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마음을 움직인다
건물과 자연이 하나가 된 절
비슬산 대견사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공학 박사
대견사 3층 석탑. 일출부터 일몰까지 3층 석탑에서 바라보는 비슬산의 풍경은 일품이다. |
해발 1,000m에 있는 절을 오르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최소한 두 시간 이상 땀을 흘려야 닿을 수 있다. 그런 높은 곳에 절을 세운 옛 큰스님들의 행적을 그저 칭송할 수밖에 없다. 달성군 비슬산에 있는 대견사도 그런 절이다. 대견사는 신라 헌덕왕 때 지어졌다고 하니 제대로 된 길도 없는 곳에 어떻게 절을 지었을지 그저 감탄만 나온다. 요즘은 대견사까지 버스가 사람을 실어 나르니 대견사에 가면서 땀을 흘릴 일은 사라졌으나 동시에 너덜과 암괴를 감상하며 오르는 기쁨도 사라졌다. 포장된 도로는 등산로와 별도로 나 있기 때문이다.
비슬산자연휴양림에 이르면 등산로 양쪽으로 너덜과 암괴류가 한눈에 들어온다. 비슬산 등산로 우측은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계곡을 가득 메운 암괴, 좌측은 너덜 세상이다. 이 암괴류는 비슬산 정상 바로 밑인 대견사지 부근에서 시작해 산 아래까지 이어진다. 마치 부처님의 말씀들이 바위로 굳어져 쏟아져 내린 것만 같다. 여러 개의 암괴류가 각각 다른 산비탈을 따라 내려오다가 해발 750m 지점에서 합류해 450m 지점까지 이어지는데 길이는 약 2km, 최대 폭은 80m가량이다.
암괴류는 둥글거나 각진 바위덩어리들이 집단적으로 산비탈이나 골짜기에 아주 천천히 흘러내리면서 쌓인 것을 말한다. 바위들이 마치 강물처럼 흐르는 모습을 띠고 있어 ‘돌강’ 또는 ‘바위강’이라고도 부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암괴류로는 영국 다트무어, 미국 시에라네바다, 호주 태즈메이니아가 유명하지만 비슬산의 규모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암괴를 이루는 바위는 규모가 커 조그마한 것이 직경 1~2m이며 직경 10m가 넘는 것도 흔하다. 비슬산을 이루는 화강암은 중생대 말 백악기 때 깊은 땅속에서 뚫고 나온 마그마가 굳어 형성되었다.
그 암괴류들에 감탄하며 산을 오르면 대견사가 나타난다. 거대한 바위들 위에 신기하게도 평평한 곳이 있는데 그곳에 대견사가 있다. 절이라고 해야 땅도 좁고 건물도 다섯 채밖에 없는 아주 작은 절이지만 오른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3층 석탑 쪽에서 본 대견사. 뒤로는 토르가 병풍으로, 앞으로는 토르가 반석으로 있다. |
원래 이름은 보당암(寶幢庵)이었다. 그러나 특별한 유래로 대견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 문종(文宗)이 꿈에서 얼굴을 씻으려고 떠놓은 대야의 물을 보니 아주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고, 꿈에서 깨어난 황제는 그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하고 신하를 불러 꿈속에서 본 경관을 설명한 뒤 절터를 찾았으나 중국에서는 찾지 못하고 신라에서 찾게 되었다. 이 터가 대국의 황제가 보았던 절터라고 해 대견사(大見寺)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다른 설로는 일연 스님이 22세 때 승과 선불장에 장원급제한 후 초임 주지로 부임해 22년 동안 주석, 참선에 몰두하면서 『삼국유사』의 자료 수집 및 집필을 구상한 곳인데, 조선 태종과 세종 때 중수되면서 대견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흔히들 군위의 인각사를 『삼국유사』와 관련해 떠올리지만 일연 스님이 자료들을 모으고 구상한 곳은 대견사인 것이다. 스님은 22세(1227년)부터 44세(1249년)까지 22년 동안 보당암, 무주암(無住庵), 묘문암(妙門庵)에, 59세(1264년)부터 72세(1277년)까지 13년 동안 인흥사(仁興社)와 용천사(涌泉寺) 등에 주석했다. 이 절들은 모두 비슬산에 있으니 무려 35년간 스님이 비슬산에 머문 셈이다.
대견사 전경. 산 정상 토르 위에 선 대견사는 건물이 다섯 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소박하고 작은 절이다. |
대견사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것은 넙적한 토르에 놓인 3층 석탑이다.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각에서는 원래 9층 탑이었다고 하나 증명할 길은 없다. 지금의 석탑은 도굴꾼에 의해 무너져 절벽 아래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1988년 달성군에서 복원한 것이다. 석탑은 대견사 가람 배치와는 무관하게 산 정상 바위 난간에 있어 넓은 시계가 확보된 것을 볼 때 산천 비보 사상에 따라 조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런 배경과 관계없이 3층 석탑에서 바라보는 비슬산은 하염없이 그곳에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다. 날이 맑으면 대구와 현풍 분지는 물론 낙동강도 한눈에 들어온다. 운무가 끼면 또 그래도 일품이다.
적멸보궁. 이곳에서는 대견보궁이라 고 이름을 지었다. 법당 뒤쪽에 진신사 리탑이 보인다. |
건물이 자연을 해치지 않는 곳, 건물과 자연이 하나가 된 절, 비슬산 사방을 둘러보며 마음을 씻고 가다듬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비슬산 대견사다. 이제 10월이면 비슬산에도 단풍이 든다. 대견사를 올라가면서 느끼는 단풍, 대견사에서 내려다보는 단풍을 보며 천 년 역사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대견사는 천 년 동안 여러 번 무너졌다 다시 일어섰다. 특히 한일 강제 병합 이후 1917년에는 대견사가 일본 쪽을 향해 건축되어 대마도를 끌어당기고 일본의 정기를 꺾는다는 이유로 강제로 폐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섰다. 대견사는 한국인의 불굴의 정신을 닮았다.
이종호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 박사 학위와 과학 국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연구했다.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전 2권) 등 100여 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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