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경』은 어떤 경전인가 |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불교 경전 길라잡이

 『능엄경』은 어떤 경전인가


명법 스님 

해인사 국일암 감원



천태지의가 밤낮 서쪽을 향해 기도하며 만나보기를 갈망했지만 끝내 보지 못하고 입적했다는 경전이 있다. 천태지의가 입적한 후 108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중국에 전래된 그것은 바로 『능엄경』이다. 송대 임제종 승려 혜홍각범(慧洪覺範)이 전하는 이 이야기는 중국 스님들이 경전을 구하려고 서역으로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저간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불경에 대한 중국인들의 열망은 상상을 초월한다. 새로운 경전을 중국 스님들이 서역으로 가서 입수해 오거나 서역의 승려들이 가지고 입국했을 때 국가적인 환영을 받았다. 역경 도량을 설치하고 산스크리트와 중국어에 능통한 스님들을 차출하는 등 역경에 관련된 모든 일이 국가의 관리와 지원하에 이루어졌으며 역경 후에는 대장경에 수록해 권위를 부여했다. 

『능엄경』은 대부분의 대승 경전이 한역된 후에도 알려지지 않다가 어느 날 홀연히 대중 앞에 나타났다. 중인도 나란타사에 비장되어 있었으나 불멸 후 본국에서만 유통하고 다른 나라로 가지고 가는 것을 금지한 어느 왕의 명령 때문에 중국에 전해지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개원석교록』에 따르면 『능엄경』은 중천축 사문 반자밀체(Paramiti)가 당 중종 신룡 2년(705)에 범본을 가지고 중국에 건너와 광주 제지사에서 송출한 것을 미가석가가 역어하고 방융이 필수한 뒤 회적이 증역해 남사에 의해 유통되었다고 하며, 또 다른 기록인 『속고금역경도기』에 따르면 회적이 서경 서숭복사에 증의로 참석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 후, 어느 날 광주에서 한 범승을 만나 그가 가지고 온 경전을 함께 번역했다고 한다. 최근 발견된 돈황본에는 번역자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등 국가적인 지원과 승인하에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역경 과정과 다른 경로로 유통된 까닭에 역경에 참여한 인물을 비롯해 범본의 존재 여부 등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다. 현대에 들어와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으로 확증되었지만, 『능엄경』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은 중국에서 유통되던 초기부터 제기되었던 것이다. 

총 10권으로 구성된 『능엄경』은 관정부, 곧 밀교에 속하지만 천태, 화엄, 선종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능엄경』은 어느 한 종파의 소의경전으로 채택된 적은 없지만 그 사상적 풍부함과 논리 정연한 교리 체계, 그리고 유려한 문체로 인해 중국과 한국에서 가장 많이 유통되었다.

당대 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 『원각경』이었다면, 송이나 원・명시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능엄경』이다. 능엄경의 주소(註疏)의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는 특정 종파에 제한되지 않고 여러 종파에서 찬술되었다는 점이다. 송대 화엄종 장수자선(964~1038)의 『능엄경의소주경』과 『능엄경의소주경과』, 천태종 오흥인악의 『능엄경훈문기』, 임제종 계통의 온릉계환의 『능엄경요해』, 명대 진간의 『능엄경정맥소』 등의 주석서가 전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종파의 입장에 따라 경전 해석을 시도했는데, 중당 이후 선종 계통의 능엄경 주소가 25종 이상으로 이 경 주소의 사분의 일에 해당한다.

이후 『능엄경』은 차츰 선종의 대표적인 소의경전으로 확립되어 선사상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경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능엄경』은 신라시대 당나라 유학승들에 의해 전래된 이래, 의천이 편찬한 『신편제종교장총록』에 28종의 『능엄경』 주석서가 정리되어 있으며, 고려 후기 이자현에 의해 선문에 널리 퍼졌다. 특히 수선사를 중심으로 간화선을 실천하면서 그 이론적 기반으로 계환해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고려 후기 개계해를 수정 보완한 보환의 『산보기』가 저술되었고 18세기에는 연담의 『능엄경사기』와 인악의 『능엄경사기』가 유통되었다.  

