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의 존재와 삼과(三科) | 불교란 무엇인가

일체의 존재와 삼과(三科)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회장



연기는 모든 존재, 사물, 현상이 나타나는 배후에 일관해서 흐르는 법칙이다. 즉 우주와 인생의 본질을 시간적・공간적・논리적 관계로서 바르게 고찰하려는 것이 연기설이며, 우주와 인생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해 해탈・열반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기 위한 길잡이가 되는 것이 또한 연기설이다. 그러므로 붓다께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연기에 대해 고찰할 때 두 가지 관점에서 이를 파악할 수 있다. 즉 우주와 인생의 객관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일반적 연기와 그러한 연기의 도리를 나 자신의 문제와 결부해 괴로움의 근원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가치적 연기의 둘로 나눌 수 있다. 

불교는 우주의 물리적 관계를 고찰하는 과학도 아니고 단순히 사변에만 머무르는 철학과도 다르다. 불교의 근본 이념은 어디까지나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실체를 바르게 파악해 괴로움의 뿌리를 도려내고 열반에 이르는 데 있다. 연기의 중심에 나를 놓고 나의 실상을 여실히 파악하고 또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연기의 이치에 비추어 괴로움의 원인과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이 가치적 연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가치적 연기도 일반적 연기의 바탕 위에서 설명될 수 있다.  

우리의 현재의 모습은 무한한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 위에서 찰나찰나 변화해가고 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지금의 이 모습은 과거의 많은 경험과 사유의 축적이며, 또한 물리적으로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과 수많은 이름 모를 중생들의 도움으로 유지되고 있다. 여기에 태양・공기・물・바람 등 자연의 도움과 함께 사회적으로도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그리고 누구의 친구, 누구의 상사, 누구의 부하라는 식으로 복잡하게 설정된 관계 위에서 나라는 존재가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지금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걸친 물리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정치적・역사적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위에서 나타나는 찰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연기라는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서 우리의 삶이 영위되고 나라는 존재가 인식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일반적 연기 위에서의 나의 모습이라면, 이 ‘나’라는 존재가 어디서부터 연유해 생로병사를 되풀이하면서 고해의 바다에서 윤회하는가를 내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가치적 연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기로써 우주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하거나 단순한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서만 보는 것은 불교의 근본 이념이 아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인생의 고를 해결하고 해탈을 얻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부합해 고의 발생과 소멸에 대한 종교적・실천적 의미를 지닌 연기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곧 가치적 연기이며 이러한 가치적 연기의 대표적인 것이 십이연기(十二緣起)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으실 때에 명상했다는 것도 이 십이연기였다. 물론 십이연기라는 이러한 가치적 연기도 일반적 연기의 인과법칙 위에서 성립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십이연기는 12가지 항목으로서 연기를 설명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며 십이지(支)연기 혹은 십이인연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12라는 항목에 대해서는 일정하지 않고 경전에 따라 2지・3지・4지・5지로부터 10지・12지 또는 그 이상도 있다. 그러나 항목이 몇 가지가 되었든 그 근본 취지는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종류의 연기는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하며 또 그것은 어떻게 멸해지는가를 분석적으로 나타낸 것으로써, 그 가운데에 십이연기가 대표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십이연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에서 존재 혹은 일체법이라고 일컬어지는 삼과(三科)에 대해 알아야 한다. 삼과는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라는 세 가지 과목으로 일체법을 설명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삼과를 간단히 온, 처, 계라고도 한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그 교리가 매우 체계적이고 분석적이기 때문에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삼십칠조도품,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 숫자로 나누어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법수(法數)라고 하며 이러한 법수를 통해 불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오온이라는 것은 일체법을 개인에 있어서의 일체법인 몸과 마음, 또는 내외에 있어서의 일체법인 물질과 정신으로 보고 이것을 다섯 가지 요소로 구분한 것이다. 오온을 간단히 설명하면 색(色)이라는 물질적인 것과 수(受:느낌)・상(想:표상 작용)・행(行:의지 작용)・식(識:종합적인 마음의 작용)이라는 정신적인 요소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십이처라는 것은 일체법을 감각과 지각의 인식 위에서 고찰해 인식의 주관적 능력으로서의 육내입처(六內入處)와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육외입처(六外入處)의 12가지로 구분한 것이다. 주관적 능력으로서의 육내입처라고 하면 우리가 이것을 통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안(眼;눈)・이(耳;귀)・비(鼻;코)・설(舌;혀)・신(身;몸)・의(意;마음)를 가리키며 이것을 육근(六根)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육외입처는 우리가 바깥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으로서의 색(色;색깔과 모양)・성(聲;소리)・향(香;냄새)・미(味;맛)・촉(觸;촉감)・법(法;인식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의 여섯 가지를 말하는데, 이것을 육경(六境)이라고 한다. 

