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성제(集聖諦), 타는 목마름 같은 욕망에 대하여

[현대인의 삶을 바꾸는 사성제(四聖諦)] 



고뇌의 뿌리, 갈애

고타마 붓다에 의해 2,500년 전에 시작된 불교는 경전의 형성과 수행자 집단의 조직 등을 기준으로 봤을 때 세계 4대 종교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다.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 중 고집멸도는 특별히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의미에서 사성제라고 불린다. 그런데 불교의 성스러운 진리는 다른 종교와 달리 저 심원하고 광대한 우주의 시작과 끝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러한 우주를 자유자재로 제어하는 절대 신격의 얼굴이나 그들의 가계도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보다 붓다의 물음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곳에 있었다. 즉, 왜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많은 소유물을 획득하여도, 아무리 강렬한 쾌락을 맛보아도 바로 다음 순간이면 또 다시 불만족 상태에 빠지는가? 붓다는 이러한 불만족 상태야말로 우리 삶을 괴롭게 만드는 두카(duḥkha), 즉 고(苦)라고 규정하였다.

이어서 불만족의 원인으로 시선을 옮긴 붓다는, 고뇌는 마치 뜨거운 태양 아래 타오르는 목마름과 같은 갈애(渴愛, taņhā)에서 기인함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듯한 강렬한 욕망에 이끌리고 그것은 여러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갈애와 그로 인해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은 이번 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갈애 등의 욕망을 기반으로 한 집착은 그 힘이 너무도 강력해서 다음 생, 또 그다음 생…. 에서도 기어이 그 열매를 맛보려고 한다. 마치 끝없이 이삿짐을 쌌다가 풀기를 반복하듯이 갈애는 우리를 무한한 윤회 속에 던져놓는다. 이러한 갈애와 채워지지 않은 불만족과 그로인한 반복된 윤회에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는 관여하지 못한다. 철저하게 내 마음 속에서 자라난 갈애가 옳지 못한 행위에 불을 지피고 그 결과 고뇌의 삶을 이어갈 뿐이다.

갈애의 원인, 느낌

이제 갈애의 원인을 찾는 작업도 명료해진다. 어느 구름 위에 앉아서 우리를 굽어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존재를 경배하고 예경해서는 갈애를 끊을 수 없다. 붓다는, 갈애를 차단하기 위해 갈애가 일어나는 기반을 묻는 사리푸트라의 물음에 그것은 바로 느낌이라고 알려주었다. 갈애는 느낌이라는 조건이 갖춰지면 발생한다. 우리는 모두 눈·코·귀·입·피부·생각 기관이라는 여섯가지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들 감각 기관을 통해 끊임없이 들어오는 모양·향기·소리·맛·감촉·해석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의 마음은 언제나 감각 기관의 대상을 향해 떠돌아 다닌다. 이때의‘느낌’은 감관을 통해 들어오는 1차적 정보를 의미하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정서, 감정의 단계는 아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욕계(欲界)라고 부를 때‘욕’은 불타오르는 욕망 정도의 의미는 아니다. 감관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 속에서 만들어진 세상을 뜻한다.

이와 같이 붓다의 진리를 접하지 못한 이들은 느낌을 기반으로 격렬한 감정을 일으키고, 그를 붙잡기 위한 집착을 낳고, 그 집착은 다음 생으로 삶을 밀어넣는다. 그런데 감관을 통해 들어오는 느낌은 조건 반사적으로 일어난다. 연기법의 진리가 그렇듯이 조건이 주어지면 결과가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사람들은 좋지 못한 느낌을 접촉하면 감각적 즐거움을 통해 이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즐거운 느낌을 받아들였을 때의 내 몸이 영원히 존재할 것 같고, 그 몸의 즐거운 느낌이 행복이라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혜가 자라나지 못한 이들은 존재한다고 믿어의심치 않는‘나, 내 몸, 자아’의 행복과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감각적 즐거움 외에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른다.

