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이란 무엇인가? 1
마음 닦는 공부는
불자의 필수항목
월암 스님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 선원장
제자가 선사에게 묻기를, “불법(佛法)을 깨달아 일을 마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마을의 소가 되어라.” 또 묻기를 “그럼 아직 깨닫지 못한 수행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절집의 소가 되어라.”
고려시대에는 소가 평생 노동에 힘쓰다 노쇠해지면 마지막으로 절집으로 데려와 염불하고 재를 베풀어 노고를 치하하고 왕생극락을 기원해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쇠한 소일망정 죽음을 달가워할 리는 만무하다. “절집의 소가 되어라”고 하는 것은 평생 농사를 위해 노력하고 마지막으로 육신마저 사람들을 위해 공양 올리고 죽음을 향해 떠나야 하는 결연한 소의 심정이 되라는 말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소의 자세처럼 수행자 또한 부처님과 중생의 은혜에 보답하고 생사 해탈을 위해 목숨을 담보한 자세로 정진하라는 경책이다.
그러면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일체중생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해야 한다. 마을의 소란 중생을 위해 육바라밀을 성취하는 보살이다. 나 혼자만의 깨달음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을 널리 다른 이를 위해 회향하는 수행자야말로 깨달음을 실체화해 보살행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대승불교에서 보면 “절집의 소”가 되란 말은 상구보리를 행하는 것이며, “마을의 소”가 되란 말은 하화중생하라는 가르침이다. 위로 열심히 수행해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널리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것이 바로 보살의 실천 명제다. 보살은 지혜로써 생사에 머물지 않고, 자비로써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무주행의 실천자다. 생사가 본래 공함을 깨우쳐, 생사를 그대로 열반으로 돌려쓰는 사람, 즉 생사에도 끄달리지 않고,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아 끊임없이 뭇 생명을 이롭게 하는 보현행자가 곧 보살이다. 이러한 불자의 모습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만의 해탈을 추구하지 않고, 역사와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회향해가는 삶을 산다.
『화엄경』에는 불교 신앙의 체계를 신해행증(信解行證)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정법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며,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하며,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이다. 대승불교에서의 바른 믿음은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토대 위에 부처님 법에 대한 정견을 갖추어야 한다. 우주와 인생이 무상・고・무아임을 바르게 인식할 때 정견이 확립되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마음이 부처라 할 때, 마음이 부처라면 마음 닦는 공부는 불자의 필수다. 수행하지 않고 어떻게 마음이 부처인 도리를 알 수 있겠는가. 마음이 부처인 도리를 체득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불교는 무늬만 불교다.
조사선에서는 중생이 부처임을 믿고 이해하고 수행해 깨닫는 것으로 본분사를 삼는다. 불자들의 삶의 모습 그대로가 본분사인 것이다. 일상의 평상심을 떠나서 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옛 조사는 “평상심이 도”라고 말하고 있다. 일상 그대로 법이요, 평상심 그대로 도다. 불법이란 결코 일상생활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생활 가운데서 불조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된다. 출가란 물리적 공간인 세속의 집을 떠남이 아니다. 탐욕, 욕망, 집착의 집을 떠남이 진정한 출가다. 재가의 삶도 욕망의 집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집에 머물되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알아서 청정의 집에 머무는 바 없이 머물러 스스로를 제도하고 남을 제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출가자든 재가자든 철저하게 신・해・행・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행의 원칙이다.
불교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계・정・혜 삼학을 근수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이다. 지계의 그릇이 청정해야 선정의 물이 맑아지고, 선정의 물이 맑아야 지혜의 달이 비친다. 삼학 가운데 가장 불자다운 것이 지계청정이다. 선정과 지혜는 누구나 닦을 수 있지만 계율을 수지하는 것은 불자들만의 몫이다. 청정한 지계의 생활이 가장 불자다운 특색이다.
세계는 바야흐로 명상의 시대가 되었다. 예로부터 명상의 주체자가 불자다. 지금 다양한 명상이 범람하고 있는 세계적 사조 속에서 그 주체자인 불자들이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다. 수행의 종교인 불교가 언제부터인가 기복에 함몰되어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지계의 생활 속에서 명상을 통한 선정과 지혜의 발현으로 불교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현대 한국 불교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봉암사 결사에서 보문, 청담, 성철, 향곡 등 선사들은 “부처님 법대로 살자”고 맹약했다. 그러니까 오늘의 한국 불교는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생활 불교”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생활 불교란(는) 생활 가운데서 염불, 기도, 참선을 몇 시간씩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진정한 생활 불교란(는) 삶 자체가 그대로 수행이 되는 것을 말한다. 나의 일상과 신행이 이원화되고 괴리되어 있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활 불교가 아니다. 즉 불법으로 사유하고, 불법으로 말하고, 불법으로 행동해 나의 삶 자체가 진리와 하나가 될 때 바로 생활 불교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생활이 불법이요, 평상심이 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생활 가운데서 신행하는 참된 불자의 모습이 될 수 있을까? 낮추는 마음(下心)과 비우는 마음(空心)이다. 형상이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바다다. 그리고 형상이 없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허공이다. 바다가 바다일 수 있는 까닭은 가장 낮은 자세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허공이 허공일 수 있는 것은 비우고 또 비웠기 때문이다. 만약 바다가 깨끗함과 더러움을 분별하고, 이기심과 아만심으로 스스로를 높인다면 결코 바다를 이룰 수 없으며, 허공이 욕심과 집착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다면 허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낮추고 낮추어 바다가 되고, 비우고 비워서 허공이 되면 곧 해인삼매를 이루고 허공법신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낮추어 너를 공경하는 것이 지혜요, 나를 비워 너를 채우는 것이 자비다. 자비와 지혜로 살아가는 불자가 곧 생활이 불법임을 증명하는 사람이며, 평상심이 도임을 실천하는 불자다. 보살행의 실천이 없는 불교는 살아 있는 불교가 아니다. 인간과 생명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불교가 정녕 창조적 신대승불교일 것이다.
우리 모두 바다같이 낮추어 해인의 삼매를 이루고, 허공같이 비워서 ‘텅 빈 충만’으로 신행의 물결이 출렁이게 하자. 수행이 온전히 생활이 되는 불자가 되어, 하심과 공심으로 모든 생명의 안락을 위해 기도하자. 그리하여 이 시대 이 땅에 보현행원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게 하자.
월암 스님 경주 중생사에서 출가해 도문 스님을 은사로, 동헌노사를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중국 북경대 철학과에서 ‘돈오선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국선원수좌회 의장, 동국대 경주캠퍼스 선학과 강사 등을 거쳐 현재 기본선원 교선사, 행복선 수행학교 교장,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 선원장으로 있다. 저서로 『간화정로』, 『돈오선』, 『친절한 간화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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