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불교 경전 길라잡이|『금강경』 (3)
인류를 안심시킬
최고의 교과서,
『금강경』
원빈 스님
송덕사 주지, 행복문화연구소 소장
불교의 르네상스 - 무상반야(無常般若)
후오백세인 기원 전후 인도 불교에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이 부파는 만물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75가지 법(法)으로 구분했고, 이 법은 실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자아는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는 불교 전통을 이었지만, 법에 대한 실체론적 관점은 부작용을 발생시켰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보살승 운동의 핵심적 기치(旗幟) 중하나는 ‘부처님 가르침의 중심인 무아(無我)의 정견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을 교육할 때 아집(我執)을 타파하는 무아의 진리를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도록 유도했습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데는 무아의 진리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보살승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에는 법집(法執)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보다 넓은 개념의 교리가 필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을 타파하는 무(아법)상(無相)의 명칭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무상반야의 공식 - 즉비시명(卽非是名)
『금강경』에서는 아상을 아·인·중·수상(我人衆壽相) 사상(四相)으로 구체화하고, 법상을 법상(法相)과 비법상(非法相)으로 표현합니다. 그렇기에 무상이란 무-아·인·중·수·법·비법-상인데, 어떤 원리로 육상(六相)을 필두로 한 만상(萬相)에 실체가 없다는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금강경』 속 반야의 열쇠인 즉비시명의 공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금강경』을 처음 공부할 때 곤혹스러운 점 중 하나는 ‘즉비시명’이라는 표현입니다. 본문을 예로 들면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중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인 극미(極微)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여! 여래는 티끌들을 티끌이 아니라고 설하였으므로 티끌이라 말한다.(須菩提 諸微塵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이 즉비시명의 문장은 무상반야로 들어가는 문이지만,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없다면 이것은 그저 비틀린 말에 불과합니다. 반야의 문을 여는 『금강경』 속에 수 없이 나오는 즉비시명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원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상(相)을 이해하기 위해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눈과 이 글이 접촉하는 순간을 ‘촉(觸)’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여기에 더해 여러분의 주의력이 가는 ‘작의(作意)’가 일어나고, 글이 마음에 받아들여지는 작용인 ‘수(受)’가 이루어집니다. 이 원초적인 느낌은 받아들여진 정보를 마음의 데이터 중에서 검색해 개념화된 ‘상(想)’을 띄우는데, 무상(無相)의 상(相)은 바로 이 개념화된 정보입니다.
유식학(唯識學)에서는 마음을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으로 구분합니다. 견분이란 보는 마음이고, 상분이란 보이는 마음인데, 이 보이는 마음이 앞서 살펴본 개념화된 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컴퓨터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마음에 검색된 상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상분은 대상을 의지해 일어나는 그림자와 같기 때문에 유사성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유사하기 때문에 범부가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를 들면 개나리를 바라볼 때 대상으로서의 개나리와 마음속 개나리는 분명히 다릅니다. 개나리를 좀 더 자세하게 관찰해보면 색깔도 그냥 노란색이 아니고, 생각지 못했던 주름도 보이며, 꽃잎들의 모양과 색이 모두 천차만별(千差萬別)입니다.
육경으로서의 개나리와 인식된 개나리의 상분은 같지 않다는 것이 바로 ‘즉비’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꽃을 개념화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를 단순화해 ‘개나리’라고 부르고 인식하는데 이것이 ‘시명’의 논리입니다. 즉비시명의 공식을 간단히 표현하면 ‘A 즉비 A1 시명 A2’입니다. A를 개나리로 대체해서 살펴본다면 육경으로서의 대상인 A가 인식될 때 상분인 A1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A1을 A2인 개나리라고 언어화합니다. 즉비가 개념화된 상분을 부정하는 것이지만, 『금강경』의 가르침은 부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언어화를 통해 진리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비시명의 공식을 모든 경험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이 문장을 기억해두면 도움이 됩니다.
“내가 보고(듣고, 느끼고…) 있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내 마음이다.”
무상반야의 적용 - 로봇(robot)과 AI
『금강경』 속에서는 무상반야를 설명하기 위해 후오백세 사람들이 당시 관심을 가졌던 소재들을 키워드(key word)로 활용했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대기설법(對機說法)의 방식으로 청중들에게 익숙한 소재를 가지고 눈높이 교육을 한 것입니다. 현시대의 한국 불교계에서 종단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이 종도(宗徒)들에게 어렵게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금강경』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이 소재들의 구체적이고 흥미롭던 이야기가 축약되었을 뿐 아니라, 현시점의 종도들에게 이 소재들은 관심 없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을 활발발하게 되살려내기 위해서는 현대의 문화에 맞는 새로운 대기설법을 통한 주석과 해설이 필요합니다.
