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환경이 보여주는
연기(緣起)의 진리
유선경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붓다가 성도(成道) 당시 깨달았다는 진리가 연기의 법칙이다. 붓다의 연기법(緣起法)이란 다음과 같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며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며 저것도 소멸한다.
붓다의 가르침인 연기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조건에 의존(緣)해서 생겨난다(起)는 뜻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도 연기하며 생성되고 소멸한다. 붓다의 연기법은 생명현상을 꿰뚫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환경의 조건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생명체의 생성과 지속 그리고 소멸을 단지 그것이 가진 유전자의 속성만으로는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생명체는 그들이 서식하는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 의존하며 생성(interdependently arising)되고 생존하며 노화되고 사멸한다. 그리고 진화한다.
길가에 핀 민들레꽃 한 송이는 햇빛, 바람, 산소 그리고 뿌리로 유입되는 땅속의 자양분 등 셀 수 없이 많은 환경 조건에 의존해 생성된다. 환경의 조건이 없어지면 민들레는 소멸한다. 한편 민들레의 뿌리는 땅속 다른 잡초의 뿌리들과 뒤엉켜 있다. 이러한 잡초들도 민들레와 같은 방식으로 환경의 조건에 의존해 생멸한다. 이들은 또 주변의 다른 잡초들과 연결되어 있어 민들레는 결국 멀리 있는 이름 모를 잡초들과도 연결된다. 따라서 민들레의 생멸은 이 많은 잡초들의 생멸과 상호 의존한다고 이해된다.
그리고 땅속에 있는 지렁이 등 많은 이름 모를 벌레들의 존재와 그들의 활동도 민들레의 생멸에 깊이 관여하며, 땅 위 생명체들도, 예를 들면, 벌의 생멸도 민들레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길가에 핀 민들레꽃 한 송이는 이렇게 셀 수 없이 많은 환경 조건들과 연기하며 생성과 지속 그리고 사멸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우리 몸 안 하나의 세포의 생멸도 세포를 둘러싼
환경 조건에 상호 의존하며, 더 나아가 세포 안의 생명현상도 연기다.
붓다의 연기법은 모든 생명현상을 꿰뚫는 가르침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환경이란 그 생명체가 직접 접촉하는 국부적인 조건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생명체들을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환경을 뜻한다. 우리는 이런 포괄적 환경을 국한되지 않고 열린 의미의 환경으로 이해해야만 연기하는 민들레의 생성을 보다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 하나의 민들레는 ‘열린 환경’의 수많은 조건들과 함께 연기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민들레는 이러한 환경의 조건들에 의존하고, 환경 또한 민들레에 의존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하나가 많은 것에 들어가고 또 그 많은 것이 하나에 들어가 많은 것이 다른 많은 것과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로도 설명될 수 있겠다.
이제 우리를 살펴보자.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조건과 상호 의존하며 존재한다. 우리는 진화의 결과물로서, 우리의 부모를 거쳐 우리의 조상과 연결되어 있고, 이 모든 이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던 그 당시의 무수히 많은 환경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진화의 긴 역사는 우리 안에 투영되어 우리의 존재를 결정지었다.
또한 현재의 우리는 지리적 생태적 환경 조건들에 의존하며 존재한다. 이 외에도 문화적 조건 등 수많은 환경 조건들이 우리의 생멸에 관계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수많은 환경 조건들에 의존하고, 그 조건들도 우리의 존재에 의존하는 상호 의존의 관계로 존재한다.
생명체들이 상호 의존하며 생멸하는 연기의 양상은 생명체 안의 생명현상도 설명한다. 우리의 몸 안을 살펴보자.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뜻이다. 적당한 온도와 영양분, 수분, 산소 등이 몸 안으로 드나들며 작용하고 있고,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 세포로 이루어진 조직들, 그리고 조직으로 이루어진 기관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러그러한 적당한 환경 조건들에 의존하며 세포, 조직 그리고 기관 간의 상호작용이 우리 몸을 생명체로 결정짓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의 건강한 몸 안에는 10조나 13조 개의 곰팡이 등 미생물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몸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이러한 미생물군계(microbiome)는 특히 피부와 침, 폐와 위, 내장 소화기관 등에서 우리와 공생하며 서로의 생멸에 상호 의존하고 있다. 미생물의 수와 그들의 기능이 우리의 생존과 지속에 영향을 끼치며, 반대로는 우리 몸의 기능이 미생물군계의 생멸에 깊이 관여한다. 미생물군계와 우리 몸은 서로를 조건으로 연기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몸 안에 있는 곰팡이를 포함한 미생물군계와 우리의 몸을 구분해서 생각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몸 안에 있는 미생물군계가 우리 몸의 구성 요소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미생물군계와 우리 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서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호 의존하고 상호 투영하며 연결된 관계에서 그 각각의 구역을 정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하고 있던 우리 몸에 대한 생각을 재고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제 우리 몸 안에 있는 세포 하나에 시선을 고정하고 살펴보며 붓다의 연기법이 미시 세계의 생명현상도 설명한다는 점을 보이겠다. 세포 안에는 세포핵이 있고 핵의 밖은 물, 단백질, 무기 이온 등과 호르몬, 비타민, 핵산(RNA)과 같은 대사 물질로 채워져 있다. 우리의 초점이 세포 하나에 맞추고 있기에 이러한 구성 물질이 세포핵의 환경이라고 잠시 상정할 수 있겠다. 그러면 우리는 세포핵이 그 환경과 상호 의존하면서 유지되고 이러한 관계의 결과가 세포의 생멸에 영향을 끼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단백질 가운데 어떤 것은 세포벽에 걸쳐 세포 밖으로 삐죽 나와 세포외 기질과 연결된 후 결국은 인근 세포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마치 민들레의 뿌리가 땅속 다른 잡초들의 뿌리와 뒤엉켜 마침내는 멀리 있는 잡초들과 연결되듯이. 이와 같이 하나의 세포는 다른 세포들과 연결되어 연기하며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세포 안에 있는 세포핵을 살펴보자. 세포핵은 핵산(DNA)과 단백질이 박혀 있는 끈끈한 핵질과 핵산(RNA)과 단백질 등을 가지는 핵소체로 이루어져 있다. 핵소체 구성원의 기능과 핵질의 상호작용으로 핵산인 DNA가 유전자 발현의 과정을 시작한다. 유전자 발현 과정이라는 생명체의 중요한 기능이 세포핵 안 핵소체와 핵질의 상호 의존 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유전자 발현의 생명현상도 연기로 설명된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 생명체가 환경과 연기하며 생멸한다는 사실을 길가에 핀 민들레꽃 한 송이와 우리의 존재로 설명했다. 또한 우리 몸 안 하나의 세포의 생멸도 세포를 둘러싼 환경 조건에 상호 의존하며, 더 나아가 세포 안의 생명현상도 연기로 설명했다. 붓다의 연기법은 모든 생명현상을 꿰뚫는 가르침이다.
유선경 서울대학교 분자생물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브라운대학교에서 세포분자생물학과 박사 과정 및 텁스대학교에서 철학과 석사 과정을 수학했으며, 미국 듀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네소타주립대학교(Minnesota State University, Mankato)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생명과학철학과 과학철학 및 인지과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와 한글로 발표해오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생명과학의 철학』과 홍창성 교수와 공저 『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가 있고 홍창성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를 영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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