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와 민주 원리 | 불교와 민주주의 5

불교와 민주주의 :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5


붓다와 민주 원리


붓다다사 커티싱헤 

불교 저술가



 민주 정부의 기본 원리는 법 앞에서 평등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이다. 자신의 소명을 계급이나 특권 등의 장벽에 구애받지 않고 추구할 수 없다면 그는 자유로운 인간이라 할 수 없다. 더 깊은 의미에서 권위적 강요의 공포나 압박 없이 자신이 타고난 가능성을 펼치고 자신의 업이나 운명을 스스로 만들고 완성할 수 있어야만 인간은 자유롭다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치를 다르마를 통해 처음으로 설하고 실현한 사람이 바로 붓다다.

민주적 가치들

민주 사회 문화의 선결 조건은 다음과 같다 :

① 인간을 빈곤과 비참한 상태에서 향상시킬 생산적인 경제
② 모두에게 기회를 주는 안전하고 진보적인 사회
③ 보편적 교육을 제공해 모두가 글을 읽고 쓰는 사회
④ 개인적 자유와 자립
⑤ 도덕법에 기반한 윤리 체계
⑥ 각 문화권을 대문명사회로 자라게 하는 가치 체계와 기관에 대한 뿌리 깊은

존중

 이러한 가치들은 아시아의 고대 불교 문명에서, 특히 인도 역사의 황금기인 기원전 3세기 아소카(Asoka) 시대에 존중되었다. 이런 조건들은 불교 문명이 우세한고도 산업사회인 일본에도 현재 존재하고, 새롭게 부상하는 아시아의 불교 국가에도 존재한다.
 붓다는 고귀한 삶을 살려는 개인의 노력에 자조(自助)의 신조를 가르쳤다. 지성과 정서에 최상의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하며 스스로 낮은 곳으로 떨어질 행동을 삼가라고 조언했다.
 더하여 붓다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고, 팔정도를 통해 그 고통을 멸하는 효과적인 처방도 전해주었다. 팔정도는 점진적 발전의 길이기 때문에 인간 발전의 최하위 단계에 있는 사람들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길에서 결연히 한 발자국씩 내딛는 사람은 모두 마지막에는 궁극의 해탈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붓다는 모든 인간에게 민주 사회의 기본 원리인 평등을 인정했다.
 따라서 붓다는 인간 자유의 분명한 메시지를 제시한 것이다. 붓다는 말했다.
 “자신에게 귀의하고 자기 자신을 구제하라. 성실하게 굳은 결심으로 자신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라.”
 붓다는 인간 사이의 인위적인 구분이 전적으로 어리석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붓다 당시에 인도에는 엄격한 카스트 제도가 있었다. 붓다는 이런 정의롭지 못함에 반기를 들었고 모든 인간이 기본권에서 평등함을 주장했다.
 붓다는 자신이 설립한 승단에 귀족과 사제 계급뿐 아니라 하층 계급도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승단 서열에서 이들 사이에 구분은 전혀 없었다. 모두가 동일한 경의와 존경을 받았다. 일부 귀족들은 붓다의 이런 행동에 화를 냈고, 그 중 한 사람은 붓다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때 붓다는 선언했다.
 “태생으로 고귀한 인간은 없고 태생으로 천한 인간도 없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으로 고귀해지고 자신의 행동으로 천하게 된다.
 붓다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희생제를 비난했으며 특히 동물 희생에 대해 더욱 그러했다. 붓다는 인간은 오직 고귀한 삶을 통해서만 자신을 고양할 수 있고 악에서 안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희생제가 잔인하고 무용하다고 말했다.
 붓다의 자비는 병든 사람들에게도 미쳤다. 한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누구든 병자를 돌보는 사람은 여래를 돌보는 것이다.” 그런 정신에서 인간과 동물을 위한 병원이 기원전 3세기 아소카 재위 시 설립되었다.
 붓다는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를 비난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직업이 남들에게 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황금률을 정했고 이는 인간 밀매가 불자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임을 의미한다.


관용과 화합

 붓다는 또한 관용과 자비, 자애, 비폭력을 설했다. 다른 종교를 경멸하지도 비하하지도 말라고 가르쳤다. 『칼라마 숫타(Kalama Sutta)』에 의하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붓다 자신의 가르침 역시 개인의 이성적 논리에 부합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다.
붓다 당시에 인도에는 마가다국, 코살라국 등의 큰 왕국들이 다수 있었고, 이들 중 일부는 민주 정부 형태를 설립했다. 붓다는 과두정치보다 민주정치를 선호했는데 그것이 사회 안정을 가져오는 최선의 정부 형태였기 때문이다.
 붓다는 왓지국이나 리차위족을 매우 칭찬했다.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Sutta)』에서 붓다는 리차위족을 삼십삼천에 비유했다. 또한 아자타삿투 왕의 대신이었던 와사카라에게 말하기를 왓지국이 일곱 가지 쇠퇴하지 않는 법(아파리하니야담마, aparihāniya dhamma)을 준수하는 한 왓지국을 꺾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일곱 가지 법은 다음과 같다 : 
① 자주 모여 논의한다. ② 행동의 화합 ③ 법령과 전통의 준수 ④ 연장자 공경
⑤ 여성을 존중하고 성폭행하지 않는다. ⑥ 영토 안이나 밖의 성소를 공경한다.
⑦ 영토 내의 아라한 보호

 붓다는 이어 말했다. “왓지국 사람들이 자주 만나 회의하고, 화합 속에 모이고 해산하는 한(그리고 다른 복지 규칙을 지키는 한) 이들은 멸하지 않고 번영하리라."

아소카왕 재위

 아소카왕은 불교 전파를 위해 쉼 없이 노력했고 불교를 세계 종교로 변화시켰다. 재위 중 아소카는 공공 정원을 만들어 약초를 재배했고, 길가에 가로수를 심었으며, 인간과 동물을 위한 병원도 설립했다. 공공 우물을 팠고, 나라 전역의 교육기관과 종교기관이 성장했다.
 성 평등을 최초로 이룬 사람도 아소카라는 주장이 있다.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과 공주를 실론에 보냈기 때문이다. 이 광대한 제국에서 아소카는 모든 백성을 동일한 정의로 대했고, 카스트나 계급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민주적 사고의 형성은 기원전 3세기 고대 인도에서 불교가 확산되면서 이루어졌다. 저서 『인도의 유산(Legacy of India)』 서문에서 전 인도 총독이었던 제틀랜드경(Lord Zetland)은 말한다. “2,000여 년 전 인도의 불교 법회에서 오늘날 시행되는 의회제도의 기본적인 체계가 있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말라라세케라(G. P. Malalasekera) 교수는 말한다. “대아시아 대륙에서 한 국가에서다른 국가로 불교는 유혈 사태 없이 확산되었으며, 이는 그 자체로 다른 어떤 세계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민주적인 과정이다.”

- 1963년 부처님 오신 날에 발간된 『세계 불교W(orld Buddhism)』에서 인용

발췌・번역|로터스불교영어연구원

 


붓다다사 커티싱헤(Buddhadāsa P. Kirthisinghe) 불교 저술가. 두 개의 불교 저술로 잘 알려져 있다. 첫째 그가 편집한 『불교와 과학(Buddhism and Science)』은 1984년과 1993년 델리에서 출판되었다. 둘째 아마라수리야(M. P. Amarasuriya)와 공저로 『올코트 대령: 불교에의 공헌(Colonel Olcott–His Service to Buddhism이)』 1981년 스리랑카에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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