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불교 논쟁과 현대적 의의 | 종교와 종교가 만나려면

종교와 종교가 만나려면|불교와 유교 (1)


조선조 불교 논쟁과 

현대적 의의


송석구 

전 동국대학교 총장



배불론의 일반적 특징

 조선조 배불론의 특징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의 본격적인 배불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당시의 시폐(時弊)와 송유(宋儒)들이 말하던 배불적 경향을 벗어나지 못한 형편이었다.
고려 말의 성리학자들이 배불의 근거로 불교의 이론적 결함이나 비논리적 이론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단지 불교의 폐단과 불교가 주장하는 이론과 믿음이 그 당시의 성리학적 윤리와 배척되어 비판했다. 예를 들면 이색(李穡, 1328~1396)이 공민왕 원년(1352)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소(疏)를 냈는데 그 소문에 “불은 대성이고 지성지공(至聖至公)하여 받들면 지극히 좋다”라고 찬불했다. 그리고 순 유자적 입장에서 배불소를 낸 감찰대부 김속명(金續命),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 대사성 김자수(金子粹), 성균관 박사 김초(金貂), 성균관 생원 박초(朴楚) 등의 소문에 나타난 배불의 근거는 이적지교(夷狄之敎) 무부무군(無父無君) 결신난륜(潔身亂倫)의 교(敎)라느니, 나아가 화복(禍福), 윤회(輪廻) 등이 무근하다는 이유를 제시했을 뿐이라 아직 이론적, 학술적으로 불교를 배척할 만한 논증은 없었다.
성리학자 정몽주(鄭夢周, 1337~1392)도 “유자의 도는 일용 평상의 일이라 음식, 남녀 관계는 인간 누구나 공통적인 것으로 거기에 지극함이 있다. 불교가 남녀 관계를 끊고 암혈에 앉아 초근목식을 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냐” 하며 출가해 인륜을 끊고 남녀의 인간상정을 금욕하는 것에 반대했다.

삼봉의 배불론

 우리는 여기서 삼봉의 배불론을 전부 소개할 수는 없으나 그는 성리학의 근본 개념인 이(理), 기(氣), 심(心), 성(性), 정(情)의 개념으로 불교의 심을 비판한다. 또한 불교의 최상 개념인 심(心)에 대해 그 심은 이(理)에 포섭된다고 보았다.
 삼봉은 “아 목목한 그 이(理)여! 천지보다 앞에 있어 기(氣)는 나(理)로 말미암아 생기고 심(心)도 또한 품수(稟受)하였도다. 심이 있고 내(理)가 없으면 이해(利害)에만 달려갈 것이고, 기(氣)만 있고 내가 없으면 혈육만이 신체로 금수와 한길로 몰아갈 것이다”라고 해 인간의 본성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이(理)이므로 이(理)가 최고의 개념으로 심(心)을 포괄함을 주장한다.

함허득통(涵虛得通, 1376~1433)의 절충적 호교론

 삼봉의 배불론 이후 배불의 기치가 상승 고조될 때 용기 있는 결관을 갖고 「현정론(顯正論)」을 쓴 스님이 곧 함허득통이다. 요약하면, “사람을 상벌로써 다스리면 겉으로만 따를 뿐이다. 그러나 인과법으로 보여주면 그 복종이 마음으로 심복한다. 또한 미래에 복 받기를 원하는 자는 부지런히 선을 행할 것이고 후세에 화를 피하고자 하면 반드시 악을 행할 것을 삼갈 것이다.” 이러한 심복이나 염치를 알아 덕과 예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성인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침묵으로써 다스리고 말없이 믿게 하는 것은 불교의 교화법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함허득통은 실제적인 이론을 가지고 배불론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종교적 감응을 강조한다. 또한 출가에 대해 “유자의 오륜오상은 경(經)으로써 정(正)을 지키는 것이고 불자의 출가득도는 권(權)으로써 변(變)에 응하는 것으로 상(常)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도(道)에 합치한다. 불자는 석(釋)으로써 부모의 명을 나타내니 이는 곧 대효(大孝)다. 불자는 군국(君國)을 위하여 기복하고 인과(因果)로써 민(民)을 선도하니 이는 곧 대충(大忠)”이라고 말했다.

성종과 연산군의 척불정책과 흥유억불 정책

성종은 즉위하자마자(1471) 도성 중의 염불소를 폐지하고 간경도감을 그만두게 했다. 사족들의 부녀가 삭발 출가하는 것도 금했다. 도성 내외의 니사(尼寺) 26개소도 헐어버리도록 했다. 도첩의 법을 정리, 도첩이 없는 승려는 모두 정역(定役)과 군정(軍丁)으로 충당, 금승(禁僧)의 법을 세워 도승을 금하고 승려를 환속시켜 불승을 사태(沙汰)시켰으므로 사원은 텅텅 비었다.
다음 왕인 연산군은 즉위 2년에 흥유억불을 명했으며 9년에는 승도의 도성 출입을 금하고 선종 회소인 흥천사와 교종 회소인 흥덕사와 대원각사를 폐했다. 심지어는 삼각산 각 사원에 거주하는 승려를 쫓아내어 폐사가 되게 하고 성내의 니사를 헐어 니승을 판방의 노비로 살게도 했다. 이와 같은 인륜에도 어긋나는 불교 박해는 마침내 승과까지 시행치 못해 불교는 그 존립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따라서 중종 2년에는 승과가 완전 폐지되었다. 이처럼 승과가 폐지되었다는 사실은 결국 선종과 교종까지 폐지된 것으로, 이제까지 국가의 제도권에서 보호받았으나 그 울타리가 무너지며 불교의 존립이 위태로웠다.

