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사상적 특징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란 무엇인가 | 불교, A에서 Z까지


붓다의 사상적 특징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회장



 붓다가 탄생하던 무렵(기원전 6세기)의 인도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일대 전환의 시기였다. 도시국가의 발달로 물질이 풍부해지고 생활에 여유가 있게 되자 사람들은 향락에 안주하고 도덕이 붕괴되었다. 사람들은 재래의 바라문적 관습을 단순한 미신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베다의 권위에 회의를 품은 사상가들이 속출했다. 동시에 인간의 지식의 발달은 보다 고차원적인 사상의 출현을 갈구하게 되었고 해탈에 관한 갖가지 수행법과 사상이 정비되고 윤회와 업의 사상이 일반화된 것도 이 시기였다. 바라문적인 것에 반발하며 새로운 사상을 주장한 그룹들은 주로 사문이라는 출가유행자(出家流行者)들이었는데 붓다도 그러한 사문의 한 사람이었다. 이 시기는 한마디로 사회・경제・문화・정치・종교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고 재래의 전통은 의심되고 재검토되는 격동의 시기였다. 불타는 이러한 사회적 격동과 사상의 혼란 시기에 태어난 새로운 빛이었다.
 사문 고타마 싯다르타가 붓다가 됨으로서 우리에게 진리와 거기에 도달하는 길을 가르쳐주었으며 불교라는 하나의 사상 체계를 형성했다고 할 때 수많은 주의・주장 속에서 불교의 사상 체계가 다른 것보다도 뛰어나며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어떠한 주의・주장 혹은 사상이라도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한은 상대적이고 일방적이며 대립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붓다는 그러한 모순을 누구보다도 잘 통찰하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그 진리를 잘 드러낼 수 있었다. 붓다의 시종일관된 기본적 입장은 모든 논쟁을 초월하고 그릇된 인식을 타파하며 명백한 실천 체계를 제시함으로써 진리에 접근하는 길을 열어 보이고자 하는 데 있었다.
 붓다는 그 당시의 여러 주의・주장에 대한 비판으로서 그들이 자기 견해만을 고집하고 상대방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리석고 무지한 자라고 했으며 진리는 분명 하나인데 각자가 자기주장만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이러한 석존의 견해는 『숫타니파타』라는 오래된 경전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견해를 고집하면서 서로 의견을 달리해 싸우고 있다. 스스로 진리를 아는 자라 자칭하며 여러 가지 논쟁을 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각기 다른 견해를 품고서 “너는 어리석은 자다. 아직 진리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그들은 모두 “보라, 나야말로 진리를 아는 자”라고 외쳐대고 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의 말이 과연 진실이겠는가?

 붓다는 이처럼 진리는 결코 일방적인 주장에 의해 확정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통찰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종교나 외도들이 진리의 객관성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면서도 일방적으로 설정한 자신들의 관념에 의해 타인에게 그 주장의 수용을 강요하는 모습과 지극히 대조적인 일면이다. 무조건 “믿습니다”만을 강요하는 종교는 대부분이 자신의 교리의 모순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이다.

 또한 붓다는 인간의 사유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논쟁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바 이들이 다투는 것에 대해 ‘그들은 자기의 견해에 탐닉해 더러움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혹은 ‘욕심에 끌리고 바람에 구애되어 있는 사람이 어찌 자신의 견해를 넘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들을 초월해 어떤 특수한 형이상학설을 수립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붓다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정한 수행자는 다른 수행자에게 이끌려가지 않는다. 또 이 모든 것에 단정을 내려 고집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논쟁을 초월해 있으며 다른 여러 가르침을 특별히 우러러 보지도 않는다. 진정한 수행자는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사람과도 말싸움을 벌이지 않는다.

 이처럼 붓다는 당시에 논의되고 있던 여러 주장들에 대해서 초월적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고자 했다.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사후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신체와 영혼은 하나인가 별개인가? 등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보류한 것도 이러한 질문이 잘못된 인식에 바탕을 둔 물음으로서 질문 그 자체가 그릇된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수행에 실제로 아무런 이익이 없으며 진실한 인식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서양의 철학자들이 그 분분한 철학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활과 이웃의 실질적인 괴로움 해소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결국은 진리의 가장자리에서만 맴돌다가 자신이 세운 사상 체계와 자신의 생활 방식을 일치시키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예들은 우리가 익히 보아온 바이다. 또한 인류의 역사에서 주의와 사상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야만적 행위들을 생각해볼 때 붓다의 이러한 논쟁 초월의 입장은 진리에 접근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말씀들을 통해 볼 때 붓다의 가르침은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일들에 대해 논쟁하지 말며 뚜렷하고 근거가 확실한 것이 아니면 믿지 말라는 합리적인 것이었다. 특히 바라문의 학문 전승에 대해 맹인 줄서기와 다름없다고 호되게 비판했는데 바라문들이 떠드는 말은 웃음거리의 이름뿐인 공허하고 허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마치 보지도 못한 미녀를 사모하며 본 적도 없는 궁전에 오르는 사다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 했다. 붓다는 경험에 의해 확증된 것이 아니면 믿지 말 것을 가르쳤으며 동시에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극단을 배제함으로써 불교 독자의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인식에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합리적인 사유를 무시하고 일방적인 맹신만을 강요하는 믿음 체계는 결코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 될 수 없다. 합리적인 사유를 무시하고 배타적인 맹신으로 치달을 때 주위에 어떠한 폐해를 끼치는가는 붓다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익히 알 수 있는 바이다.
 붓다는 또한 모든 사상적 논쟁이나 대립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같다든가 훌륭하다 혹은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들은 그 생각으로 인해 다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같다든가 같지 않다라는 생각이 없어진 사람은 누구와 논쟁을 벌일 것인가?’ 혹은 ‘일체 세간의 집착에서 떠난 자는 세상과 다툴 것이 없다.’

