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계를 논해야 하는 이유 | 21세기 보살계 1

지금 여기의 계를 

논해야 하는 이유


윤원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



인간이 여느 짐승과 다른 점 중에 하나가 자기 자신을, 또 자기가 처한 상황과 환경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안다는 것이다. 하나의 개체 생명으로서는 모든 것을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만 알아차리고 이해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벗어나서 바깥의 입장에서 자신과 상황을 바라볼 수 있다.

개체 생명체에게는 자기 몸뚱이가 절대적인 존재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 한 몸뚱이의 한계를 벗어날 줄 아는 묘한 능력이 있다. 그 점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이 작고 무상한 몸 하나에 갇혀 있지 않고 공간적으로 더 크고 시간적으로 더 긴 안목을 체득하고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인성의 기본 요건으로 꼽히며, 심하게 부족한 사람은 소시오패스 또는 사이코패스라는 병적인 상태, 비정상인 상태로 본다.

대개 사람들은 그렇게 어느 정도까지는 자기를 확장할 줄 안다. 자기 이외의 존재들에게 동체 의식을 지닐 수 있다. 그것도 시공간적으로 가까운 존재들에 국한하지 않고 얼마든지 그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 자기가 처한 공간과 시간에 갇히지 않고 개체 생명체로서의 한계를 넘어 의식을 넓힐 수 있다.

그런 인간 의식 확장의 끝판왕이 종교다. 종교는 인간의 상상까지도 넘어서는 한계 없이 넓은 공간과 무한히 긴 시간의 범위까지 제시하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그 지혜와 능력을 최대치 내지 무한대로 함양하고 발휘하는 데 매진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가히 인류의 지혜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종교도 질병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고 치료하는 의학, 의술과 비슷하다. 인간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알려준다. 종교에 따라 관심사와 표현이 다양하지만, 인간이 처한 현재의 실정은 바람직한 상태에 비추어보건대 뭔가 어긋나거나 모자라거나 거리가 멀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그 핵심이 ‘인간 개조’다. 하나의 개별 생명체로서 태어났으니 생물학적인 본능에 충실히 사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 여긴다면 인간다운 삶일 수 없고 지혜라는 개념을 갖다 붙일 수 없다. 개체로서의 본능과 의식에 안주하려는 성향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을 확장하기 위해 그 이유와 방법의 가르침을 받아 배우고, 그 실현을 위해 애쓰는 노력이 필요하다. 폐쇄적인 개체성을 초월해 자기를 확장하고 비우고 활짝 열어젖히려는 개조・개혁은 본능에 거스르는 방향이기 때문에 고단한 일일 것이다.

그 확장의 범위가 넓을수록 당연히 더 어렵고 힘든 일이며 그만큼 더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자기 가족을 마치 한 몸인 듯, 아니 때로 제 몸보다 더 귀중한 듯이 아끼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본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또한 아름답고 고결한 사랑이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자비’라고 하지는 않는다. 본능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 관심과 사랑과 동체 의식을 발동해야 비로소 자비희사(慈悲喜捨)라고 한다. 더욱이 그렇게 하는 마음의 크기와 적용의 범위가 무한해야 한다고 해서 자비희사를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이라고 일컫는다.

부처님을 수식하는 말 중에 대자대비(大慈大悲)는 무한히 자비롭다는 뜻이니, 그 범위가 한정되지 않고 모든 중생을 아우르는 무한한 사랑을 클 대(大) 자 두 개로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의 자아는 모든 중생, 온 세상과 동체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불교의 교리 개념이 연기법(緣起法)이다. 부처님을 포함해서 세상 모든 존재가 겉으로는 각자 절대적인 개체로 보일 뿐이지만 기실은 그 모두가 연기법으로 얽힌 한 몸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을 따르는 불자(佛子)들이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는 포인트가 무엇이어야 할지 묻는다면 바로 그것을 가지고 답변할 수 있다. 즉 개체성에 사로잡힌 의식을 깨고 연기적 존재로서의 자신과 온 세상의 정체를 깨우치고 거듭나서 부처님만큼이나 무한한 자아 확장을 이룩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한”, “무량”, “아주 큰” 등의 표현은 우리의 가슴을 웅대하게 해주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참 막막하게 하기도 한다. 조건이나 이유나 방법, 구체적인 목표지점이나 단계 설정 없이 그냥 온전히 모든 에너지를 쏟아서 정진하라는 얘기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 생활 속에서 자기 개조의 수련을 열심히 해보려는 진지한 불자들에게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수행 방편의 처방이 필요하다.

