하나에서 출발해 지구 반대편에까지 활짝 열린 옷장을 만든 소령 씨의 일에 대한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정장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여기도 없어지는 게 맞겠죠. 남들이 필요로 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에요.“
면접뿐 아니라 결혼식, 영화 촬영 등 다양한 상황에서 ‘열린옷장’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소령 씨는 덧붙였다. 얼마 전에는 출연을 약속한 유명 배우의 의상비를 고민하다 뛰어 온 독립영화 감독도 있었고, 학생 신분으로 칸 영화제에 출품하게 된 청년들이 레드 카펫에서 입을 정장을 빌리러 오기도 했다고.
성공 가도를 달리던 카피라이터 자리를 박차고 나와 비영리단체를 설립하기까지 두렵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에, 소령 씨는 ‘뭔가에 중독된 것 같아서’ 겁이 나지 않았다고 빙그레 웃었다. ‘열린옷장’을 그 이름처럼 모두에게 열린 옷장으로 만들고 싶다고,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걱정되면서도 내일도 이 옷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에너지가 솟는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 옷장 속에 잠든 새로운 시작을 꺼내기에 이보다 적당한 사람이 있을까. ‘열린옷장’을 찾은 청년 구직자들은 묵은 옷을 깨끗이 손질해 행어에 걸었던 따스한 초심, 한 줄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직접 인생의 행로를 바꾼 옷장지기 자신의 반짝이는 용기까지 함께 받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정언(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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