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안 서경수 거사 | 다시 쓰는 재가열전

다시 쓰는 재가열전|세속에 핀 연꽃


혜안 서경수 거사 


기상의 질문과 천외의 답변


이민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혜안 서경수 거사(1925~1986)


교수나 한 학자의 업적을 추적하다 보면 불가불 학문적인 실적을 색출하게 되고 그 의의를 따지게 된다. 한 인물의 행적을 어떻게 학문이란 국한된 범위로 축약하고 환원시켜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 시대의 학문이 지닌 한계에 모든 것을 부여한 탓일 것이다. 혜안 서경수 교수의 행적을 좇다 보면 이런 느낌은 더 절실해진다. 그리고 불교학이란 분야를 달리 생각하게 된다.

불교학은 학문적 추구의 행적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터득하게 된다. 불교적 수행과 현실 참여, 또 불교를 공부하는 행위는 거의 삼위일체적으로 서로 긴밀히 연관된 총체적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불교적 행위가 뒷받침된 학문의 내용이 불교학이고 불교를 공부한다는 것은 “삶의 하나의 양식(A way of life)”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혜안 선생을 통해 이런 불교학적 삶의 모습이 그대로 현시된다.

기상(奇想)의 질문과 천외(天外)의 답변

혜안 선생은 다면불(多面佛)과 같은 사람이었다. 연구실에 파묻혀 있는가 하면 선방에 앉아 계셨고, 우리와 산사를 찾는 등반길에 계셨으며, 또 술집에서 파안대소하며 두주불사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함께 있었을 때 우리는 혜안 선생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우리와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분이 우리에게 준 선적(禪的) 긴장감 때문이었다. 후학과 제자들을 그토록 가깝게 대해주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거리감을 갖게 했다. 함께하면서도 함께할 수 없는 다른 영역에 속한 존재라고나 할까. 이분이 즐겨 사용한 “세속 속의 탈속(脫)”인 듯했다. 이분의 평범한 말, 반어적인 말, 풍자가 가득한 말들은 그 어느 것 하나 권위와 형식에 찬 어법(語法)은 아니었다.

그러나 매섭게 사태를 꿰뚫는 말들이었다. 우리를 가깝게 하고, 우리를 꾸짖는 가운데 불교를 다시 보게 하는 선어록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말들을 혜안 선생의 트레이드마크인 ‘긴 수염(毛)’과 합해서 ‘모어록(毛語錄)’이라 부르며 즐거워했다.

한편 이분의 글을 읽다 보면 그것이 수필이 되었건 학술 논문이 되었건 보는 시각과 접근 방법은 전혀 예상외의 시각이고 색다른 관점들인 것이 느껴진다. 오늘의 시점에서도 완전히 공감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당시로서는 다른 글들과 차별화되는 창의적인 시각의 글들이었다. 그것은 이분이 선사들의 행적을 특징 있게 표현한 말인 ‘기상(奇想)의 질문과 천외(天外)의 답변’을 닮은 접근 방법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구술사의 중요성과 서구 불교학의 극복

이분의 학문적 접근의 하나로 주목되는 것은 고승들의 행적과 행장에 대한 관심이다. 그는 고승들의 일화가 줄 수 있는 종교적 의미의 다변성을 확인했으며 또 그것들이 전형적인 한국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이분의 전공은 오히려 서구 불교학의 언어·문헌학적 접근이어서 그의 학위 논문마저 산스크리트에 근거한 「존재(Bhava)와 비존재(Abhava)에 관한 연구」였다. 산스크리트마저 독학으로 공부한 것을 생각할 때 산사를 다니며 고승들의 일화를 수집하고 그 행태를 기술한 태도는 분명히 서구 근대적 불교학 연구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띠며 양면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점이 이분의 창의적 발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결국 이러한 발상은 후에 『한국 불교 100년사』 자료 수집에서 중요한 몫을 하게 된다. 구술사를 중시하는 것은 이미 오늘의 역사학에서 일반화된 방법이지만 당시에 스님들을 살아 움직이는 자료로 본 그의 혜안은 탁월한 것이다.

근대 불교학, 특히 서구 불교학이 빠진 모순은 불교를 박물관적 대상으로 떨어뜨린다. 불교를 문헌 속으로 환원시킬 때 불교의 살아 움직이는 현장은 배제된다. 불교를 문헌 속에서 색출함으로써 불교를 책상 위의 상상력으로만 작동시키는 것이다. 불교의 현주소는 동양이었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현행의 종교이지만, 서구에서는 학자들의 수집·번역·출판이라는 문헌적 과거로부터 출발해 그 문헌들을 소장한 도서관과 연구소에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곧 불교를 ‘골동품 애호적’인 지식이나 ‘유물관리적 지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혜안 선생의 학문적 경향도 이런 근대적 불교학 연구의 특징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분은 그것이 지닌 모순에 빠지지는 않았다. 이런 현상은 신기하게도 평생의 학문적·수행상의 반려자였던 불연 이기영 교수와도 상통하는 ‘서구 극복’의 훌륭한 예가 되고 있다. 

