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재가열전|세속에 핀 연꽃
우촌 원의범 거사
자유인을 꿈꾸며 살았던
불교 원전 연구의 개척자
문을식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
우촌 원의범(尤村 元義範, 1922~2017년) 선생님은 1922년에 평안북도 정주(선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일제 강점기 때 부모의 슬하를 떠나 서울로 유학해 불교학과 인도철학에 향학열을 불태웠다. 이러한 우촌 선생님은 불교의 토양이자 한국 사회에서 불모지와 다름없던 인도철학의 가르침을 펴면서 1967년 8월부터 1988년 2월까지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우촌은 80세가 넘어서도 후학들이 가르침을 구하면 언제 어디든지 누구를 마다하지 않고 가르침을 폈다. 또한 어릴 적부터 그림에 취미가 있어 초등학교 때는 눈앞에 종이만 보이면 그림을 그리며 화가를 꿈꾸었다고 한다. 그 꿈은 정년퇴직을 한 뒤에 어릴 적 추억과 불교를 소재로 컴퓨터로 그려서 전시회까지 여는 디지털 선화가(Digital 禪畫家)로 실현했다.
우촌은 1943년 혜화전문학교 불교과를 졸업하고, 혜화전문학교가 4년제 정규대학이 되자 다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에 입학해 1954년에 졸업했다. 우촌은 그 당시에 불교 말고 다른 종교들에도 관심을 가져서 그것을 더 배우고, 불교를 더 넓게 이해하고자 불교학과 대학원이 아닌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 입학해 1962년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우촌은 수업 시간에 몇 번이고 자랑삼아 말씀한 것처럼, 혜초(慧超, 704~787년) 스님 이래 한국인으로는 처음 인도 국비 장학금을 받고 바라나시에 자리 잡은 바라나시 힌두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 범어과 연구생으로 1년 넘게(1965~1966) 머물며 범어를 연구했다. 우촌이 이처럼 인도에 유학하게 된 동기는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또는 월정사 등의 여러 강원에서 불교를 가르치면서 관심을 가진 불교의 인식 논리를 원전어로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중국 당나라의 현장(玄奘, 602~664년) 삼장 법사가 불교의 진수를 그대로 배우고자 험난한 카슈미르 육로로 인도에 가서 불교가 발생하고 융성하는 모습을 몸소 체험하고 유식학을 대성한 것처럼, 우촌도 불교가 발생하고 꽃피운 본고장에 직접 가서 생생한 문화와 원전 언어들을 배우고, 또한 무착(無着)과 세친(世親) 논사 등의 유식 사상이나 진나(陳那)와 법칭(法稱)의 인명학 전적의 원전들을 원활하게 읽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촌이 인도로 유학한 직접적인 동기로 생각된다.
사람은 무엇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다 보면 그것을 직접 현장에 가서 체험하고 확인하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선생님께서 나중에 동국역경원에서 『니야야 빈두외』(1995)를 간행하면서 범어(sanskrit) 원본인 『Nyāya Bindu of Śrī Dharmakīrti by Śrī Dharmottarāchārya Edited with Notes, Indroduction & Hindi Translation By Ācārya Chandra Sekhara Śāstri』(1954년)를 저본으로 사용해 번역했기 때문이다. 이 문헌은 아마도 우촌이 인도 유학 때 직접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우촌은 인도라는 나라를 다만 막연히 ‘부처님의 나라’로, 언젠가는 한번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지만 그는 불교논리학을 공부하러 갈 줄은 몰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일체유심(一切唯心,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이라는 말에 찾을 수 있다. 우촌은 수업 시간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rgito ergo sum)”라고 하는 것은 불교적 사고 내지는 논리에 맞지 않고, 불교에서는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이라는 말과 서로 통한다.
우촌이 강조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왜 한국에 인도철학과가 생겼는지에 대한 말씀으로, 인도철학에서 바라본 ‘철학’이란 ‘올바르게 봄(darśana)’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사물이나 사태의 모습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면 그것은 바르게 인식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촌은 ‘올바른 인식[正智]’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도 유학을 통해 크게 자각했을 것이고, 평생을 그것의 연구에 바치게 되었는지 모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촌은 수업 시간에 ‘올바르게 봄’과 서양의 철학(philosophy, 愛智學)이 출발부터 다르다는 것을 늘 강조했다.