방편은 병에 대해서 처방하는 약처럼 효과가 중요하다. 의도하는 효과, 즉 개체적인 자아를 극복하고 자기 자신을 확장해 연기적 존재로서 거듭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떤 방법이든지 좋은 수행 방편으로 활용될 수 있다. 또한 어떤 수련이 효과가 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렇게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는 수행 방편 중에 그래도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즉 범용(汎用)의 방법을 선별해 불교 신행의 표준이자 규범으로 만든 것이 계(戒)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계행(戒行)은 불교 신행 활동의 가장 중요한 기본 항목이다. 삼학(三學), 즉 불자가 배우고 실천할 세 가지 항목인 계정혜(戒定慧)에 첫 번째로 들어가 있다. 육바라밀(六波羅密), 즉 대승보살도의 수행자가 완성코자 매진하는 여섯 가지 항목 중에는 두 번째로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이 게시되어 있다. 결정적으로, 불교 신자가 되고 나아가 스님이 되는 절차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 수계(受戒), 즉 ‘계’를 받고 이를 지키겠노라는 서약이고 ‘계’중에서도 아주 크게 중요한 조항을 범하면 파문될 수도 있을 정도로 위중(威重)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복잡한 생각을 싫어한다. 세상사 어느 것 하나 간단한 게 없으니 필요하다면 그 복잡한 사정들을 두루 살펴보고 들여다보고 파헤칠 줄도 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사정을 늘 그대로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달해주고 하기는 힘겹고 귀찮은 일이다. 그리하여 가급적 간결한 명제로 단순화해서 기억하고 전달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도 흔히 저지르게 된다. 처음에는 꽤 타당성 있는 논리적 연결을 통해서 어떤 유용한 명제를 도출했더라도, 그 근거와의 밀착도가 떨어져서 타당성이 희박해진 뒤에도 고집스러운 선입견으로 남아 여전히 집착한다.

신행의 표준이자 기본 규범으로 확립된 계의 문구들도 사실은 그런 단순화, 일반화의 결실이다. 그런 문구의 계가 나오게 된 이유와 그 정신까지 늘 기억하는 수고는 생략하고, 문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면 신행에 충실한 셈이라고 편안히 생각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계가 수행 방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절대적인 진리인 듯 알게 모르게 착각하는 일이 흔히 발생한다.

그 편의를 위해 단순화되고 일반화된 계 조항과 문구 그 자체에 집착하면서 이것을 잘 지키면 신행을 잘하는 것이겠거니, 자기 자신의 개혁과 확장이라는 효과를 보겠거니 하는 식으로 편히 생각하는 버릇을 경계하는 가르침이 있다. 우리를 번뇌에 빠지게 하는 다섯 가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견해(오견五見) 중에 계금취견(戒禁取見)이 있다. 계금취견은 계에 집착(取)하는 견해를 말한다. 어떤 계가 계로서 처방된 기본 정신은 생각지 않는 채 그대로 따라 하면 좋은 결과가 있겠거니 기대하며 무작정 지키는 단순하고 편안한 태도를 경계하는 가르침이다.

그러고 보면 계금취견에 해당하는 태도는 불교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문제가 되곤 한다.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유신론 전통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명한 것이라고 해서 계명(誡命)이라고 일컫고 그것을 현실 생활에 실제로 적용하는 자세한 조항들을 편찬해 율법(律法)으로 지키도록 한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의 율법주의(legalism, nomism)와 제사주의(ritualism) 세태를 강력하게 비판했는데, 부처님이 계금취견을 경계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참고로 부처님도 당시 브라만교의 제사주의를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했고, 제사주의는 그 속성상 계금취견에 포함된다. 규정에 따라 제사를 정확하게 잘 지내면 좋은 효과를 본다고 믿는 단순한 태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그리스도교 또한 교단이 형성되고 교리가 정해지며 예배 방식이 규정되는 등 제도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율법주의, 제사주의에 해당하는 면모도 불가피하게 대두하게 된 것을 보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게 인간의 고약한 버릇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불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늘 계금취견을 경계하며 씨름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작금의 국제 사회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분쟁에서는 극단적인 율법주의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자기 종교를 믿지 않는 이른바 불신자들은 세상에서 척결해야 할 존재로 규정하고, 이를 실행하는 일에 자기 목숨을 희생하면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하는 문구를 문자 그대로 곧이곧대로 믿으며 대량 학살을 서슴지 않는 테러 사건이 어느새 흔한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 면에서는 종교가 인류 지혜의 총화가 아니라 독선의 매체로 작용하는 것 같다. 불교의 계는 자기 자신의 수련을 위한 것이지 바깥 사람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데까지 적용되는 일은 별로 없으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율법주의와 계금취견이 기본적으로 같은 것임을 생각하면서 진지하게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위에서 계는 방편임을 상기했다. 그럼에도 신행의 표준화, 규범화라는 그 효율적인 기능이 강력하기 때문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형이 필요할 때에도 강렬하게 저항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발휘한다. 불교 교단에 처음 분열이 일어난 것이 바로 계를 변경하려는 시도 때문이었다고 한다. 계의 변화를 논의하는 것은 그만큼 참으로 민감한 사안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늘 그 시대 그 지역의 상황을 관찰하며 선교방편(善巧方便)을 고안해내고자 고민해야 한다. 그런 고민과 노력이 불교라는 종교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생산해내는 필수적인 원천이다. 굳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지금 21세기 이곳 우리의 타당한 계행을 위해 기존의 계행에 대한 검토는 당연히 요청된다. 그런 논의조차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기왕의 전통을 그대로 충실하게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계금취견일 수 있다. 



윤원철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롱아일랜드에 있는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동 대학 종교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불교사상의 이해』, 『똑똑똑 불교를 두드려보자』, 『종교와 과학』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현대의 종교 변용』, 『깨침과 깨달음』 등이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