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욕, 무엇을 왜
얼마나 참아야 하나
윤원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초빙석좌교수

불교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 고치기 위해 온갖 수행 방편 고안
흔히 불교는 수행과 깨달음의 종교라고 일컫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자기 자신의 잘못된 점들을 고쳐서 올바른 상태가 되도록 갈고닦는 것이다. 불교에서 진단하는 우리의 잘못된 점의 핵심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이다.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 거기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하고, 그 점을 고치기 위해 온갖 수행 방편을 고안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태는 생명을 가진 개체들이 타고나는 기본적인 속성이다. 나아가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기질을 발동시키고 더 배워 습성으로 강화해가기도 한다. 즉 자기중심성과 이기성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고 또한 생존하기 위해서 습득해나가는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조건인 셈이다.
그런데 불교는 바로 거기에 문제의 발단이 있다고 진단하고, 생명을 가진 개체로서 생래적으로 안고 있는 그 근본적인 속성까지도 극복하는 수행을 요청한다. 타고난 존재의 본질적인 조건까지도 극복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환골탈태요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의 전환이다. 범부중생이 부처로 바뀌는 엄청난 일이니, 이를 위해서는 그만큼 극도로 치열한 수행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선불교에서는 수행과 깨달음을 인과관계로 여기는 것도 망상이라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맥락의 이야기여서 따로 설명해야 한다.)
팔정도, 아상과 아집의 오류 극복하고 떨쳐버리게 하는 수행법
불교 수행법의 기본이 되는 것이 팔정도(八正道)다. 석가모니가 첫 설법에서 가르쳐주었다는 수행법이 팔정도여서만이 아니라 그 내용이 불교의 기본적인 진단과 처방을 단적으로 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생명체로서 태어나면서 이미 장착하고 고정불변의 진실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의 오류를 극복하고 떨쳐버리게 하는 수행법이다. 그 여덟 가지 길은 우리가 자신의 몸과 입과 의식을 잘 제어해서 올바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닦으라는 처방이다. 그 외에 오계(五戒), 십계(十戒) 등 갖가지 형식으로 처방되는 수행법들이 궁극적으로는 다 그렇게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의 정신과 언행을 삼가고 갈고닦아 바로잡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승불교는 중생제도의 이타행 함께 강조하는 수행법 제시
대승불교는 개인이 각자 자신을 다스리는 그러한 노력에 더해 중생제도(衆生濟度)의 이타행(利他行)을 함께 강조하는 수행법을 제시한다. 원효대사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自利利他 如鳥兩翼)”고 해 어느 한쪽 날개도 없으면 날지 못하는 새에 비유했다. 이른바 지혜와 자비를 함께 닦는다는 대승보살도의 구호가 또한 그런 뜻이다. 대승보살도의 기본 수행법으로 여겨지는 육바라밀(六波羅密)을 보면, 계를 지키고 정진하며 선정을 닦고 공의 지혜를 성취한다는 내향적인 수행 항목들과 함께 보시와 인욕이라는 이타적, 대외적인 항목이 두 개 들어 있다. 심지어 굳이 순서가 꼭 중요하지는 않지만, 보시가 첫 번째에 위치한다. 팔정도가 자기 자신을 위한 수행 항목들인데 비해, 육바라밀에는 대승보살도의 이상을 반영해서 사회성이라 할 수 있는 항목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요즘에는 사용하지 않는지 더 이상 들리지 않지만, 한때 대한불교조계종이 외쳤던 “깨달음의 사회화”도 대승보살도의 그런 정신을 간략하면서도 멋지게 담아낸 구호였다.
인욕은 주로 탐진치 중 성냄을 다스리는 수행
이번 주제에 집중해 육바라밀 중 인욕에 대해 살펴보자면, 산스크리트어 끄샨띠(kṣānti)의 번역어로서 바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일단은 밖으로부터 닥쳐오는 욕됨 내지 역경을 참고 견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탐진치(貪瞋痴, 탐냄, 성냄, 어리석음) 삼독(三毒, 독과 같이 해로운 근본적인 번뇌 세 가지) 가운데 주로 성냄을 다스리는 수행이다.
