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
다시 불교를 보다
–문학 속에서 ①
이수정
창원대학교 철학과 교수・대학원장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고요에 든 후 이천 수백 년. 그의 가르침인 불교는 하나의 거대한 ‘종교’가 되어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침투했다. 그 전경을 보면 참으로 넓고 깊고 높고 그리고 길다. 이런 것을 우리는 ‘위대하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불교는 모든 위대한 것들이 그러하듯이 때가 묻고 먼지가 쌓이는 그래서 핵심을 놓쳐버리는 탈본질의 병폐를 겪기도 했다. 말하자면 불교에서 ‘불(부처)’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교회에서 예수가 뒷전이 되는 격이다. 철학에서는 이를 형식과 껍데기만 남는 형해화라 부르기도 한다. 변질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덧칠’이라 부르기도 했다. 끊임없이 ‘다시’가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어쩌고 하는 것도 조심해서 들어야 한다. 그런 선담은 아주 멋있게 들리기도 하고 충분한 의미도 있긴 하지만, 행여라도 부처와 그의 가르침이 경시되거나 도외시된다면 그것 역시 불교가 아니다.
그래서 불교도 또한 끊임없이 다시 부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출발점이 바로 ‘초전법륜’에서 확인되는 고집멸도, 즉 4성제다. 고에서 멸로 향하는, (즉 ‘도’[度]라고 하는) 지극히 단순한 행정인 것이다. 이런 단순함을 우리는 문학 (특히 여러 소설)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은 허구로 지어낸 이야기지만 부처 본인이 애용했던 ‘방편’의 하나로써 대단히 유의미한 효용을 지닌다.
조설근(曹雪芹)이 쓴 중국 고전 『홍루몽(紅樓夢)』에 나오는 중과 도사의 노래 ‘호료가(好了歌)’는 그런 점에서 압권이다. 어린 고명딸을 유괴로 잃고 집마저 불타 처갓집 신세를 지며 인생사의 괴로움과 허망함을 온 삶으로 느낀 선비 진사은(甄士隱)을 출가로 이끈 노래지만, 실은 주인공 가보옥(賈寶玉)과도 무관할 수 없다. 대갓집 영국부의 귀한 아들로 태어나 금지옥엽으로 자라고 할머니를 비롯한 온 집안 여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임대옥(林黛玉)이 병으로 죽자 그 또한 허망함을 절감하고 이윽고 진사은이 그랬던 것처럼 중과 도사를 따라 출가한다. 과거급제의 영광을 뒤로하고, 그리고 아내가 된 설보채(薛寶釵)와 유복자를 남겨둔 채. 그 비극적 배경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노래다.
世人都曉神仙好, 惟有功名忘不了. (세인도효신선호, 유유공명망불료)
古今將相在何方, 荒塚一堆草沒了! (고금장상재하방, 황총일퇴초몰료)
世人都曉神仙好, 只有金銀忘不了. (세인도효신선호, 지유금은망불료)
終朝只恨聚無多, 及到多時眼閉了! (종조지한취무다, 급도다시안폐료)
世人都曉神仙好, 只有嬌妻忘不了. (세인도효신선호, 지유교처망불료)
君生日日說恩情, 君死又隨人去了! (군생일일설은정, 군사우수인거료)
世人都曉神仙好, 只有兒孫忘不了. (세인도효신선호, 지유아손망불료)
癡心父母古來多, 孝順子孫誰見了! (치심부모고래다, 효순자손수견료)
사람이 모두 신선이 좋은 줄 알면서도/
오직 공명 두 글자를 잊지 못하네/
그러나 고금의 영웅재상이 지금 어딨나/
모두 거친 무덤 한 무더기 풀로 사라졌네 사람이 모두 신선이 좋은 줄 알면서도/
단지 금은보화를 잊지 못하네/
어둡도록 바둥대며 돈을 벌어서/
요행히 부자 되어도 흙에 묻히네 사람이 모두 신선이 좋은 줄 알면서도/
단지 아내의 정에 끌려 되지 못하네/
남편이 살았을 땐 하늘처럼 섬겨도/
세상 먼저 떠나면 팔자 고치네 사람이 모두 신선이 좋은 줄 알면서도/
오직 자녀의 정에 끌려 되지 못하네/
자식 사랑으로 눈먼 부모는 저리 많아도/효도하는 자손을 어느 누가 보았나/
이 노래는 뭇 인간들이 인생의 지표로 삼는 부귀공명의 허망함을, 그리고 처자식에 대한 사랑의 허망함을 조명한다. 이런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실제 삶의 거의 대부분임을 생각해보면 그 무게가 예사롭지 않다. 이런 고(dukkha)와 공(śūnyatā)의 인식이 진사은과 가보옥을 출가로 이끈 것이다. 일체개고의 그 ‘고’요, 오온개공의 그 ‘공’이다. 이는 구조상 부처의 사문유관과 유관하고 부처 본인의 출가 수도와도 통하고 그의 깨달음 및 가르침과도 맥을 같이한다.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다 공임을 비추어보고 모든 괴로움을 건너갔다고 하는 그 ‘건너감’(도度: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로 이런 게 진정한 불교인 것이다. 물론 진사은과 가보옥의 출가 이후는 생략되어 있다. 이 생략된 여백에는 아마도 치열한 8정도가 있을 것이고, 반야 바라밀다(지혜 수행)가 있을 것이고 기대컨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완전한 깨달음)와 구경열반(궁극의 해탈)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21세기 현시점에서 불교라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게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에 그쳐서는 곤란할 것이다. (물론 이것만 해도 요즈음 우리 시대가 보여주는 질척한 욕망의 추구나 살벌한 싸움질에 비하면 백배 낫기는 하지만) 부디 부처의 원점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의 육성이 들리고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저 녹야원으로. 저 콘단냐의 옆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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