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재가열전|세속에 핀 연꽃
작은 거인, 큰 서원을 펼친 목정배 거사
중생의 번뇌를 열반케 하리
최성렬
조선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미천 목정배(彌天 睦楨培, 1937~2014), 그의 삶은 「현대 한국의 불교 학자」, 「세제(世諦) 불교로 미래 불교를 설계하다」로 이미 두 번이나 조명을 받았다.
불교 학자로서의 삶도 그랬지만 재가 불자로서의 삶에도 대단한 열정을 보였다. 특히 그가 설립한 (사)대한불교법사회는 “불교 정법의 홍포선양·중생 제도의 정토건설”에 목적을 두고 있다.
창립 33년째요, 그의 열반 7주기가 지났을 만큼 세월도 흘렀다. 그런데도 근본 도량 약수법사가 거느린 지원은 7곳으로 늘어났고, 그때부터 발간했던 『법수레』도 335권째 잘 굴러가고 있다. 그 저력의 원천을 나·우리 그리고 모두들의 기억 속에서 또 한번 꺼내본다.
나
불교학과에 입학하고 나서 하루는 불교문화연구소를 찾았다. 거기 있는 선배 조교가 커피도 준단다. 그 조교가 미천이다. 듣던 대로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니 어디서 왔노?” “예, 저 선산에서 왔습니다” “아, 그~가 신라 불교 발상진데, 니 알고 있나?” “네, 조금은요.” “그래, 제대로 왔네.” 그렇게 살갑게 대해주던 선배였다.
미천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도 참선을 끝내고 불교문화연구소를 들렀다. 교정의 성상이 바라다보이는 편한 공간이다. “목 선생님(우리는 그냥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이기 무슨 뜻입니까?” “뭐 말이고?” “참선할 때 그 선(禪)이란 거 말입니다.” “아, 그기 말이다. ‘禪’이라 카는 글자를 파자해봐라, 보일 시(示) 자에, 홑 단(單) 자 아이가.” “그런데요?” “마음을 단적〔單; 전체로서의 하나〕으로 보여주는〔示〕 그걸 禪이라 카는기라. 참 쉽제?”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뭔가를 느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마음과 화두가 하나 되게〔打成一片〕, 뭉뚱그려 나타내 보인 것 그것이 선이란다.
그날 이후 나는 미천에게 꽂혔다. 빈 시간이거나 공강 때는 어김없이 연구소를 찾곤 했다. 청소, 공문 수령 등 조교의 잡무를 도우며 더 친해지고 싶어서였다. 그게 고마웠던지 미천도 가끔 복본이 있으면 내게 주는 호의를 보였다. 틈만 나면 책장을 기웃거리는 나를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때가 고마운 것은 불교학의 기본 지식, 원고 교정, 한문 독해, 한시 등 공부의 기본 소양을 충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국역경원에서 한글 대장경 교정지가 나오면 미천이 초교를 끝내고 2교부터는 늘 내게 맡겼다. “이거 함 봐라.” 그리고 OK는 다시 미천이 끝내고.
그뿐만이 아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난 후에도 미천은 내 앞길을 터준 도사(導師)였다. ‘너, 내’가 아닌 불이의 인간미, 그는 진정한 ‘나’의 멘토요 선지식이었다.
우리
내게만 그랬던 것일까? 아니다. 1997년 3월 24일, 미천의 회갑연에 봉정된 미천 목정배 박사 회갑기념논총 『미래불교의 방향』이 그걸 말해준다. 미천을 따랐던 신진 학자들 51명이 마음을 모으고 뜻을 모아 논문을 보내오고(나도 「화엄경 여래출현품 연구」 한 꼭지를 보탰다), 수안 스님 등 이 보낸 축하의 시화 다섯 편을 더하니 장장 1,115쪽의 멋진 논문집이 되었다. 백성욱 박사 송수 기념 『불교학논문집』의 영향임을 나는 잘 안다. 미천의 야망과 포부를 느끼기에 그렇다. 그리고 책 뒤에 밝힌 은법 학인 숫자는 무려 68명이나 된다.