진리는 하나이고 제2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진리를 아는 사람은 다투는 일이 없다.

나는 세간과 다투지 않는다. 그러나 세간이 나와 다툰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은 세간의 어느 사람과도 다투지 않는다. 세간의 모든 현자가 없다고 승인한 것은 나도 또한 없다고 말한다. 세간의 모든 현자가 있다고 승인한 것은 나도 또한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붓다는 세속의 논쟁을 지양하면서도 수긍할 것은 수긍하는 유화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것이 바로 불교의 위대한 점인바, 경전에서는

예컨대, 여러 연꽃이 물속에서 생기고 물속에서 성장해 물 위로 나타났는데도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처럼 실로 여래는 세간 속에서 성장하고 세간을 이겨내고 있으며
더욱이 세간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라고 표현되어 있다. 붓다가 이렇게 대립을 지양할 것을 강조한 것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온을 통해 참다운 진리에 도달하도록 하려는 데 그 뜻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붓다는 상대방의 믿음 체계를 존중해주며 가르침을 베풀었고 사회의 관습이나 법도도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그 시대 그 상황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의의가 있기에 인정하는 것이지 무조건 세인의 다수에 따른다거나 그것이 진리에 부합하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이교도들에 대해서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심으로써 그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다. 붓다의 유화적인 태도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다른 종교나 주의・주장들과는 확실히 다른 것으로서 불교의 윤리가 시대를 초월해 어느 나라 어느 지방에서도 거부감 없이 유연하게 구현될 수 있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과거의 십자군 전쟁이나 이슬람의 횡포 그리고 오늘날 중동을 비롯한 세계 여러 곳에서의 종교 분쟁을 볼 때 불타의 이러한 가르침은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붓다는 당시의 모든 사상과 대립하는 어떤 철학적 입장에서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거나 새로운 형이상학을 창조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불타는 이율배반에 빠지는 형이상학적 희론(戱論)을 배제하고 진실된 실천적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오로지 괴로움을 벗어나는 진리에 도달하는 길을 열어 보이려고 했다.

그대들이여, 나는 알고 있는 것, 보이는 것, 괴로움의 소멸만을 말한다. 모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어떤 기묘하고 특수한 실천 방법이나 비밀은 없었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현상과 존재의 모습을 통찰하면서 괴로움을 벗어나는 바른 길, 그리고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그러한 길을 가르쳤다.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말한 진리는 현실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원인과 결과를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며, 누구나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혜로운 자는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상이나 종교는 그러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그 당시의 주류를 이루던 우파니샤드의 철학은 사회적 보편성이 없었음에도 우파니샤드란 ‘비밀의 가르침’이란 의미로서 그것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전해질 수 없고 자기가 신뢰할 수 있는 제자에게만 전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여기에 반해 불타의 가르침은 명명백백한 것이었다.

내가 가르치고 보인 진리와 계율은 공명하게 빛을 발하며 비밀로 덮인 것이 없다.

 이러한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붓다는 가르침의 대상도 차별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가르침을 베풀고 실천적 방법을 제시했던 것이다. 또한 바라문 지상주의의 모순점을 지적하고 그 당시의 여러 미신적인 관습들에 대해 합리적 비판을 가한 것도 붓다가 미망의 허위나 전도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언제나 실천적 입장에서 진리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한 인간이 진리의 깨달음에 의해 붓다가 됨으로서 진리에 부합한 그의 언행과 사상은 긴 역사를 통해 인류의 귀감이 되어 수많은 인간의 정신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사회의 흐름을 바꾸어놓았을 뿐 아니라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가 굴린 법륜은 오늘도 끊임없이 인간의 정신을 선도하며 굴러가고 있다. 무력을 쓰지 않고 온화한 진리의 말씀으로 인류에게 이처럼 큰 긍정적 영향을 끼친 이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미신과 독선, 아집, 미망으로 얼룩진 인류 역사에서 불교만큼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시기를 거쳐 수많은 현자와 지자들을 사로잡았던 가르침은 아직 없었으며 붓다가 설한 진리는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더욱 그 빛을 더하고 있다. 불타의 탄생은 실로 고해의 바다에서 헤매는 인류에게 던진 마지막 희망의 빛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철학 박사). 전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불교총지종 중앙교육원 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불교총지종 정사이면서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근본불교개설』, 『현대인을 위한 불교 입문』, 『불교 교양으로 읽다』, 『내 인생의 멘토 붓다』, 『관세음보살 예찬문』, 『초발심자경문』, 『대일경 주심품』, 『생활불교, 재불가교』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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