한편 우촌이 왜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 진학하지 않고 서울대 대학원 종교학과에 진학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내막을 알 길은 없다. 하지만 필자는 우촌의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의 연구 주제(‘극락과 천국과의 내세관적 비교’)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극락(아미타불이 상주한다는 이상세계)이 불교 용어라면 천국(죽어서 가는 복된 세계)은 기독교 용어다. 여기서 천국에 대응하는 불교 용어는 ‘천당(죽어서 가는 복된 세계)’이있는데도 우촌은 왜 ‘극락’과 ‘천국’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썼을까? 그것은 우촌이 태생적으로 또는 어려서부터 신앙은 유일신을 추구하는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아닌 신을 섬기지 않은 불교임을 알 수 있다. 이 주제는 우촌의 평생 연구로서 여러 곳에 게재되어 있다. (석사 학위 논문 「The differences of the future life between sukhavati andheaven」(1957), 『석림』(1968년 7월), 『불교학보』(1969년) 연재 글 ‘극락과 천국과의 내세관적 비교’ 등 또) 우촌은 ‘불교는 무신론인가’라는 주제의 글을 여러 잡지에 반복해서 게재했다. 이 주제는 그 당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주제로 여겨지는데, 이기영(1922~1996년) 박사와도 논쟁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불교』, 『사상계』, 『불교생활』, 『석림』 등에 관련 글 게재) 아마도 불교는 신을 상정하는 유신론적 종교가 아니어도 성립되는 종교임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은 심정을 이렇게 같은 내용을 여러 번에 걸쳐 게재한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불교를 기독교 신자나 이슬람교 신자처럼 유일신을 믿는 종교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것이 잘못된 인식임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우촌은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또 불교학을 공부하는 제자들에게 그것의 차이를 정확하게 알리고자 서울대 대학원 종교학과에 진학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촌의 학문 초창기(1950~70년)에는 『석림』과 『불교학보』, 『한국불교학』 외에 논문을 게재할 곳이 많지 않았다. 또 그 당시 학문적인 경향의 논문과 같은 글을 읽고 이해할 만한 식자층이 많지 않아서 주로 월간지나 계간지를 통해 일반 상식의 불교를 말씀하셨다. 다른 한편으론 우촌 당시는 불교를 전문적,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많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우촌의 본업은 동국대 불교대학 인도철학과 교수였지만 다른 대학의 강의 요청도 잇따랐고, 대학에서의 제자 양성에서 더 나아서 강원 등에서의 전문적인 불교 교육에도 앞장서는 등 후학을 양성하는 데 노력했다. 이로써 그는 서울대, 연세대 등과 중앙불교승가학원(중앙승가대학교의 전신)이나 오대산 월정사 강원 등에서 많은 출재가자를 양성했다. 월정사(당시 주지 구산 스님)에서는 꽤 젊은 나이(1950년대)에 관응(1910~2004년) 스님, 탄허(1913~1983년) 스님 등과 함께 차세대 승가 교육을 담당했다. 우촌이 일찍부터 월정사에서 강의한 것은 아마도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셨던 한암(1876~1951년) 스님 아래 잠시 출가해 가르침을 받았었고, 그 인연으로 그의 상좌 탄허 스님과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다.
우촌은 근대에 들어 첫 인도 유학생이자, 인도 원전 연구의 개척자와 불교 논리학 연구의 선구자 등의 평가를 받는 위대한 불교학자이면서 동시에 제자들에게는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은 살가운 큰 스승이었다. 이러한 우촌은 학내 민주화를 위해 태극기를 들고 학생들 앞에 섰던 선생님이었다. 우촌이 후학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게 된 데는 서울대 종교학과와 인도 유학과 같은 남이 쉽게 할 수 없는 길을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우촌이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무애(無礙)한 삶을 살고자 노력한 결과이다.
이처럼 우촌은 걸림 없는 자유인의 삶을 살았던 분이다. 그래서 불교 논리학의 명가답게 강연 도중에 많은 명언을 남기셨다. 몇 가지만 들어보면, 우촌은 인도철학을 공부해서 장래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를 고민하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도철학은 밥을 못 먹고 살아도 된다는 배짱을 가르치는 학문이다”라고. 또한 어떤 학생이 ‘인도(印度)철학’을 ‘인도(人道)철학’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우촌은 “그렇다. 인도철학은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밝힌 철학’이다”라고 자유롭게 해석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런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밥을 먹지 못해 굶어 죽었다는 소식은 지금까지 들리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시험문제의 실제이다. 출제 방식은 이른바 ‘자문자답’으로 학생 자신이 직접 문제를 내고 답을 쓰는 형식이다. 이처럼 우촌의 가르침은 ‘철학함(philosophizing)’을 제대로 배운 것이다. 이러한 우촌의 촌철살인과 같은 가르침은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처럼 제자들은 ‘인도철학이 사람이 살아가는 길[人道]을 밝힌 철학’이라고 이해해 제자들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 속에서 세상을 밝게 밝히면서 살아가고 있다. 평소 우촌은 당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두 분을 꼽았는데, 선(禪)에서는 한암 스님, 교(敎)에서는 동국대 김동화 교수이다.
끝으로 우촌이 지금까지 남긴 저술로는 『불교인식논리학』, 『불교와 현대사상』, 『인도철학사상』, 『불타의 말씀(수타니파타)』, 『현대불교사상』과 잠언집 『알게 모르고 모르게 알고』, 그림시 『구름아 임자도 화나면 벼락 치는가』 등이 있다.
문을식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철학 박사). 동국대 등 강사, Bandarkar Institute of Oriental Studies in India 객원연구원,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서울불교대학원대 연구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용수의 중도사상』, 『바가바드 기따』, 『요가 상캬 철학의 이해』 등이 있고, 번역서는 『힌두교』, 『대승불교』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요가심리학에서 본 유식심리학의 5위설: 수습위를 중심으로」, 「상캬-요가수행론에서 본 유식심리학과 융의 분석심리학의 수행론 비교연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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