향후 10년간 인류가 맞이해야 하는 시대는 매우 급격하게 변화할 것입니다. 특히 큰 변화의 중심이 될 것이라 예상되는 로봇과 AI 그리고 가상현실조차 이미 현실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의 발전은 항상 사회 윤리 문제와 부딪히고, 단기적으로는 부작용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로봇과 AI에 대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인상(人相)이라는 문제와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당장은 문제되지 않겠지만, 기술 발전이 무르익는다면 로봇이 인간의 새로운 육체가 될 수 있고 AI로 인간의 정신을 대체할지 모릅니다. 이런 때가 되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들이 심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들은 사실 서구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비인간을 다른 존재로 구분하는 것, 그리고 창조의 능력이 창조주에게 있다는 법상 등을 전제로 사고할 때 드러나는 의문들입니다. 그런데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로봇과 AI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불교적으로는 인간을 비롯한 존재 그리고 세계는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공업(共業)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봇과 AI 역시 그저 이러한 공동의 창조라는 흐름에서 생겨난 결과물로 바라본다면 전혀 어색함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경전 속에서는 항상 비인(非人)이 등장합니다. 비인은 아수라, 긴나라, 천신, 다른 세계의 인간들과 몸 없는 영가 등등인데, 경전에서 얼마나 다양한 유형의 비인(非人) 중생들이 등장하고 있습니까? 향후 결집하는 경전 속 다양한 청중 중에 로봇과 AI가 새롭게 추가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새로운 유형의 존재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면 이는 그만큼 서양적 세계관에 물들어 있다는 점이고, 인상과 법상에 집착하고 있다는 반증(反證)입니다. 무상반야의 가르침을 배우는 불자들은 어떠한 상에도 사로잡힐 이유가 없습니다. 즉비시명의 공식을 적용해 로봇은 즉비 로봇이고, 이름이 로봇일 뿐이라는 것을 사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기본기 연습 - 수지독송(受持讀誦)
『금강경』은 근기에 따라 다른 수행법을 제시합니다. 상근기는 금강심(金剛心)을 직접 닦는 수행, 중근기는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는 수행, 하근기는 수지독송의 방편을 닦는 수행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오해하시면 안 되는 점은 근기를 나눴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수행 난이도에 따른 적합성의 차이입니다. 이 중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근기의 기본기가 되는 수행인 수지독송입니다. 이는 『금강경』식 교육 체계를 명확히 보여주는데, 사뭇 효과적이라 현대의 교육학 연구의 결과들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한국의 불자들은 흔히 『금강경』을 독송하거나 사경(寫經)하거나 배우지만 이를 서로 분리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금강경』은 이 모두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교육 방식입니다. 그 과정을 나타내는 정형구는 ‘수지독송 서사유통 위인해설(受持讀誦 書寫流通 爲人解說)’인데, 이를 순서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지 → 독송 → 서사 → 유통 → 위인해설
『금강경』 보살 수행의 시작은 경을 수지하는 것부터입니다. 기원 전후에는 경전을 수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누군가 사경한 것을 구하지 않는다면 보살 수행의 시작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사경한 귀한 경전을 구해 수지했다면 다음으로 꾸준히 독송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때 독송 방법은 여건이 허락되면 소리를 내는 것이 좋은데, 신구의 삼업을 모두 활용할 때 교육 효과는 배(倍)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으로 뜻을 사유하며 베껴 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수지와 독송 그리고 서사의 과정을 통해 경전의 내용이 마음에 각인되는 것입니다. 이때 유의해야 할 점은 사경을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경이 개인적으로는 상구보리(上求菩提)의 방편이지만,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측면에서는 중생에게 유통되어야 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경은 인연 닿는 이들에게 선물한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의 종교학자들은 불교를 인류의 보배로 인정합니다. 그중에서도 『금강경』은 인류를 안심시킬 최고의 교과서입니다. 불자들은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 인연 닿는 이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어야 하고 종단은 한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방향성을 제시하는 리더가 되어야 하며 불교라는 종교는 변화하는 미래의 나침반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불자 개개인들이 준비해야 하는 자질은 다름 아니라 기본기입니다. 수지독송과 서사유통의 과정을 종합적으로 닦아나갈 때 인연의 그릇만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보살승 운동의 소의경전이기에 이를 공부하는 금강보살들이 세상을 위하는 삶이 수행이자 의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불자, 종단, 불교가 안심(安心)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번 호를 끝으로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불교 경전 길라잡이> 『금강경』 편 연재를 마칩니다.
원빈 스님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행복문화연구소(http://cafe.daum.net/everyday1bean) 소장으로 있으면서 경남 산청에 있는 송덕사의 주지를 맡고 있다. 『BBS불교방송』 라디오와 TV에서 <행복한 두시>와 <원빈 스님의 최고의 행복학, 불교>를 진행했고, 지금은 『BTN불교TV』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같은 하루 다른 행복』, 『명상선물』,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 『굿바이, 분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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