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정상입니다 | 살며 생각하며

살며 생각하며


지극히 정상입니다


홍영선 

수필가



 어깨와 목이 앞으로 굽고 등이 둥글게 보였다. 나이 들면서 변화가 생긴 곳은 어깨만이 아니었다. 숱이 많던 머리카락이 빠지면서 내 정수리는 벼 벤 뒤의 논처럼 휑하게 비었다. 그뿐 아니라 단기 기억력도 줄었다. 금방 사용한 자동차 열쇠나 스마트폰의 위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열쇠, 안경, 지갑, 스마트폰을 놓아두는 위치를 정해두었다. 어떤 때는 외출 전 다림질을 하고 전기 코드를 뽑았는지 기억하지 못해 집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돋보기 없이는 책을 읽지 못한다. 약병이나 화장품 병에 있는 잔글씨를 읽지 못한 지 한참 되었고, 몇 년 전부터는 책이나 논문의 주석도 읽기 어려워졌다. 애써 책을 읽어도 이해가 잘되지 않아 몇 번을 다시 읽는 경우도 생겼다. 그나마 스마트폰은 큰딸이 글자를 키워주어서 다행이었다. TV 자막의 작은 글자는 구분이 되질 않아 돋보기를 쓰고도 가까이 가서 읽는 경우가 다반사다.
 듣는 데에도 문제가 생겼다. 조금만 거리가 떨어지면 소리는 들려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동문서답을 하거나 대답을 못하기도 한다. 또 그토록 좋아하던 코미디 프로를 요즈음 잘 안 본다. 젊은이들의 유행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잘 못 들어 단어 하나라도 놓치면 내용의 흐름까지 놓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근육의 힘도 약해지고 지구력도 많이 줄었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때 반응 속도가 느려져 뜻하지 않은 상처를 입기도 했다. 또 주변 상황 변화에 대한 이해가 느려졌기 때문인지 자동차 운전 속도도 전보다 줄었다. 나이를 먹으면 생길 수 있는 변화인 줄 알면서도 처음에는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세월이 비껴갈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렇다고 그런 변화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것을 싫어했던 나는 머리를 감으면 말리고 빗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요즘에는 머리카락이 줄어 시간이 별로 들지 않는다.
 기억력이 쇠퇴한 것을 인정하고 나서는 기록하고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시력과 청력이 떨어진 덕에 TV를 보는 시간이 줄었고 대신 서예나 목각 같은 다른 취미 활동을 할 시간을 얻었다. 또 대화할 때는 가급적 가까이 가서 눈을 쳐다보며 말한다. 그 덕에 더 친밀해지고 서로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전보다 이해력이 떨어진 대신 참을성이 커지고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젠 웬만한 남의 잘못은 용서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기야 나도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 아직도 옛날 버릇이 남아 있어 간혹 발끈할 때도 있지만 그 횟수나 정도가 현저히 줄었다. 그래서 아내가 무척 편안해하는 것 같다. 또 주변의 변화에 대한 반응이 느려진 대신 서두르지 않고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며 즐기는 느림의 미학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유행가 가사처럼 늙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익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기능이 약해지고 쓸모가 없어지는 퇴화의 과정만이 아니라 술처럼 잘 익어서 맛과 향이 좋아지는 숙성의 과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늘어나는 마음과 신체의 부조화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일어나는 실수마저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여기는 관대함이 여기에 가미된다.
 대학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던 시절, 한 환자가 암 검사를 하고 결과를 확인하러 왔다. 걱정이 되어서인지 진료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서성거렸다. 내눈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내 입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다행히 검사 결과에 아무 이상이 없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상입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 환자는 그때서야 내 말을 알아듣고 환하게 피어났다.
 우리 집에서는 언제부턴가 이 말이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나나 아내가 실수를 할 때면 서로 이 말을 나눈다. ‘지금 그 실수는 나이가 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니 괘념치 말자’는 뜻이다. 이 말은 마술 주문처럼 작용해 서로의 마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실수로 불편하던 마음을 순식간에 치유해준다.
 며칠 전 아내와 저녁을 먹다가 팔꿈치로 국그릇을 잘못 건드렸다. 국물이 쏟아져 식탁에 흥건하게 고였다. 나는 미안해서 아내의 눈치를 보았다. 아내는 행주를 가지러 싱크대로 가면서 말했다.
 “정상입니다.”
 아내의 말에 마음이 편해졌다. 나도 웃으며 화답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갑자기 식탁 주변이 환해진 것 같았다.


홍영선 『에세이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장을 지냈고, 현재 일현수필문학회 회장이자 서초문인협회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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