하지만 단순히 남이 나를 해롭게 해 화가 나는 것을 참고 견디는 것만이 인욕이 아니다. 그것은 내원해인(耐怨害忍), 즉 ‘원한과 해를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일컬으며, 세 가지 인욕 중 하나일 뿐이다.(인욕의 종류를 몇 가지로 꼽으며 분류해 설명하는 방법은 전통적으로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세 가지로 분류하는 설명을 소개한다.) 다른 두 가지는 안수고인(安受苦忍)과 제찰법인(諦察法印)인데, 우선 안수고인이란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안정을 유지하며 참아내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 제찰법인은 위의 두 가지와 맥락이 좀 다르다. 제찰법인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고도 하며 무생법, 즉 불생불멸의 이치를 살펴 확인하고도 견디어낸다는 뜻이다. 범부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다 뒤집어버리는 어렵고 두려운 진상을 확인하고도 받아들이고 견디어내는 것이다. 모든 것을 개체로만 보는 범부의 눈에는 모든 사물과 현상이 마치 부단히 생겨났다 없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空)의 도리와 연기법(緣起法)으로 보면 사실은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 불생불멸의 이치다. 범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이치를 확인해 받아들이고 그 경지에 굳건히 머문다는 것이 제찰법인, 무생법인의 뜻이다. 그러니까 인욕은 단순히 나를 화나게 하고 괴롭게 하는 욕됨과 역경을 참고 견디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이고 세상 전체보다 소중한 나의 자아가 불생불멸의 이치 앞에서 다 해체되어버리는 사태,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아상과 아집이 부수어져버리는 그 사태를 견뎌내고 받아들이는 것까지도 인욕이라고 한다.
무아의 이치 깨닫고 그 경지에 굳건히 서는
무생법인 달성해야 욕됨과 원한, 괴로움 완벽하게 참고 견뎌낼 수 있어
여기에서 ‘바라밀(波羅密)’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알다시피 ‘바라밀’은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āramitā)를 음사한 말로 완성, 완전, 완벽, 완료 등의 의미를 지닌다. 불교 수행의 목적과 이상을 달성한다는 뜻을 살려서 도피안(到彼岸, 괴로움으로 점철되는 사바세계인 이쪽 기슭에서 해탈 열반의 저쪽 기슭으로 건너감), 사구경(事究竟, 모든 일, 즉 모든 수행의 궁극적인 결말)이라고 의역되기도 한다. 또한 육바라밀에 대해서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여섯 가지 항목을 닦음으로써 피안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해설되곤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바라밀’의 어학적인 뜻, 즉 완성, 완전, 완벽, 완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살은 그 여섯 가지 항목의 수행을 완벽하게 완성해 완전히 완료해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그 수행의 완료는 아상, 아집을 떨쳐버리고 무아(無我)의 진상을 체득해 무아로서 살아가는 경지에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개념은 아상이 없어야 완벽한 보시, 즉 보시바라밀이라고 가르친다. 인욕에 적용하자면, 무아의 이치를 깨닫고 그 경지에 굳건히 서는 무생법인을 달성해야 내원해인이든 안수고인이든 욕됨과 원한, 괴로움을 완벽하게 참고 견뎌낼 수 있다. 『금강경』이 그런 인욕바라밀을 이야기하고 있다.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이 인욕바라밀이 아니므로 그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아주 옛적에 인욕선인(忍辱仙人)이었을 때를 돌아보자면, 가리왕(歌利王)이 내 몸을 갈기갈기 찢었을 때, 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때 만약 내가 그러한 견해에 머물러 있었다면 나는 그 왕에게 분노를 느끼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니라. 또한, 아주 옛날 오백 생을 거듭하면서 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지 않고 인욕바라밀을 수행했다.”
인욕바라밀, 즉 인욕의 완성 또는 완벽한 인욕은 불도의 완성이요 곧 성불…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실행되는 경지까지 지향하라
아리송한 표현과 개념들이 많지만 이 글의 맥락에서 필요한 만큼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인욕바라밀이라는 개념은 진정한 인욕바라밀과 무관하고, 개념화조차 되지 않은 진정한 인욕바라밀을 따로 이야기하겠으니 알아들으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 대목에서 말하는 진정한 인욕바라밀은 ‘누군가’가 ‘내 몸’을 갈기갈기 찢는 지경에서도 그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기 때문에 완벽히 참고 견디었고, 거기에는 참고 견딘다는 개념조차 가서 붙을 수 없었음을 말한다. 그 사태에 대한 인식조차 없이 저절로 인욕이 되었던 것은 아상(“나”가 있다는 관념), 인상(“남들”이 있다는 관념), 중생상(뭇생명체들이 있다는 관념), 수자상(시간 속에서 지속되는 존재가 있다는 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생명체가 생래적으로 가지고 태어나고 또 후천적으로 강화시켜가는 그 관념들을 다 떨쳐버린 맥락에서 해주는 설법이다. 다만 굳이 수보리의 질문에 대답을 하자니 개념을 동원해 설명하지만, 개념 이전의 진정한 인욕을 알아듣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욕바라밀, 즉 인욕의 완성 또는 완벽한 인욕은, 개념을 넘어서야 하지만 불가피하게 개념화하자면, 불도(佛道)의 완성이요 곧 성불(成佛)이다. 육바라밀의 다른 항목들도 다 마찬가지다. 우선은 “내”가 “나”의 에너지를 동원해서 보시하고 인욕하는 데 의도적으로 힘쓰겠지만, 결국에는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실행되는 경지까지 지향하라는 가르침이다.
윤원철|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초빙석좌교수, 월간 『불교문화』 편집위원으로 있다. 『불교사상의 이해』, 『종교와 과학』 등의 공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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