십팔계는 앞에서 말한 십이처에 감각과 지각을 인식하는 그 자체로서의 육식(六識), 즉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여섯 가지 인식을 더해 18가지로 나눈 것이다. 감각과 지각을 인식하는 그 자체는 각각의 감각과 지각을 인식하는 인식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여섯 가지라는 것이다. 이처럼 육근, 육경, 육식을 합해 18가지의 경계, 즉 십팔계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삼과를 설정한 것은 이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란 우리 앞에 현상으로서 나타나는 일체법을 말하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이 삼과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일체법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인도의 외도들이나 서양 철학 등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본체라든가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연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언급했지만 연기의 세계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은 서로의 관계성 위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그러한 현상을 우리는 ‘세계’라고 부르고 ‘일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시간과 공간 가운데에서 우리의 감각과 지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 말은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으로 인식되는 현상계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영구히 변하지 않는 어떤 실체나 본체는 설령 있다고 해도 우리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우리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면 그것의 존재 여부는 우리의 판단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입증할 수가 없다. 또한 그러한 본체나 실체라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며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수행이나 깨달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는 우리의 인식 세계를 통해 일체법을 설명하고 파악한다. 한마디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현상계뿐이다. 불교의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을 믿는 다른 종교의 허상이 여실히 보인다. 신을 설정해 그것을 믿고 그것에 매달리는 것을 불교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미인을 사모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연기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현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한다. 이것을 행(行)이라고도 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할 때의 행이다. 우리는 이 유위법, 즉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현상계 속에서 생멸변화하며 괴로워하고 기뻐하고 집착하고 싸우면서 살아간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이 현상계 이외에는 어떠한 세계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일체의 현상계를 불교에서는 일체라든가 일체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 이러한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일체라고 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예를 들면 우리가 무엇을 보거나 듣는다고 할 때 그 대상이 되는 것이 없으면 보거나 들을 수 없다. 또 그러한 대상이 있다고 해도 눈이나 귀라는 기관이 없으면 그러한 대상은 파악이 되지 않다. 또 눈과 보이는 것이 있고 귀와 들리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파악하는 인식 능력이 없으면 그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우리가 눈과 귀가 있어도 인식 주체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냄새 맡지도 못한다. 우리가 눈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어서 어떤 대상을 본다고 할 때에 눈과 대상만 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파악이 되지 않는다. 눈을 통해 망막에 비친 것을 시신경을 거쳐 인식하는 작용이 없으면 눈이든 망막에 비친 물질이든 그것은 없는 것과 같다. 

듣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귀가 있어 어떤 소리가 고막에 울려 퍼져도 그것을 인식하는 이식(耳識)이 없으면 그 소리는 없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 인식을 하는 기관, 그리고 인식하는 그 자체 가운데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그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삼과에서는 인식의 대상을 경(境)이라고 하고 인식기관을 근(根)이라고 하며 인식 그 자체를 식(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이러한 근과 경과 식이 동시에 어우러져야 우리에게 비로소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을 근・경・식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어우러지는 삼사화합의 순간을 촉(觸)이라고 한다. 그 촉으로 인해서 우리는 좋다, 나쁘다고 하는 감수 작용이 생긴다. 거기에서 다시 여러 가지 생각이 잇따라 일어나고 종합적인 판단이 서게 되며 그로부터 우리의 기쁨과 괴로움 등등이 생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근・경・식의 어느 하나라도 결여하게 되면 우리에게 현상 세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눈이 장애인 사람은 눈의 세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귀가 장애인 사람은 소리의 세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근과 경과 식의 세 요소가 어우러져야 비로소 우리에게 현상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삼사화합에 의해 보는 세계, 듣는 세계, 냄새의 세계, 맛의 세계, 촉각의 세계, 또 이러한 것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종합적인 생각의 세계가 나타나 우리에게 현상으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 세계의 원리를 설명한 이 삼과를 일체 혹은 일체법이라고 하는 이유다. 

언젠가 붓다께서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 생문(生聞)이라는 바라문이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일체란 것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여기에 대해서 붓다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체라는 것은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뜻과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것은 일체가 아니다. 나는 고타마가 말하는 일체를 떠나 다른 일체를 말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말로만 있을 뿐이며 물어보아도 알 수 없는 것으로 의심만 더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붓다의 말씀처럼 우리의 인식과 경험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안・이・비・설・신・의와 그 대상이 되는 색・성・향・미・촉・법을 제외한 일체란 것은 없다. 이러한 일체를 제외하고 우리의 인식 세계를 벗어난 세계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과학에서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은 모두 현상 세계뿐이다. 본체라든가 실체라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는 우리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 있으며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현상계만이 과학의 대상인 것이다. 자연과학은 자연 현상을, 인문과학은 인문 현상을, 사회과학은 사회 현상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불교에서도 우리의 인식이 미치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만 말한다. 이러한 것만 보아도 불교가 얼마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종교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철학 박사). 전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불교총지종 중앙교육원 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불교총지종 정사이면서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근본불교개설』, 『현대인을 위한 불교 입문』, 『불교 교양으로 읽다』, 『내 인생의 멘토 붓다』, 『관세음보살 예찬문』, 『초발심자경문』, 『대일경 주심품』, 『생활불교, 재가불교』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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