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민주주의 :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3
불자다운 민주주의적
사고방식을 위하여
윤원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민주주의적 사고와 실천의 핵심은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있다. 자유와 평등의 구현을 궁극의 이상으로 삼으면서, 다름의 문제를 폭력적으로 해결하는 데 반대하고 평화로운 수용을 지향하는 데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
삼라만상이 다들 각자 절대적인 개체이다. 그러나 또한 갖가지 범주에서 같은 부류끼리 묶이면서 다른 부류와 구별되어 상대한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돌멩이라 싸잡아 부르는 것들은 사실은 하나하나가 다 다른 개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함께 돌멩이라고 싸잡아 불리면서 흙이나 모래와 구별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단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별개의 존재지만 인종을 단위로 묶이면서 집단적으로 다른 인종과 구별되고, 성별로 구별되기도 한다. 인종이나 성별 외에도 국적, 지역, 학벌, 직업, 나이, 종교, 정당, 각종 부문의 취향, 결혼 여부, 친족 관계 속에서의 위치 등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성립하는 다양한 정체성이 우리에게 있다.
참으로 경이롭게도 우리는 그 엄청나게 다양한 정체성들을 대체로 무난히 다소화하면서 살아내고 있다. 정체성별로 소속이 있고 다른 소속 사람들과의 ‘다름’을 통해 정체성이 다시 확인되고 강화된다. 그런데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다 보면 그 다름 때문에 불편한 일들이 생긴다. 하다못해 탕수육에 소스를 미리 다 부어놓고 먹는 걸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러면 눅눅해져서 맛이 없으니 소스를 따로 담아놓고 찍어서 먹는 걸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부먹(부어 먹기)파와 찍먹(찍어 먹기)파로 갈라져서 서로 다툰다.
그런 갈등이야 우스갯소리 수준이지만, 그 다름 때문에 불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쟁이 일어나고 끔찍한 학살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다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흔히 동원되는 방법이 폭력이다. 상대방을 강제로 굴복시켜 나에게 맞추게 함으로써 내 뜻대로 부리려는 것이다. 국제 사회에서는 제국주의나 식민주의 정복 전쟁 등이 그런 사례이고 기타 각종 집단들 사이, 또 개인 사이에서도 아주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 본격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다름을 해소하는 방법과 과정에는 자칫 어느 정도 폭력이 발휘되기 십상이다. 궁극적으로 완전히 같을 수가 없다는 게 개체와 집단들의 존재론적인 조건인데, 같아짐으로써 다름을 해소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름의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흔한 방법은 가급적 가까이 부대끼지 않고 외면하며 따로 살아가는 것이다. 부모 자식, 형제 남매 사이라 할지라도 이런저런 갈등이 해결되지 않아서 너무 불편하면 서로 안 보고 살기도 한다. 갖가지 많은 서로 다름을 안고서, 심지어 다름이 매력으로 작용해, 평생 살 비비며 살겠다는 용기를 내고 공개 서약까지 했던 부부 사이에서도 심정과 사정이 바뀌어 도무지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남남으로 떨어져 사는 일이 많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런 방법이 모든 다름의 문제에 현실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은 굳이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더욱이 위에 예로 든 부모 자식, 형제 남매 사이에 억지로 안 보고 살겠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다분히 폭력적이다. 인생살이의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이치에 대한 폭행인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또 아주 오래전부터 계급과 신분 제도를 통해서 복종 관계를 정함으로써 다름의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해왔다. 거기엔 불가피한 면도 있다. 예를 들어 군대나 직장에서는 경력과 능력에 따라 상급자와 하급자가 있어서 지휘와 복종의 질서가 서야지만 일이 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직능 발휘가 필요한 모든 조직에는 어떤 형태로든 계급 구조가 불가피하게 요청된다. 선생과 학생의 관계도 그러하고 종교 집단에서 성직자와 일반 신자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것은 다름을 폭력적으로 다스리는 데 해당하는 사례로 볼 수 없다. 계급이나 신분이라고 해서 꼭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인 평등의 이상을 배반하는 것도 아니다. 평등을 이상으로 삼는다고 해서 엄연한 본질적, 현실적 차이를 무시하거나 무화하자는 식으로 어리석은 주장을 펴는 게 민주주의의 입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급과 신분 제도는 흔히 비민주주의, 반민주주의적인 게 사실이다. 특히 계급과 신분이 세습되는 제도라면 확실히 비민주적이다. 세습된 게 아니라 직능 조직에서 경력과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계급과 신분의 차별이라 할지라도 자칫 비민주적으로 활용되는 일이 많기는 한데, 그것은 오용 내지 악용의 사례이지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인 제도라고 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태동의 요람이었다는 나라들 중에도 군주제와 귀족제가 존속하는 사례가 꽤 있어서 의아할 수 있으나, 전제군주제가 아니라 입헌군주제로, 또한 귀족이라 해도 실질적인 특권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게 아니라 상징적인 영예의 차원에서 존속할 뿐이다. 그것은 그냥 오랜 관습이 불식되기에는 긴 세월이 필요함을 방증하는 것이지 민주주의가 지원하는 제도는 아니라고 본다.
