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감옥’으로부터의 자유 | 살며 생각하며

살며 생각하며


‘생각의 감옥’으로부터의 

자유


정계섭 

전 덕성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20세기 미국이 낳은 위대한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나는 생각한다(I think)”는 잘못된 표현이라는 심오한 진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비가 온다(It rains)”, “바람이 분다(It blows)”처럼  비인칭화해서 “생각이 난다(It thinks)”라고 해야 한다.

요컨대 생각은 주인이 아니라 객(客)이라는 말이다. 숙고가 아닌 그저 떠오르는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중세 이슬람 철학자 아베로에스(Averroes, 1126~1198)도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되어진다”라고 갈파했다. 그보다 훨씬 더 2560여 년 전 붓다는 “그것이 나에게 떠올랐다(It occurred to me)”라고 했다.

손님을 주인으로 잘못 알면 주거 침입자가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내 마음을 빼앗긴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큰일 나지 않겠는가.

생각은 어떻게 떠오르는가?

우선, 우리의 다섯 감각기관(眼耳鼻舌身)이 대상(色聲香味觸)을 만날 때 생각이 떠오른다.

예를 들어 눈이 대상을 만나면 그 대상이 무엇인지 파악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탐진치(貪嗔癡) 3독(毒)에 물든 중생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신발 공장 본사에서 시장조사차 두 직원을 아프리카로 보냈다.

직원 A는 “신발 수출 불가능, 가능성 0%, 모두 맨발임!”이라고 보고하고, 직원 B는 “황금 시장, 가능성 100%, 전원 맨발임!”이라고 전문을 보냈다. 누가 현실을 제대로 본 것인가?

사람은 대상에 따라 온갖 생각을 떠올리기 때문에 번뇌 망상이 불길같이 일어나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그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취사심(取捨心) 때문이다. 그래서 겉모습을 취하지 말고 내 마음을 돌이켜보아야 한다(不取外相 自心返照). 

다음으로, 외부 대상이 없더라도 인간의 마음은 진공을 싫어하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생각이 떠오른다. 이러한 생각들은 대부분 공상이나 망상에 불과하다. 깨닫지 못한 자의 생각이나 감정은 대개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떠오를 때 그것에 휘둘리지 말고 “이것이 무엇인가?” 스스로를 돌이켜 비추어보아야 한다.

그에 앞서 자신에게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잡념들을 재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철인 황제 아우렐리우스도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대승불교의 개론서 『대승기신론』은 ‘염기즉각 각지즉실(念起卽覺 覺之卽失)’이라는 심오한 진리를 가르친다. 이 한 구절만으로도 노벨상 감이다. 물동이를 이고서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듯이 생각이 떠오르는 즉시 알아차리면 그 생각은 사라진다. 이것은 검증된 원리로서 인간은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알아차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특히 슬픔에 빠져 있다든지, 화가 치밀 때 그리고 걱정 근심에 빠져 있을 때 사람은 거기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근자에 부쩍 눈의 피로를 느껴 필자는 최근 안과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왼쪽 눈이 녹내장으로 인해 시신경이 많이 망가졌다는 것이다. 좌우 시력 차이가 크다.

평소 내 소원이 어렵사리 구한 서가의 책을 모두 읽고 세상을 떠나는 것인데 겁이 덜컥 났다.

눈이 더 나빠져 책을 못 읽으면 어쩌나… 한참 동안 근심에 쌓인 채 알아차리지를 못했다. 알아차리고 나니 지혜가 번뇌를 대체했다. 성경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그동안 탈 없이 봉사한 눈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평상심을 되찾은 것이다. 책을 못 읽게 된다면 진짜 공부인 마음공부에 박차를 가할 좋은 기회가 아닌가! 그래서 ‘불파염기 지파각지(不怕念起 只怕覺遲 : 생각이 떠오르는 걸 두려워 말고 다만  알아차림이 늦는 걸 두려워해라)’라는 말의 의미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가령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고 마감 전에 보내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이어 ‘아직 초고도 마치지 못했으니…’, ‘이거 큰일이네’ 등 생각은 제멋대로 날뛰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원고 마감 전에’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운이 좋은 것이다. 이어지는 생각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 단계에서 그 생각의 기미를 알아차리면 훌륭한 수준이다. 성인(聖人)은 이런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는 것이지 화가 안 나서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즉각 알아차리기 위한 열쇠는 호흡이다. 몸은 나무와 같아서 항상 있는 곳에 있다. 그러나 마음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일정한 장소가 없다. 그래서 마음을 몸 있는 곳에 붙들어 매어놓는 수단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호흡이다. 호흡은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끊임없이 무익하고 해롭기조차 한 생각들에 포위되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진정한 영적 여행의 출발점이다. 생각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생각에 의해 통제된다는 뜻이다. 생각의 지배를 받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려면 자신의 생각을 늘 감시해야 한다. ‘관심일법 총섭제행(觀心一法 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찰하는 한 가지 법이 모든 수행을 포섭해야 한다. 이것이 ‘생각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길이다. 


정계섭 프랑스 파리 쥐시외(Paris -7) 대학에서 일반언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덕성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마르세유 대학 IML(루미니 수학연구소) 초빙교수, 소르본 대학 응용인문학연구소 초빙교수, 파리-에스트-크레테유(Paris -12) 대학 철학연구소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말로 배운 지식은 왜 산지식이 못 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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