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만나 걷게 된 상담의 길 | 나의 불교 이야기

나의 불교 이야기


불교를 만나 

걷게 된 상담의 길


황수경 

동국대학교 명상심리상담학과 겸임교수


황수경, 동국대 명상심리상담학과 겸임교수, 대원아카데미 교수, 미국 AAPC 전문 심리치료사,
한마음과학원 교육정책 실장. 불교여성개발원 이사, 불교상담개발원 이사
 


마음 아픈 시절

인생이 고(苦)라는 사실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처음 알게 되었다. 1970년대 초반, 당시는 초등학교도 무료 교육이 아니었고, 요즘의 등록금에 해당하는 육성회비라는 것을 내야 했다. 서울이 고향인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그 돈을 제때 내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은 육성회비를 못 낸 친구들을 수업 시간에 호명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다. 어떤 때는 수업 중에 그대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가서 육성회비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그런 일은 매달 반복되었다. 

어린 마음에도 친구들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면서 놀랐다. 왜 선생님은 공부를 잘하라고 하기보다, 돈 때문에 우리를 야단치시는 것일까? 부모님도 안 주는 것이 아니라 못 주는 것일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무척이나 화가 나고 슬펐다. 다행히도 우리 집은 넉넉한 편이었기 때문에 내 이름이 불린 적은 없었다. 그래도 바로 옆의 친구들이 당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도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고 배고픈 친구들도 많았다. 막연하게나마 가난이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고, 친구들의 사정은 살피지 않고 무조건 야단치시는 선생님들 때문에 분개하게 되었다.

‘인생은 불평등하고 고통스럽다’라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려운 친구들과 도시락을 나누어 먹거나 공부나 무엇이든 도울 일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돕는 일이었다. 적어도 바로 옆 친구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나만 생각하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 후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 대학원에 가도 언제나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이 있었고 슬픔은 늘 마음 한쪽에 자리 잡았다.  

역사를 공부하고 싶어서 이화여대 사학과에 입학했지만, 곧 야학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공장의 여공들이 밤에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는 대학생 서클이었다. 주로 농어촌에서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10대 여공들이었다. 어린 소녀들이 공부하고 싶어도 못 하고 종일 일만 하다가 지친 몸으로 밤에 공부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3학년까지 대학 생활보다는 야학에 전념했다. 사회를 바꾸려면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대학원에서는 교육사회학을 전공했다. 석사 졸업 후에는 잠시 미국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그런데 복지 공부를 하면서도 항상 뭔가가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복지제도를 잘하고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어도, 사람들의 정신까지 도와줄 수는 없었다. 바로 마음이 근본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교도소의 부처님

30대 초반에 힘든 일이 있어서 방황하고 있을 때 대행 스님(1927~2012)의 법문을 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불교는 막연히 절하고 기도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대행 스님께서는 불교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 과학과 같은 것이고 각 분야에서 마음의 원리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라고 ‘한마음과학원’을 세우셨다. (1996년, ‘한마음심성과학연구원’으로 출범). 절 안에 ‘과학원’이 있고 교수, 박사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이 신선하고 감사했다. 

불교보다 귀한 공부는 없다고 생각해서 박사 과정은 동국대 선학과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책만 보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교도소, 특히 사형수 상담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박사 과정에 들어가면 하던 일도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해야 할 것 같은데 나의 경우는 거꾸로 되어버렸다. 교도소, 군부대 등을 다니다 보니 상담 공부의 필요성이 절실해져서 전문 심리 치료 과정도 따로 몇 년간 이수했다. 사회에서도 명상과 힐링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상담 관련 강좌들이 많아지고 동국대에서 불교(명상) 상담을 강의하게 되었다. 

교도소에 다니면서 가장 감사했던 일은 “누구나 근본은 부처”라는 것을 실감했다는 점이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고 자타불이(自他不二)라고 하지만, 분별하고 차별하는 가치관 속에서 소위 악업중생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 역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런데 사형수 불자들과 청송교도소 등의 재소자들을 만나면서, 사람은 누구나 근본 마음은 똑같이 선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완전히 악한 의식으로 굳어져서 포기해야 할 것 같은 사람의 마음이,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 조금씩 녹고 밝아지며 남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바뀔 때, 그럴 때는 마음에 빛이 환히 비추는 것 같고, 내 가슴의 단단한 업식들도 함께 녹는 것 같았다. 물론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실망과 좌절도 컸다. 교도소에서 접한 여러 일들 덕분에 인생과 사람에 대해 배울 수 있었으니 봉사가 아니라 모두 나 자신을 위한 공부 과정이었다. 