다름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다름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받아들이고 다름으로 인해 일어나는 불편함이 있다면 그 또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세상살이의 요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겠다. 말이 쉽지 그게 되겠느냐고 느낄 수도 있다. 우리는 아직도 불편해하는 다름을 어떤 사회에서는 이미 꽤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예들을 떠올리면 기운을 좀 얻을 수 있다. 워낙 다양한 피부색들이 섞여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우리가 우리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을 낯설어하고 아무 생각 없이 ‘외국인’이라고 부르는 게 오히려 의아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니 다름을 대하는 나 자신의 심사(心事)와 사고방식을 개조하도록 길게 노력하고 아울러 사회적 제도적 차원에서도 노력해가면 그게 안 될리 없다. 평생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한 어느 선배가 이야기하기를, 다름과 틀림이 다르다는 게 이제는 널리 상식으로 자리 잡았는데, 거기에는 학교 선생님들의 공도 크다고 자화자찬 격의 말씀을 한다. 아이들이 그걸 헷갈리며 잘못 말하고 쓸 때마다 선생님들이 입이 아프게 가르쳤기 때문이란다. “얘들아, 다르다와 틀리다는 틀린 거라고 했잖아! 잘 가려서 정확하게 써야지!” 그렇게 자기 자신의 말버릇조차 채 안 고쳐졌더라도, 아무튼 옳은 방향으로 가르치고 애쓰다 보면 차차 세상까지 바로잡아지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법은 불교적 행복 개념을 함축한다. 내가 행복하려면
너의 행복을 빼앗아야 하거나 너의 행복을 위해 나의 행복을 희생해야 하는
세간적인 제로섬 구도가 아니다. 이것은 다름을 평화롭게 수용하고
자유와 평등의 최대한의 현실적 구현을 위해 정진하는,
현대의 민주주의 시민 사회에서는 시민 각자가 절대적인 개체이면서도 또한 서로 상대적으로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즉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추구하며 다름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가는 과제를 실정법이라는 장치로써 풀어간다. 불자들은 다행히도 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자동적으로 민주주의에 충실하게 사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유리한 처지에 있다. 신심이 제대로 된 불자라면 자동으로 민주적일 수밖에 없다. 거꾸로 말하자면, 불자가 민주적이지 못하다면 신심이 모자라거나 잘못되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도 있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다름을 민주주의적으로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주제가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이야기하는 교리가 무수하게 전해졌지만 우선 연기법(緣起法)이 있다. 연기법은 개체들이 절대적인 존재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철저하게 상대적인 존재라는 역설적인 정체성을 한꺼번에 지니고 있으며 이를 온전하게 살아내야 할 것을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자유와 평등이라는 현실적으로는 상충되기도 하는 역설적인 가치를 함께 추구할 것을 요청한다. 또한 화엄에서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임을 말한다.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 다르다는, 민주주의 원리의 출세간적(出世間的)인 표현이다.
불교 경전에 보면 이상적인 지도자상으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언급되곤 한다. 부처님 당시 인도 사회는 원시적인 혈연 공동체인 씨족사회를 넘어서 지역을 단위로 하는 부족국가 내지 도시국가가 형성되고 세습 왕실이 통치권을 강화해가는 계제(階梯)였고, 그런 크고 작은 왕국들이 할거하며 각축하던 시대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불교 경전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환경은 왕국이고 계급 신분 사회이지 현대의 민주국가나 시민 사회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민주적인 시민 사회에 사는 현대 한국의 불자들이 전륜성왕을 통치자의 이상으로 여기거나 왕족, 귀족, 평민, 하인 등 계급 신분과 그 세습을 지지한다면 우스운 일일 터이다. 아니, 우스운 정도가 아니라 가히 어리석은 시대착오라 할 만하다.
그런 착오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시대와 지역의 상황에 따른 방편적인 표현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것을 꿰뚫고 들어가(투과 透過) 궁극적인 가르침(요의 了義)을 간파하는 지혜를 갖춰야 한다. 불교는 교리 담론에서 수많은 잡다한 주제들을 다루고 다채로운 설법을 전하지만, 그 모든 것이 괴로움을 불식하고 행복하자는 대주제로 수렴된다. 행복론이 불교의 요의라 할 수 있다.
행복이라 하면 흔히 배부르고 등 따습고 한가롭고 기껍고 영예롭고 아름답고 섬김을 받고 등등의 상태를 떠올린다. 하지만 불교에서 추구하는 행복은 무상해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그런 행복이 아니라 궁극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하고 진정한 행복이다. 나, 내 가족, 내 지역, 내 정당, 내 나라 등 개체를 단위로 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모든 중생(衆生), 즉 “뭇 생명들”을 단위로 한다. 다른 생명들의 불행을 조건으로 해서 내가 행복을 누린다면 그건 불교적인 행복이 아니다. 모두가 함께 행복한 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행복이다.
위에서 언급한 불교의 핵심 교리 연기법(緣起法)이 그런 불교적 행복 개념을 함축한다. 이를테면 네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고 나의 행복이 곧 너의 행복인 그런 법칙이다. 내가 행복하려면 너의 행복을 빼앗아야 하거나 너의 행복을 위해 나의 행복을 희생해야 하는 세간적인 제로섬(zero-sum) 구도가 아니다. 나는 이것이야 말로 다름을 평화롭게 수용하고 자유와 평등의 최대한의 현실적 구현을 위해 정진하는, 달리 말하자면 불교 수행과 민주주의 실천이 하나가 되는, 출출세간적(出出世間的) 원리를 전해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윤원철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롱아일랜드에 있는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불교사상의 이해』, 『똑똑똑 불교를 두드려보자』, 『종교와 과학』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현대의 종교 변용』, 『깨침과 깨달음』 등 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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