허응당 보우의 일정론

 보우 스님은 불교와 유교의 형식적인 면에서 절충적 융화적 태도를 견지한 종래의 호교적 배불론보다는 불교와 유교의 내면적 개념인 심(心)을 비교해 제3의 개념을 제시한다. 즉 불교의 일심(一心)과 유교의 중(中)을 합일하려 했다. 불교의 일심오도 의식의 집, 유교의 중(中)도 정(情)의 미발(未發)이 집중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교의 일(一)은 일심(一心)이요 정(正)은 심의 순수함이요, 유교의 일(一)은 일기(一氣)요, 성실(誠實)이요 중(中)으로 보았다. 성은 천지지도(誠天地之道) 성지자(誠之者)는 인지도(人之道)라고 할 때 천도자 인도의 합일을 일정(一正)으로 보았다. 일이란 진실한 마음을 말한다. 따라서 보우는 일심의 일과 대학의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정(正)을 합해 일정(一正)이라 보아 불교와 유교의 내면적 상통성을 창의적으로 설명했다.
 보우 스님은 문정왕후를 움직여 1550년 선교 양종을 다시 세우고 승시와 도첩제도 부활시킴으로써 불교의 중흥을 꾀하게 되었다. 보우 스님이 순교한 다음 1566년에 다시 불교가 탄압받으나, 이때 출가한 유능한 인재로 인해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 서산대사와 사명대사(1544~1610)가 승군을 일으켜 호국의 기치를 드니 이로 인해 불교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정치적으로 힘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불교와 유교의 논쟁도 임진왜란 이전과 임진왜란 이후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정치적 억압 속에서 이론적으로 불·유의 상통·상이에 대해 수동적 변론에 급급하고 호교적 논리가 강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불·유의 논쟁이 약화되었다. 그만큼 불교의 위치가 사회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을 저술하며 ‘도가귀감’은 도가의 귀감이 될 글을 실었고, ‘유가귀감’은 유가의 귀감을 실었다. ‘선가귀감’은 유가나 도가를 넘나들지 말고 불교가 더욱 훌륭하다는 뜻에서 『선가귀감』을 저술했다. 이는 유교와의 상통을 논함으로 유교의 억압을 피하려는 수동적 피동적 논의보다 불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적극적 자발적 호교론의 입장이 강화되었다.
 예를 들면 진묵(震默, 1562~1633) 스님의 경우 사계(沙溪, 1548~1631) 김장생(金長生)의 제자인 봉곡(鳳谷, 金東準, 1575~1661) 선생 같은 분과 교유했다. 불교와 유교가 같지 않으면서 같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종(顯宗, 1659 즉위~1674)이 즉위하면서 임진왜란 이후의 완화되었던 배불이 더욱 강화되어 성내의 승니(僧尼)를 축출하고, 5,000 승니를 수용했던 자수와 인수의 두 사원을 폐했으며, 모든 사찰의 노비와 전탑은 본사에 돌리게 하고 승니를 단속했다. 그러자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이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올리니 이는 조선조의 체제와 이론을 갖추었다. 그는 이 소문에서 왕조의 폐망이나 난세가 불승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중국과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 조목조목 반론했다. 우리나라는 삼국의 숭불흥국과 고려의 봉불이 국가 통치에 유해하지 않았다고 언급한다.
 이와 같이 불교는 이제 군신들의 배불에 대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자세에서 오히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당당하게 불교가 역사에 유익했지 해롭지 않았다는 상소를 한다. 이는 임진왜란에서 의승이 국가 방위에 기여하고 그것으로 인해 불교의 위치가 강화되고 새로운 인식에 의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불교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종교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하는 의무가 있다. 요익중생(饒益衆生), 널리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보살행이 근본이다.
 백곡처능의 정신이 곧 3·1운동의 불교 참여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불교가 발전할 수 있는 기초는 곧 중생을 위해 스스로 희생할 때, 그리하여 중생에 이익이 될 수 있는 실천을 할 때, 그 힘이 있는 것이다. 불교가 기복이나 정신적 영험이나 무속과 결부될 때 그 힘을 잃고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국난 극복에 앞장서고 사회적 기능을 다할 때 불교는 중흥할 것이다.


 

송석구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만대학교 철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동국대의료원 원장, 동국대(13대·14대)·동덕여대·가천의과대 총장, 한국철학회 회장,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 제4대 삼성꿈장학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노철학자의 인생수업』, 『다산의 공부』, 『70일간의 마음공부』, 『율곡철학 강의』, 『불교와 유교 강의』, 『대통합』, 『자강(스스로 길이 되어 가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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