이기영 교수는 현대 서구 불교학계에서 ‘대체가 불가능한’ 문헌학적 연구의 대가인 E. 라모트(Etienne Lamotte)의 제자였다. 그는 수행과 연구를 병행하는 한국불교연구원을 설립하고 그 중요한 기능의 하나로 구도회(求道會)를 두었다. 이는 곧 실천 수행과 객관적 학문의 결합을 시도한 계획이었다. 혜안 선생은 한국불교연구원 설립 초창기부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물론 생애 마지막까지 이 연구원의 기둥 역할을 했다. 오늘날까지도 한국불교연구원에서는 혜안 선생의 추모 법회를 거행하고 있으니 이분과 연구원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혜안 선생 나름대로의 학문과 수행의 이율배반적 결합은 우연의 일치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근대 서구 불교학 방법론의 모순을 극복하는 하나의 확고한 틀을 의도적으로 마련한 것이다.


한국 불교 근대화의 담론

이분의 학문적 행적 가운데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 사항은 불교 근대화론에 대한 것이다. 한국 불교에서 불교 근대화나 근대 불교에 대한 담론이 언급될 때 우리는 혜안 선생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여러 학자들이 공유하며 한국 불교에 관한 연구를 활성화시켜 적지 않은 결실을 내고 있다. 이런 저술들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 혜안 선생이었다. ‘불교100년사편찬위원회’의 제도적인 틀을 확립한 것은 덕산 이한상 거사의 재정적 지원이었지만 실질적 자료 수집과 편찬 작업은 혜안 선생의 주도 아래 정광호, 박경훈, 안진오 교수와 같은 분들의 손길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100년사 편찬을 끝마쳤을 때 혜안 선생의 감회에 찬 말은 이분이 불교 근대화론에 얼마나 몰두했는가가 여실히 드러난다.

“옛날 것은 그렇게 억세게 보존하기를 애쓰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오늘에 가까운 100년 동안의 문서 자료에는 그렇게 무관심한지 모르겠다. 100년사의 자료는 그럭저럭 미비한 대로 모아보았다. 이제 분석과 정리 작업이 남았다. 이 방면에 뜻을 둔 동학이나 후학들이 많이 나와 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의 이런 개척 작업과 그의 근대 불교 연구에 대한 애정에 힘입고 있음에도 그분의 업적을 소홀히 한다. 심지어 근대 불교 담론의 글을 쓰며 100년사 자료를 활용하면서도 그의 이름을 인용하는 데는 무척 인색한 것이 우리의 불교학계다. 


에세이적 논문과 논문적 에세이

혜안 선생의 글은 평이한 에세이류의 글들이고 본격적인 논문이 적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글들에서 전문 용어나 학술적 용어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산스크리트나 한문 경전 용어를 다루면서 모두 풀어쓰고 있고 또 가급적 주해(註解)를 달지 않는다. 현학적으로 보이거나 다른 사람의 논문을 인용하는 것도 자제한다. 곧 이분의 글들은 논문과 에세이의 경계에 서 있어 규격화된 논문의 영역을 허물고 있다. 나는 오히려 이런 형태의 글들에서 이분만의 번뜩이는 창의성과 직관을 감지하고 진정한 의미의 ‘논문의 무게’를 느낀다. 한국 불교의 억압의 역사를 ‘순교자 없는  박해사’라 하거나 ‘호국과 호법의 역설적 동일률이 한국 불교의 특이성’이라는 지적은 이미 논문 몇 편을 능가하는 탁월한 관점이 되고 있다. 결국 이런 창의적 관점에서 우리는 오늘의 한국 불교사를 개진하고 있는 것이다.

또 혜안 선생의 글 가운데 주목할 것은 여행기다. 스님들을 찾아 국내 사찰을 탐방한 것은 물론 해외여행도 많이 했다. 인도 여행기는 당시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이 되었다. 혜안 선생은 네루 대학에 한국어과를 개설하고 한국 문화를 가르치며 긴 시간 인도에 상주했다. 1972년 인도를 처음 여행한 후 부처님의 족적을 남김없이 샅샅이 찾았고 그 인상기들을 남겼다. 나 역시 그 당시 혜안 선생을 모시고 첫 해외여행으로 인도 여행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의 여행기는 종교적 감흥에 젖는다거나 잃어버린 샹그릴라를 찾는 과거 지향의 감상기는 아니었다. 혜안 선생은 오히려 현실·현장을 투시하며 현재와 과거의 간격, 종교적인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대비시켰다.

그리고 인도는 서구 제국주의의 창안이고 그 산물임을 지적하며 인도의 각기 다른 지방과 그 특색들을 드러내려 했고 또 지역성을 음미했다. 각각의 지역은 나름의 특성과 문화가 있을 뿐이라 했고 인도라는 정치적인 단위를 거부했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자칫 한 지역을 단일한 색깔로 호도할 위험을 내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의식과 현장 의식은 학자적 관심에서 나온 것도 사실이지만 자신이 일제의 식민지적 지배의 희생물이라는 자기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한글 사용으로 일제의 고문에 의한 뼈아픈 희생을 겪은 적이 있었다.

이제 혜안 선생의 글을 검토하며 반추하다 보니 ‘과거는 현재의 반영’이라는 혜안 선생의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이분이 써놓은 글들의 제목들은 지금 우리 불교의 현장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35년 전에 쓴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현장을 날카롭게 짚은 안목들은 그의 법명 그대로 혜안(慧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우리 불교의 현실과 현장이 이분이 지적한 상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도 우리 젊은 불자들, 아니 이미 늙어버린 우리들에게 선배 거사로서 웅변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민용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불교학과를 수학한 후 하버드대 동아시아문명과 언어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남대 교수, 한국불교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 있다. 번역서에 『성스러운 해석』이 있고, 「불교학 연구의 문화 배경에 대한 성찰」, 「서구 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학문의 이종교배-왜 불교신학인가?」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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