놀라운 사실도 있다. 송석구 총장, 지난달 열반하신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 이재창 금강대 총장, 고려대 김정배 교수 등 종교계와 학계가 함께한 자리였다는 점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동국국악관현악단, 중앙불교합창단의 연주와 합창, 명창 안숙선·김영임 그리고 연극계의 대모 김성녀, 김덕수 사물놀이는 앰배서더호텔 무대를 들썩였다. 생소했지만 미택호(米澤浩)의 샤쿠하치(尺八: 대나무피리)와 미택영리자(米澤榮利子)의 고토(箏: 가야금과 비슷한 일본의 현악기) 연주는 미천의 30여 년 적공을 말해준다.
그리고 미천의 『미천 시송가』, 『마음 노래 하늘 위에』, 『미천 불명시축송』 등은 좀 독특하다. “세상의 일들을 절(寺)에서 올리는 말(言)로 바꾸고 싶어 (…) 새벽녘에 향불을 사루어 놓고 한 장씩 쓴” 불명시를 모은 것이다. 『미천 불명시축송』에만 207명이 되니 세 권을 다 합치면 700명은 족히 될 법하다.
미천의 회갑을 축하해주신 그들도 나처럼 미천에 뿅 간 사람들이다. 미천의 포용력에 ‘우리’가 된 미천의 영원한 멘티들인 것이다. 미천은 그렇게 수미산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모두들
미천의 생애에서 불교문화연구소와 교사 편찬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교사 편찬은 60년사(조명기 총장), 65년사(김동익 총장), 70년사(이선근 총장) 이렇게 세 번을 기획했었다. 세 번째 기획인 70년사는 1975년 10월 이선근 총장이 개교 7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추진된 일이다.
이 총장 부임 다음 해가 개교 70주년, 그래서 택한 것이 동대 70년사 편찬이었다. 미천에게 간사역을 맡겨 추진하게 했는데 불교신문 기자 이력에다 65년사 편찬 때의 경험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 무렵 미천은 전임 강사이기도 했다. 마침내 미천이 그 일을 해냈다. 1906~1976년까지의 동대칠십년사(1976년 5월), 두 차례 시도에도 못했던 일이다.
본관 지하층에 있던 편찬실은 미천의 연구실이기도 했다. 열 평도 안 되는 협소한 공간이었지만 그 또래 교·강사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비교사상연구소 이민용, 박물관 문명대, 철학과 김항배, 경찰행정학과 이황우 교수 등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불교문화연구소를 자주 찾았던 인도철학과 서경수·이기영, 철학과 정종·김용정, 국문과 서정주, 사학과 이용범·안계현 교수 등도 여전히 미천을 격려했다.
이때 미천은 애칭은 지하 총장이었다. 이선근 총장의 총애 덕분이다. 교사 편찬 외에도 법당 건립 및 운영, 불전간행위원회 등 종립학교의 위상에 걸맞은 여러 보직을 수행하고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를 이전코자 부지를 물색하던 이 총장이 몇 차례 그를 대동했던 일은 지하 총장 이상의 어떤 예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랬던 미천이 마침내 지상 총장이 되었다. 2002년 정년에 이어 모교는 아니었지만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영입된 것이다. 남다른 친화력, ‘그리고 모두들’이 꽃으로 피어나게 한 것이다.
이제 “머리를 깎았든 깎지 않았든 우리가 모두 불교의 중심”이라는 미천의 철학은 영원한 화두로 남을 것이다. 미천이 지은 「거룩한 손」은 박범훈이 곡을 붙여 김성녀가 노래한 것이다. 마지막 구절로 이 글을 맺는다.
보시 회향이 노래 되어 사바 괴로움 맑게 씻으면,
보살의 바라밀 극락심 되어 중생의 번뇌를 열반케 하리.
먼저 가본 저세상, 어떤 가요 미천보살!
아, 미천보살! 미천보살!
최성렬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철학 박사). 조선대 인문과학대학 철학과 교수, 동 대학 고전연구원장과 인문과학대학장 및 범한철학회회장, 새한철학회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조선대 철학과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사단법인 녹양고문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보조 수심결의 일고찰」, 「원돈성불론의 십신에 대하여」, 「간화결의론의 분석적 연구」, 「보조의 화엄신론 이해」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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