『능엄경』의 유통에는 인쇄술의 발달도 한몫했는데, 국보 제206-3호로 지정된 고려 고종 22년에 해인사에서 판각한 목판과 충선왕 1년본, 조선 태종 1년에는 신총이 필사한 대자본 등 많은 판본이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한글이 창제된 이후 세조 때 시작된 불경언해사업에서 『능엄경』이 가장 먼저 번역되었다는 사실도 『능엄경』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불교 의례 측면에서도 『능엄경』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할 수 없는데, 고려 중기 선종 6년 능엄도량이 7일간 개설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에서는 일종의 추혼 법회로서 능엄 법회가 몇 차례 개최된 기록이 있다. 또 권7에 수록된 능엄주는 조선시대 승과에서 송경 과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송주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 경전은 이름 속에 경전의 내용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은데, 『능엄경』도 마찬가지다. 『능엄경』의 원래 이름은 다섯 가지로, 그중 세 가지만 따와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印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이라고 하며, 줄여서 『대불정수능엄경』, 『대불정경』, 『능엄경』이라고도 한다. ‘대불정’이란 ‘부처님의 정수리’란 뜻으로 볼 수 없는 진리, 가장 높고 위대한 진리를 비유한다. 이것이 여래의 비밀한 원인(密因), 즉 과덕(果德)에 들어가는 인행(因行)이며, 부처님이 증득하신 대승 진리 중 최고의 진리인 요의법(了意法)이며, 모든 보살이 만행(萬行)을 완성하는 것이다. ‘수능엄’은 ‘완성’이란 뜻이며 ‘모든 사물의 근원을 끝까지 궁구해 절대로 파멸하지 않으며’라고 한다. 『정맥소(正脈疏)』의 서(序)에는 “본래 깨달음이 번뇌에 얽혀 있을 때를 여래장심이라 하고, 맑고 고요한 성품의 당체를 수능엄정이라고 한다”고 해 수능엄정과 여래장의 차이를 밝히고 있으며, 『열반경』에서도 능엄정을 깨달음의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총 10권의 내용은 『화엄경』, 『법화경』, 『유마경』, 『능가경』, 『원각경』, 『해심밀경』, 『대승기신론』 등을 바탕으로 한편으로 여래장 사상을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능엄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래 승려들의 이력 과정 중 사교과 교과로 자리 잡은 이래 오늘날까지 전통 강원에서 학습되고 있는데, “깐깐 기신, 차돌 능엄”이라는 말이 승가에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난해한 경전으로 통한다.  

『능엄경』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규봉종밀(圭峰宗密)에 의해서였다. 종밀은 그의 선교일치와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에 대한 근거로 『능엄경』 10권의 “이치로는 단박에 깨닫는 것이어서 깨달으면 모두 소멸하거니와 사실로는 단박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차례차례로 없어진다”는 구절을 인용했으며, 『원각경』 「보안보살장」의 ‘점수증의 용심(用心)’을 해석하면서 인용했고, 그의 대표적 주석서인 『원각경약소주』에도 『능엄경』을 여러 차례 인용했다.

또한 선취가 풍부하고 학인을 격발시키는 문답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선사들이 제자를 개발하는 방법으로 원용되기도 했고, 경전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던 경우도 많았다. 청원 문하의 현사사비, ‘안능엄’이라고 불린 온주 서록사 서룡우안선사 등이 『능엄경』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송대 임제종 양기파의 환오극근(圜悟克勤)의 『벽암록(碧巖錄)』에는 32칙 「임제일장」의 평창, 46칙 「경청불미(鏡淸不迷)」의 본칙, 78칙 「개사수인」의 본칙, 80칙 「급수상타구」의 평창, 94칙 「능엄불견처」의 본칙과 평창에서 『능엄경』의 선지를 전개하고 있다. 간화선의 주창자 대혜종고는 『대혜보각선사서』 「답향시랑」에서 확철대오하게 되는 과정을 『능엄경』 권10에 나오는 ‘오매항일’을 통해 인증했다. 이후로 오매항일, 오매일여의 경지는 간화선의 관문으로 여겨져서, 고봉원묘, 몽산덕이 등 임제종 계통에서 강조되었다. 원말 몽산덕이가 『법어약록』에 수행의 단계로 제시한 삼정절(三程節)인 동정일여・화두일여・오매일여 역시 원오와 대혜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이 경향은 고려의 태고보우 및 나옹혜근에게 이어졌으며, 나옹선사는 “공부가 이미 동정에 틈이 없고 오매가 항일한 곳에 도달하면 부딪혀도 부서지지 않고 흩어져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현대의 대표적인 선사인 퇴옹성철 역시 『선문정로평석』에서 “오매일여하며 내외명철하고 무념무생하며 상적상조하는 구경무심을 철저히 증득하기 이전에는 득도나 견성이라고 할 수는 절대로 없다”고 하면서 돈오돈수와 오매항일을 대오확철의 근거로 삼았다.

무저도충이 지은 『선림상기전』 권15에 따르면, 선종 사원에서 능엄주를 암송한 것이 당나라 때 북종 신수대사로부터라고 한다. 송대 운문종의 장로자각이 찬술한 『선원청규』에 선원의 각종 의례에 대비주와 함께 능엄주가 빠지지 않고 독송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에서도 이 주문을 외울 것을 권하고 있다.

이상으로 살펴보았듯이 『능엄경』은 송대 이후 불교계뿐 아니라 사대부들 사이에도 널리 읽혀져 중국 사상사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는데, 선사들뿐 아니라 주희를 비롯한 송명대 신유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경전의 진위를 비롯한 여러 가지 논쟁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가르침을 바로 『능엄경』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호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명법 스님 해인사 국일암에서 성원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운문승가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운문승가대학 회주 명성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미학과에서 독일미학으로 석사, 동양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스미스 칼리지에서 박사 후 과정 연수를 마쳤다. 서울대 미학과 강사, 동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상담학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해인사 국일암 감원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 『미학의 역사』(공저), 『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가 있고, 「서양 현대 예술에 나타난 선과 오리엔탈리즘」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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