그러나 붓다는 이렇게 감각의 즐거움을 채우는 방법으로는 슬픔과 비탄만이 계속된다고 보았다. 마치 타오르는 마른 갈대 숲에 기름을 끼얹듯, 자식이 있는 이는 자식 때문에, 많은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슬픔에 빠질 뿐이다. 그러나 집착을 소멸한 자에게 슬픔이 없다. 이와 같이 느낌에 기반한 갈애, 갈애로 인한 무한한 집착의 발생 구조를 간파한 붓다는 다음 단계로 느낌을 소멸하는 방법으로 시선을 돌렸다.

갈애의 소멸

불교에 대한 여러 오해 중 하나는 깨달은 자를 초월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렇다면 ‘성불하세요’라고 덕담을 나눌 때 깨달음을 얻어 성불한 이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열반에 가까워 노쇠해진 육체를 가진 고타마 붓다는 안거 중에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그는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 끈에 묶여서 겨우 움직이듯’ 여래의 몸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우리 모두 인간으로 태어나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는 이상 들어오는 느낌을 막을 수는 없다. 즉, 느낌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다. 따라서 들어온 느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바로 범부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훈련과 그로인한 지혜의 눈이 열린 이들은 즐거운 느낌이 들어올 때 ‘즐거운 느낌이 느껴진다’고 분명하게 알 뿐이다.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역시 그렇게 알 뿐이므로 다른 갈망으로 집착의 불길이 옮겨가지 않는다. 그 역시 조건되어 발생되었다가 흩어질 뿐이고, 느끼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현상만이 있을 뿐임을 명철하게 알 뿐이다.

최상의 행복이라는 착각을 주는 느낌들은 영원할 수 없다. 수행자는 감각 기관과 대상이 인연따라 만났다가 곧 흩어질 뿐이라는 무상(無常)의 원리를 통해 느낌의 둘레에서 벗어난다. 그것이야말로 저 하늘나라의 누군가에게 비는 대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노쇠한 붓다에게 병든 육체에 의한 아픔은 있었을지언정 그는 마음챙김을 통해 그 느낌이 또 다른 절망과 비탄으로 이어지는 것을 차단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는 신이 되려는 가르침이 아니다. 들어오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되, 그것이 갈망과 슬픔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진리이며 그것이 집성제의 교훈이다.

갈애는 결국 ‘나’에 대한 환상의 부산물

집성제의 가르침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더욱 큰 울림이 있다. 현대인들은 그 어느때 보다 감각기관으로부터 들어오는 느낌에 강하게 얽매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손안에 들어온 스마트폰은 24시간 내내 전 세계의 일들로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영양이나 건강보다 코와 혀를 즐겁게 해주는 음식을 터치 한 번으로 내 눈앞에 도착할 수 있게 해 준다. 그 뿐만 아니다. 스마트폰은 터치 한 번에도 특별한 진동과 소리가 나도록 설계되어 나의 작은 촉감에도 도파민을 분비하게 한다. 그렇다면 고집멸도의 ‘어려운’ 가르침보다 글루타메이트, 에피네프린, 엔도카나비노이드 등과 같은 신경전달 물질을 조절하는 약을 먹으면 느낌에서 벗어나 갈애를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유물론을 기반으로 이룩한 현대과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정신활동이나 생명현상을 특정 물질 작용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18세기 라이프니츠의 ‘방앗간 사고실험’처럼 방앗간을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톱니바퀴, 지렛대 등의 부품 활동만 있을 뿐 ‘방앗간 정신, 방앗간 아트만(본질)’은 발견할 수 없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복잡하고 질서정연한 개미왕국 역시 개미 각자의 활동이 있을 뿐 ‘개미왕국 정신, 개미왕국 아트만’은 없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도 신경전달 물질을 포함한 육체와 정신 작용의 다섯 덩어리가 ‘나’, ‘나의 정신’이 있다는 믿음을 빚어낼 뿐,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갈애로 부터 완전히 벗어나 해탈을 이루는 길은 느낌을 향유하는 자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착각을 끊을 때 가능해진다.

 

정상교|금강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東京)대 대학원 인도철학-불교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유튜브 채널 ‘헬로붓다TV’에 출연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도쿄대학 불교학과 - 소설보다 재미있는 불교 공부』, 『천번을 부셔져도 그대는 여전히 바다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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