서로 축원하는 마음

상담 강의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통해서도 마음이 변화하는 희망을 보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존중받지 못하는 마음’이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경시와 차별이 당연시되는 가치관 때문에 누구나 상처받고 있다. 그래서 강의할 때는 이론보다도 마음의 변화와 실천이 가능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차이는 있지만 차별은 없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근본이 되도록 한다. 시험 때가 되어 점수와 경쟁에 불안한 학생들에게는 “서로 시험 잘 보라고 축원을 보내주세요”라고 하면서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하고, 왜 성공해야 할까요? 우리는 연기법으로 모두가 연결된 존재입니다. 자기만 잘되려는 마음보다는 모두가 잘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만 시험 잘 보겠다는 작은 마음을 갖지 마시고, 모두 잘하자고 합시다. 그리고 시험 결과는 노력에 따라 공정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서로 좋은 마음을 내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학생들은 처음에 어색해한다. 어릴 때부터 학교나 가정에서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연습하며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청년들이 나중에 성공해서 지위와 돈이 주어진다고 해서 갑자기 타인이나 국민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자기만 생각하고 경쟁하며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이 사회의 지도자가 된다면 결과는 어떨 것인가. 불교의 생명 존중 사상과 상호 존중의 가치관은 일상생활 속에서 연습이 필요하며 이에 불교 교육의 역할은 지대한 것이다. 

현대의 호국 불교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국민의 정신 차원을 높이는 것이 진정한 호국이 될 수 있다. 코로나 위기, 환경 문제와 기후변화, 인간 소외 문제 속에서 이제 불교의 자타불이와 공생(共生)의 가치관은 지구 생존에도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세계 불사를 발원하며

한마음선원의 대행 스님은 나에게는 자비의 화신이셨다. 처음 뵈었을 때, 저절로 눈물이 나면서 목 놓아 울게 되어 거의 아무 말도 드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후로도 뵐 때마다 눈물이 났다. 알고 보니 스님 가슴에 중생에 대한 뼈저린 눈물이 그토록이나 많으셨다. ‘불교는 과학’이라고 강조하시는 도인이나 선사라고 하면 늘 부동한 평정심을 유지하고 감정에 초탈한 분일 것이라고 상상했는데, 대행 스님께서는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함께 울어주시는 분이셨다. 스님께서는 “가슴이 아프다. 고통받는 사람들 때문에 눈물이 난다”라는 말씀을 법회 중에 정말 많이 하셨다. 경전에서만 보던 대승 보살들의 중생에 대한 끝없는 자비나 어머니 같은 보살행을 스님에게서는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집안의 몰락으로 인해서 학교 교육도 받지 못하고 가난의 처절한 고통을 겪으신 스님이셨기에 보통 사람들의 고충을 잘 아시고 계셨다. 먹고살기 바빠서 경전 공부할 시간이 없고 따로 수행할 상황이 안 되는 형편도 헤아리신 것 같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고에서 벗어나는 수행법을 알려주시려 한 것이다.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도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정신을 즉시 실천할 수 있도록 내면의 주인공(主人空)에 놓고 맡기는 수행법을 알려주셨다. 이제는 영성(靈性)의 시대이고 탈종교 시대이기 때문에 불교도 대중에게 다가가는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 타 종교인이나 외국인들도 비교적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 내면의 주인공에 놓고 맡기는 수행 방법이 더욱 많이 활용되기를 바란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신 부모님과 조상님에 대한 감사를 빼놓을 수 없다. 친가, 외가 조부모님들은 극진한 불자이셨고 어려운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우신 분들이다. 10년 넘게 딸이 사형수들을 만나고 재소자들의 편지가 집으로 계속 와도 부모님이 담담하셔서 약간 의아했었다. 알고 보니 일제 강점기 말에 독립운동 등으로 수감되셨던 분들을 할아버님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출소하시면 집으로 찾아오셨다고 한다. 조상님들의 보시행으로 고맙게 생각하는 분들의 마음이 모여 그 덕분에 자손들이 무탈하다는 말을 듣곤 했었다. 감사한 일이다. 

1950~1960년대 척박했던 국악계에서 현대적인 가야금 곡을 작곡하고 연주하신 아버지(황병기 : 1936~2018) 덕분에 어릴 때부터 가야금의 깊은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아버지의 곡들에는 한국의 전통은 물론 대표 창작곡 ‘침향무’, ‘비단길’, ‘미궁’ 등에 나타나듯이 불교의 정신과 문화가 깊게 뿌리박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한류가 부상하지만 여전히 한국 불교는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가까운 미래에 한국 불교의 사상과 문화가 세계 역사의 중심이 되길 기대해본다. 21세기 지구촌의 마음 불사를 이루는 일에 작은 역할이라도 동참해서, 적어도 부처님의 은혜를 알고 실천하는 불자가 되고 싶다. 대행 스님은 “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이 마침내 온 우주와 함께하는 한마음인 것이다”라고 하셨다. 아름다운 관세음의 선율이 사람들 마음속에 퍼져나가 모두가 행복한 붓다가 되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불국토를 꽃피우길 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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